Ⅲ. ‘망자의 공간’에서의 변화
본 장에서는 전통적인 망자의 공간에서 나타나는 변화를 살펴볼 것이다. 공간구 조의 변화는 크게 두 가지 차원으로 나타난다. 한 가지 차원은 개별 영역의 변화 이다. 특히 소외된 망자의 장소를 구성했던 아장터와 공동지의 구분이 점차 사라 지는 양상이 나타난다. 다른 한 가지 차원은 망자의 공간에서 나타나던 공간구조 의 역전이다. 이는 조상의 장소가 칠전리 주변으로 모이고 소외된 망자의 장소가 칠전리 밖으로 사라지는 양상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공간적 변화를 파악하는 것에 서 우선 살펴야 할 것은 칠전리에서 나타난 인구구조의 변화이다. 이는 칠전리 주 민들이 현재 놓인 맥락을 보여준다. 이를 시작으로 이 절에서 연구자는 소외된 망 자의 장소와 조상의 장소 각각에서 나타나는 변화를 주민들의 설명을 중심으로 살펴볼 것이다. 이를 통해 연구자는 칠전리를 중심으로 구성되었던 망자의 공간이 마을을 넘어 보다 넓은 규모에서 재편되고 있음을 보이고자 한다.
람들이 느꼈던 80년대 이후의 변화가 이전과는 전혀 다른 것임을 보여준다.
[표Ⅲ-1] 전라남도와 진도군의 인구추이 (진도군지 2007: 149)
칠전리 역시 이러한 흐름에서 유리된 공간이 아니다. Ⅰ장의 마을 소개에서 언 급한 것처럼 칠전리 역시 급격한 인구 감소를 경험하였다. 특히 주목할 부분은 인 구구성 양상의 변화이다. 1968년 당시 칠전리 인구인 1,464명 중 20세 이하의 인구는 총 884명으로 전체 인구의 절반 이상(60%)이 20세 이하인 피라미드형 인 구구조를 보였다. 그러나 현재 칠전 인구인 256명 중 60세 이상 노인이 137명으 로 54%가 60세 이상의 노인(2014년 12월 기준)이다. 특히 70대 노인 인구는 66 명(25%)으로 전체 마을 인구의 1/4을 차지하고 있어 이전과 달리 역전된 인구 구 조를 보인다.
칠전리를 떠난 이들은 어디로 갔는가. 연구자는 이를 잘 보여줄 수 있는 자료로 칠전국민학교 동문회에서 소장 중인 동문 명부 및 주소록에 주목하였다. 칠전국민 학교는 한국전쟁 중에 운영되기 시작한 학교이다. 이전에 칠전리에 거주하던 학생 들은 진도읍의 진도국민학교나 의신면 돈지리의 의신국민학교를 다녔다. 그러나 칠전국민학교의 설립과 함께 주변의 칠전, 중굴, 하굴, 신생동의 학생들이 칠전국 민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초기 건물은 현 칠전리 마을회관 근처로 마을의 중심부 에 있었으나, 이후 자리를 현재 칠전리 동쪽 “모태뜰”로 옮겼다. 이 학교는 이후 38회의 졸업생을 배출하였고, 1993년 17명의 졸업생을 마지막으로 폐교되었다.
현재 칠전국민학교 동문회에서 보관하고 있는 주소록은 이 기간에 학교를 졸업
한 총 1629명의 학생45) 중 551명의 현재 주소(2013년 기준)가 기록되어 있다.
연구자는 이 자료를 중심으로 분석하면 법정리 수준에서 칠전리 주민의 유출지를 대략 보여줄 수 있다고 보았다. 이를 분류해서 보면 다음의 표와 같다.
