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Ⅳ 망자의 공간 변화의 역학

앞의 두 장을 통해 전통적인 망자의 공간에서 양 축이 재편되고 있음을 살펴보 았다. 이 장에서는 망자의 공간 중 칠전리 주변으로 모이는 조상의 장소에 초점을 둔다. 앞 장에서 조상의 장소에 대한 내용이 퍼져있는 묘를 모아야만 하는 현실적 인 맥락을 드러내는 데에 초점을 두었다면, 이 장에서는 묘를 모으는 과정에서 강 조되는 영속성이 실현되는 과정을 살펴볼 것이다. 이를 통해 조상의 묘를 모으는 과정이 묘소의 개별성을 넘어 혈연적 집단성을 강조하고 있음을 보이며, 묘를 모 으는 것이 칠전리 주민들에게 어떤 의미로 인식되는가를 살펴볼 것이다.

을 연도별로 정리한 것(진도군통계연보 2009, 2014)이다. 이 표를 보면 2000년 까지 단 한 곳도 없던 진도군 내의 가족·문중 납골당은 2003년에 16곳, 2004년 에 11곳이 증가하는 양상을 보인다. 이는 2005년을 기점으로 바뀌는데, 2009년 까지 네 곳이 늘어나고 2010년에는 두 곳 줄어들어 2012년 12월 31일 기준으로 여전히 36곳의 가족·문중 납골당이 진도 내에 있다. 총 36곳의 가족·문중 납골당 은 중 규모가 가장 큰 곳은 504명을 안치할 수 있었고, 가장 작은 곳은 30명을 안치할 수 있었다. 네 곳을 제외한 나머지 납골당은 100명 이내를 안치할 수 있 는 작은 규모로 조성되었다. 진도 내 가족·문중 납골당의 평균 규모는 88명을 안 치할 수 있는 크기로, 2012년 연말 기준으로 평균 47명이 안치된 상황(진도군 행 정자료)이다.

연도 2000 2001 2002 2003 2004 2005

개수 0 1 3 19 30 34

연도 2006 2007 2008 2009 2010 2011

개수 35 35 - 38 36 36

[표Ⅳ-1] 진도군의 연도별 등록 사설 납골당 수 (진도군 통계연보 2009: 371, 2014: 341)

이 시기는 전국적으로 화장과 납골당에 대한 관심이 급격하게 커진 1999년 이 후의 맥락과도 일치하며, 유사한 시기에 동일한 양상의 변화가 진도에도 나타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변화의 한 축에는 이장에 대한 지방정부 차원의 지원 이 자리하고 있었다. 당시 진도군에서는 납골당을 설치할 경우 최대 500만 원까 지 경비를 지원해주고 있었다. 2000년대 중반 100기를 안치하는 규모의 납골당 설치에 드는 비용이 약 1000~1500만 원 선이었기 때문에 지방정부의 지원을 받 을 경우 많게는 총비용의 반액까지도 보조받을 수 있었다.

현재 칠전리에 있는 두 곳의 납골당 역시 각각 2003년, 2004년에 만들어진 것 으로 위의 급격한 납골당 증가 시기와 일치한다. 그러나 지방정부가 제공하는 금 전적 유인이 납골당 증가의 핵심적인 지점이라고 볼 수는 없다. 이는 칠전리의 두 납골당 모두 지방정부의 지원을 받지 못했던 점에서 잘 드러난다.

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납골당은 문중 납골당, 4대 미만의 좁은 혈연 구성원의 협력으로 만든 납골당을 가족 납골당으로 구분하고자 한다. 이러한 구분은 차후 가족 묘소와 문 중 묘소의 구분에도 동일하게 적용할 것이다.

[사례Ⅳ-1] 납골당과 정부 보조금

박연호는 보조금이 생기고 나서 많은 칠전리 주민들이 납골당에 관심을 보였다고 밝혔다. 그러나 정부 보조금 지급이 시작된 것은 납골당에 대한 논의가 한창이던 2003년 이후였으며, 보조금을 타는 것 역시 까다로웠다 고 기억했다. 정부에서는 1m 이상의 크기로 납골당을 설치하지 못하게 했고, 도로에서 일정 거리 이상을 떨어지도록 통제했다. 이 기준에 맞지 않는다면 신청하지 못했고, 신청해서 지원을 받더라도 이를 다시 반납해 야 하는 일들이 벌어졌다고 기억했다. (박연호, 70대)

[사례Ⅳ-1]처럼 납골당에 대한 금전적 지원이 있었던 것은 납골당에 마을 사람 들이 관심을 두기 시작했던 이후의 일이었다. 또한, 지원을 받기 위해서는 까다로 운 절차를 거쳐야 했기에 애초부터 국가의 지원을 기대하지 않고 사업을 진행한 경우도 있었다. 다만, 국가의 납골당에 대한 금전적 지원은 납골당에 대한 이야기 가 더 많이 퍼지는 배경이 되었던 것은 분명하며, 구체적인 준비 과정에서는 국가 의 지원이 없다 하더라도 해야만 하는 더 중요한 이유가 이들에게 있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칠전리 주민들에게 납골당이 선호되었던 이유는 크게 세 가지로 정리된다. 첫 째, 여러 곳에 퍼진 조상의 묘를 한 곳으로 모을 수 있다는 점이다. 3장에서 지적 한 것처럼 칠전리의 묘는 마을 주변으로, 혹은 마을 밖 여러 곳에 흩어져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묘를 한 곳으로 모으는 것은 현재 마을에 살지 않는 후손들이 언 제라도 찾아올 수 있고, 찾아오기 쉬운 곳에 조상을 모으기 위함이다. 이 경우 납 골당은 큰 장점이 있다.

