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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의 장소가 ‘정상적 죽음’을 맞은 선조를 일정한 질서에 따라 모신 곳이라면, 소외된 망자의 장소는 이와는 대립된 성격을 가진다. 이는 어떤 점에서 대립되는 가에 따라 크게 두 차원으로 나누어진다. 한 차원에서 소외된 망자의 장소는 ‘정 상적 죽음’과 대비되는 ‘비정상적 죽음’을 맞은 ‘소외된 망자’와 관련된 장소를 말 한다. 이 글에서는 조사(早死)한 어린아이를 묻은 아장터35)가 여기에 해당한다.

다른 한 차원에서 소외된 망자의 장소는 조상의 장소에서 나타나는 묘 사이의 질 서가 잡히지 않은 혼돈의 공간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망자의 장소 중에서도 온전 히 조상의 장소가 되지 못하는 ‘소외된’ 장소이다. 칠전리 주변에서는 공동지가 이 에 해당한다. 연구자는 두 장소 모두를 소외된 망자의 장소로 칭하며, 이 소절에 서는 조상의 장소와 대비되는 두 장소를 각각의 대립 축에 따라 살핀다.

우선 ‘비정상적 죽음’과 직결되는 ‘소외된 망자’에 대한 장소로 칠전리에는 아장 터가 있다. 여기서 아장(兒葬)은 장성하지 못하고 죽은 아이들을 장사지내는 방식 을 말하는 것이며, 그러한 아이들의 시신이 묻힌 곳이 아장터이다. 어린아이의 죽 음은 결혼하지 못한 이의 죽음이자, 제사를 지내줄 자손을 남기지 못한 이의 죽음 이기에 ‘비정상적 죽음’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진도에서 아장은 크게 두 가지 종류 가 있던 것으로 전해진다. “오쟁이 쌈(혹은 오장치 쌈)”과 “(독)다멀”이 그것이다.

오쟁이는 “짚으로 만든 망태기와 비슷한 것”으로 입구는 좁고, 바닥은 넓게 만든 다. 오쟁이에 병에 걸려 죽은 3세 미만의 어린아이를 넣어 산 위 나무에 매다는 것이 “오쟁이 쌈”이다. 진도 전역에 있던 것36)으로 보이며, 현재도 임회면 상만리

35) 연구자는 칠전리 사람들이 이 말을 사용하는 것을 들어보진 못했다. 다만, 『진도문 화』잡지에서 진도의 아장과 관련된 전통을 소개하면서 사용했던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 였다. 보통은 “다멀” 혹은 “애무덤”이라는 용어로 이를 칭하지만, 이는 무덤의 이름이지 묘역의 명칭이 아니므로 이 글에서는 아장터를 일찍 죽은 아이들의 무덤을 둔 장소로 사용하였다.

에는 “옛날에 죽은 아기를 나무에 매달았던 곳”으로 기억되는 아장목(兒葬木)이 남아있다. 이러한 관습은 현재는 남아 있지 않은데, 일제 강점기 중에 사라진 것 으로 진술된다. “다멀”은 병사(病死)한 어린아이를 항아리에 넣고 산에 묻어 그 위에 돌을 쌓는 매장법을 말한다. 이 역시 현재는 사라진 방식으로 70년대까지는 진도 전역에 나타났던 것으로 보인다. [사례Ⅱ-1]은 칠전리의 옆 마을인 침계리 주민이 애무덤, 즉 다멀을 만드는 방식에 대해 남긴 글이다.

[사례Ⅱ-1] 다멀 만드는 방식

어린이 시체를 옹기동이에 넣고 또 한 개의 옹기로 합해서 땅에 묻었다. (중 략) 그날의 일진을 보아 손이 가지 않 는 곳 즉 음력 1~2일은 동쪽에 손이 가고 3~4일은 남쪽, 5~6일은 서쪽, 7~8일은 북쪽에 손이 가니 이 4곳 중 손이 가지 않는 쪽을 택하여 땅을 옹 기 동이가 보이지 않도록 파서 묻은 다음 30~40개의 호박 크기의 돌을 주 어다가 무덤을 만들었다.