지역 인원수 세부지역 인원수 세부지역 인원수
전남지역
46) 134명(24%) 진도군 67명(12%) 칠전리 25명(4%) 진도읍 30명(5%) 광주시 35명(6%)
경기지역 371명(67%)
서울시 172명(31%) 인천시 43명(8%) 성남시 25명(4%) 안산시 21명(4%) 부천시 13명(2%) 경남지역 17명(3%) 부산시 7명(1.2%) 충청지역 16명(3%) 대전시 9명(1.6%) 전북지역 6명(1%)
강원지역 2명(0.3%) 제주지역 2명(0.3%) 경북지역 0명 해외거주 3명(0.5%)
[표Ⅲ-2] 칠전국민학교 졸업자들의 거주지 현황 (2013년 기준)
[표Ⅲ-2]는 칠전국민학교를 다녔던 학생 중 67%가 서울·인천·경기 지역으로 이 주했음을 보여준다. 그중에서 서울특별시에 172명으로 가장 많은 31%가 이주했 으며 그 뒤를 이어 인천시에 43명(8%)이 이주했다. 진도에 남은 사람은 전체의 12%인 67명이며, 현재 진도읍내에 거주하는 사람이 30명으로 거의 절반 가까운 사람이 진도읍에 살고 있다. 이는 진도에 거주하는 사람이라도 진도읍처럼 상대적 으로 도시화된 곳에 거주하는 양상이 나타남을 보여준다. 경상남도나 충청도 쪽으
45) 칠전국민학교 졸업생 총 수는 2003년 발간된 『칠전향우회보』에 실린 졸업생 명단을 통해 파악하였다.
46) 여기서 ‘** 지역’은 지역 구분의 편의상 특별시나, 광역시를 포괄하여 표기하였다. ‘전 남지역’에서는 광주광역시를, ‘경기지역’에서는 서울특별시와 인천광역시를, ‘경남지역’에 서는 부산광역시·대구광역시·울산광역시를, ‘충청지역’에서는 대전광역시를 포함하여 계 산하였다.
로도 일부의 이주가 확인되지만, 강원도, 경상북도, 제주도로의 이동은 이 자료상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정리해보면 칠전리(법정리)의 인구 유출이 대부분 발달한 도시지역인 서울경기, 경남권과 진도에서 가까운 전라남도 권역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전라남도 내에서는 진도읍이나 광주·목포로의 이주가 나타났다.
칠전에서 1940년대 이후 태어난 많은 학생들은 어려서는 칠전국민학교를 다니 고47), 중학교는 진도읍에 있는 진도중학교로 진학했다. 이후부터는 진로의 차이가 나는데, 성적과 가정형편이 좋은 학생들은 광주나 목포의 고등학교로 유학을 떠났 다. 설령 진도 내에서 고등학교를 마친 경우라도 20대 초중반의 많은 이들이 진도 를 떠나 타지로 향했다. 연구자는 칠전리 내에서 상대적으로 젊은 40~50대 청년 층48)과 이야기를 통해서 마을에서 거주하는 해당 연령대 주민의 상당수가 이미 도시생활을 경험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촌향도의 양상은 칠전리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났으며, 현재의 인구구성은 이러 한 상황을 그대로 반영한다. 즉, 칠전리에 남아 마을을 지키는 이들은 대부분 부 모세대이고, 마을 밖으로 나간 것은 대부분 타지로 학교에 다닌 자식세대이다. 물 론 부모세대라고 하여 모두 마을에 남은 것은 아니다. 현재 70대 이상 노년층 중 에도 도시로 이주한 경우가 많았다. 다만, 마을에 남은 이들이라 하여도 그들의 자식들은 대부분 칠전리 밖으로 이주한 상태였다. 기존의 묘지 질서는 부모세대가 젊었을 때는 이들이 칠전리에 머물렀기에 무리 없이 작동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부 모세대가 연로해지나 세상을 떠나고 칠전리에 남은 자손이 줄면서 기존 망자의 공간 질서 역시 많은 변화를 겪게 되었다. 다음의 두 장에서는 이러한 인구 구성 형태의 변화가 다른 요인들과 결합하면서 칠전리 주변 망자의 공간이 어떻게 변 화해 가는가를 살펴볼 것이다.
47) 칠전리에는 이전부터 학계(學契)를 구성하여 서당교육을 해왔다. 1900년대 진도읍의 진도국민학교가 생기면서 1940년대 이전에 출생한 학생들은 진도읍의 진도국민학교를 다니거나 돈지리에 있는 의신국민학교를 다녔다. 그러다 일제가 총동원령을 내리면서 국민학교를 다니지 않는 학생들이 생기자 해방 전후로 잠시 서당을 다시 운영하였다.
이후 1950년대 칠전국민학교가 생기면서 칠전리의 학생들은 대부분 칠전국민학교를 다 녔다.
48) 이들은 마을 안에서 청년으로 대우받으며, 청년회를 구성하는 주요 구성원이 된다. 따 라서 연구자는 이들을 ‘청년층’으로 표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