두 번째 장점은 벌초로부터의 해방이다. 납골당은 돌로 만들기에 한 번 만들고 나면 벌초를 하지 않아도 된다.

[사례Ⅳ-2] 납골당을 고민한 이유

“납골당은 인제 애기들(자식들)이 아들이 없은께 (벌초를 못해도) 납골당 지서 갖고 거그서 가이나들또(딸·손녀가) 오면 가면 이라고 지키고… 사 우들(사위들)도 우리 엄매 아배 멧(묘)이단다 지키고… 거 납골당에다 힘 을 쓸란가 그라고. 하라겠어. 그래서 인자 문중에 선산 있으니께 거그다 납골당 하나 지워줌 딱 하나 해놓고 공구리로 딱 해서 저그들 전부. 이렇 게 딱 대문 열고 들어가서 안에다 전부 이름 표 쓰고 좋게. 공구리도 탁 탁 말아서 이렇게…” (문옥순, 80대)

[사례Ⅳ-2]는 한 편에서는 묘소를 모아 기억하기 쉽게 만들기 위해서 납골당을

만들고 싶다는 의도와 함께, 손자가 없어서 벌초할 사람이 없더라도 계속 유지되 는 곳으로 납골당을 생각했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납골당은 이처럼 문중 선산에 비해 좁은 공간을 차지하며, 돌로 만들기 때문에 때때로 청소는 해줄지언정 벌초 를 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매년 들어가는 벌초 비용이나 여기에 드는 노력을 크 게 줄일 수 있다.

세 번째 장점은 여러 대의 조상들을 구분하고 개별 조상 간에 존재하는 혈연적·

계보적 질서를 한정된 공간 안에서 구현할 수 있다는 점이다. 2장에서 지적한 것 처럼 칠전리에서 조상의 묘에는 개별성과 집단성이라는 두 가지 원칙이 적용된다.

즉, 조상의 묘는 기본적으로 개별성이 유지되어야 하므로 조상을 모신 장소의 형 태는 변하더라도 각각의 조상은 뒤섞이지 않고 구분되어야 한다. 동시에 구분된 조상 사이에 일정한 공간적 서열을 보여주는 소목(昭穆)의 규칙을 따라서 윗사람 을 왼쪽 위에 모셔야 한다. 비록 납골당에는 조상의 뼈만 추려서 모시지만, 납골 당은 앞 장에서 강조된 개별성의 원칙과 집단성의 원칙 모두가 적용될 수 있는 장소이기도 했다.

[그림Ⅳ-1] A 가족 납골당

[사례Ⅳ-3] A 가족 납골당 구성 방식

박연호(70대)는 자신의 가족 납골당을 크게 세 가지 건물로 구성했다고 말했다. 높이가 낮은 납골당 세 개가 정삼각형의 꼭짓점에 있는 것처럼 배열했다는 것이다. 각각의 납골당은 멀리서 볼 때 잘 눈에 띄지 않도록 낮게 설치했고, 납골당마다 납골함이 한 층씩 들어가게 구성하였다고 했 다. 그는 자신이 모셔야 하는 윗대 조상들을 모두 세 납골당 중 위에 설 치된 납골당으로 모셨다. 아래의 두 납골당에는 각각 왼편에 자기와 동대 사람들이 들어가도록 기획하였고, 오른편은 자기 자손들이 들어갈 납골당 으로 마련한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사례Ⅳ-4] 상만리 문중 납골당의 배열 방식

진도 남쪽 임회면 상만리의 문중 납골당은 진도에서 제일 큰 규모인 525 기가 들어갈 수 있는 납골당이다. 전주이씨 문중에서 만들고, 각각의 소 문중에서 이곳으로 이장하도록 하여 운영된다. 각각의 칸에는 1부터 525 까지 번호가 매겨져 있으며, 이곳을 안내해준 이강환(70대)은 족보에 따 라 들어갈 위치가 이미 정해져 있다고 하였다. 개별 사문중에서 조상을 이장하여 뼈를 추러 오면 그 순번에 맞는 위치에 뼈를 납골한다. 그 순서 는 항렬을 먼저 고려하고, 동항렬이라면 먼저 태어난 사람을 더 먼저 놓 는다. 번호는 가장 위층 왼쪽에 1번 자리가 있으며 그 오른쪽에 2번 자리 가 있다. 그는 이곳에서 좌고비동(높은 사람은 왼쪽, 낮은 사람은 동쪽)의 질서가 지켜진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위의 두 가지 사례는 모두 납골당 내에서 조상을 모시기 위한 일정한 질서가 강조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이처럼 기존의 분묘를 대신하여 납골당이 들어설 수 있었던 바탕에는 조상의 장소에서 나타나던 개별성과 집단성이라는 전통적인 규범이 납골당 내에서도 유지된다는 점이 있다. 이러한 전통적 규범이 지켜지기 어려운 방식으로 조상의 장소를 재편한 집안에 대해서는 마을 안에서도 비판이 따르며, 문중이나 가족 내부의 논의에서도 반대가 심하다는 점은 이러한 규범의 준수가 여전히 중요하게 여겨짐을 보여준다.

납골당이 보여준 위의 세 가지 장점은 기존의 선산에 모신 묘소를 계속해서 관 리할 수 없게 된 현재 상황에서 조상들을 후대에서도 “영원히” 모실 수 있도록 해주는 중요한 지점으로 여겨졌다. 즉, 묘지를 돌볼 자손들이 타지로 나가고, 금전 적 부담으로 벌초를 계속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납골당은 조성비용이 많이 들지 만 만들고 난 뒤에는 돌로 만들어서 손보지 않아도 오래 갈 것이며, 조상들을 모 시는 소목의 법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 좋은 방식으로 받아들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