아장 제일 앞쪽에는 논 물을 대는 곳의 돌 즉, 물고돌을 사용하는데 이 유는 멧돼지나 여우의 침입을 막는 이치이다.

매장은 밤에만 만들었는데 호박돌 크기의 돌을 모으는데 달이 없는 어 두운 밤에는 아주 곤란했다. (조영춘 2014: 125)

이러한 두 방식의 아장법 중 현재 칠전리 주민들이 주로 기억하는 것은 다멀이 다. 과거 의료기술이 부족하고 약이 없던 시절, “마을에 홍역이나 천연두가 겨울 에 돌면 한 마을에 40명 이상의 아이들이 죽”는 경우가 많았다. 인구가 1,000명 이 넘는 큰 마을이었던 칠전리는 병이 한번 돌고 나면 죽는 아이들의 수도 많았 다. 이렇게 죽은 아이들을 위해 마을 주변에 다멀을 만들었기에, 당시만 해도 “사 방에 다멀이 꽉꽉 들어”찼다.

이들은 다멀을 만드는 이유로 크게 두 가지를 든다. 하나는 여우가 죽은 아이를 좋아해서 무덤을 파고 시체를 물고 가는데, 아이를 단단한 “독(옹기)”에 넣고 위 에 무거운 돌을 얹으면 여우나 짐승이 이를 파먹지 못한다는 점이다. [사례Ⅱ-2]

36) 이를 다룬 『진도문화』기사에서는 진도읍 동외리, 군내면 덕병리, 고군면 석현리, 지 산면 소포리, 임회면 삼막리 등에서 이러한 내용을 확인했다고 밝힌다.

에서도 “물고돌”을 사용하는 이유로 멧돼지나 여우의 침입을 막기 위함을 들고 있다. 다른 하나는 아이들이 갑자기 병에 걸려 죽는 것은 무서운 역귀가 아이 몸 속으로 들어갔기 때문이므로, 아이를 독에 넣어 묻고 그 위에 돌을 얹어 눌러서, 역귀가 땅에서 나오지 못하게 하여 병이 더 퍼지는 것을 막는 주술적 의미로 행 해진다는 것이다.

이처럼 과거 칠전리 주변에는 다멀이 많았지만, 아무 곳에나 만들 수 있던 것은 아니었다. 우선 다멀을 만들려면 돌이 많이 필요하기에, 호박 크기만 한 돌을 줍 기 쉬운 장소를 골라 다멀을 만들었다. 또한, 다멀을 만들 때는 마을에서 직접 보 이지 않거나, 어느 정도 거리가 먼 곳에 이를 만드는 경향이 있었다. 특히 다멀은 경사지면서 “음칙하고(음산하고) 어덩한(어두운) 곳”에 만들었다. 칠전리 주민 간 어느 정도 차이는 있었으나 다멀을 만들었던 곳은, [그림 Ⅱ-5]의 ○이라 표시한

“도채비골(道疊洞·倒釵洞)”, “갓골(笠洞)”, “천방폭포(天防瀑布)”로 가는 길, “사분 산(巳奔山)” 바깥 부분, “진골(泥洞)” 모퉁이, “상꿀테”가 주로 언급되었다.

칠전리에서 다멀을 만든 장소는 “또깨비(도깨비)” 이야기가 있는 장소와 겹친 다. 칠전 마을에서 이야기되는 도깨비는 허깨비에 가까운 것이었다. 진도에서 도 깨비는 술에 취해 돌아오는 사람에게 씨름을 걸고 다음 날 가면 빗자루가 있는 전형적인 이야기이며, 한밤중에 날아다니는 불꽃인 도깨비불이기도 하며, 사람들 에게 헛것을 보이게 하여 사람을 홀리는 귀신이기도 하다. 칠전리 주변에서 이러 한 도깨비 이야기가 있는 장소는 크게 두 종류로 구분할 수 있다. 한 지역([그림

Ⅱ-5]에서 ◎로 표시된 지역)은 마을로 통하는 주요 도로의 외진 길목이며, 다른 한 지역([그림 Ⅱ-5]에서 ○로 표시된 지역)은 아장터가 위치한 곳과 뒤에 기술할 공동지이다.

[그림Ⅱ-5] 칠전리 주변 아장터와 도깨비 이야기가 많은 장소 (출처: 다음지도)

※ 범례 ◎: 도깨비 이야기 장소 ○: 다멀과 도깨비 이야기가 겹치는 곳

우선 마을로 통하는 주요 도로에서 과거의 억울하게 죽은 망자의 사연과 함께 도깨비 이야기가 나타난다. 진골에서 칠전으로 올라오는 길은 일제강점기 강제위 안부에 끌려가던 사람들이 울며 지나간 길이라 하여 도깨비가 잘 나타났다고 전 해진다. 또한, 마을 북쪽의 “넘엔들 방죽/월치제(越峙堤)” 주변은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이 많았던 곳이고, 신생동 위쪽의 “혼고시다리” 역시 흐르는 냇물이 폭은 좁 으나, 수심이 깊어 한국전쟁 때 많은 사람들이 빠져 죽였던 곳으로 두 곳 모두 도 깨비 이야기가 많았다. 이 밖에도 진도읍에서 남도진(南桃鎭)으로 통하는 길목이 었던 중굴 뒤의 “꿀재(屈峙)” 역시 도깨비가 나와 이를 피하고자 “재를 오르면서 돌이나 솔가지를 꺾어 정상에 두고 넘어가야”만 했던 곳이다. 이런 장소에서 나타 나는 도깨비는 씨름을 거는 사람처럼 특정한 형상을 지닌 것부터, 돌이 무너지는 소리처럼 특수한 경험으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으며, 지나가면 항상 읍내에서 사 오던 고기를 빠트리고 오는 개인의 실수가 반복되는 곳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또

한, 함께 길을 가자고 했던 사람이 물 위를 걸어가는 것 같은 귀신 이야기37)가 도 깨비 이야기로 나타나기도 한다.

다른 한 종류의 장소는 아장터와 직접 연관된다. 이곳의 도깨비 이야기는 앞의 이야기에 비해서는 모호하다. 무엇보다 주민들은 아장터에서 나오는 도깨비에 대 한 이야기하기를 꺼렸으며, 물어봐도 대답 없이 웃으며 회피하는 경우가 많았다.

다만 “도채비골(道疊洞/倒釵洞)38)”은 주민들에게 “또깨비가 잘 난다”고 회자되는 곳으로, “다른 곳의 또깨비보다 크나큰 또깨비”가 난다고 하였다. 마을 주민들은

“도채비골에서 상꿀테로 또깨비뿔이 오락가락”하더라는 이야기처럼 연구자에게는 특정한 사연을 말하기보다는 이곳에서 나타난 도깨비불 이야기를 주로 했다.

도깨비 신앙에 대해 정리한 김종대(2004)는 내륙지역과 해안지역의 도깨비 신 앙에서 나타나는 차이를 구분하였다. 그는 해안지역의 도깨비는 ‘섬김의 대상’으로 여겨졌으며, 내륙지방의 도깨비는 ‘물리침의 대상’으로 여겨졌음(송기태 2011:

169)을 지적했다. 그는 내륙지방의 도깨비가 역신(疫神)이자 화재신(火災神)으로 해석되고 있음을 밝힌다. 농경이 주요 생업인 칠전리의 도깨비는 내륙지방의 도깨 비처럼 물리쳐야 할 대상이었다. 따라서 도깨비에 홀린 경우 무당을 불러 쫓으려 했다거나, 마을의 여성들이 몰려다니며 도깨비굿39)을 했다는 이야기가 칠전리에도 전해지고 있었다. 다만 칠전리에 전해지는 도깨비 이야기에서는 화재신으로서의 면모는 거의 드러나지 않았다. 도깨비굿은 역신을 물리치기 위한 것이며, 일상의 이야기에서 도깨비는 사람을 홀리는 대상으로 귀신과 혼용40)되고 있었다.

37) 이전에 꿀재가 있었던 시기에 한 칠전리 주민이 이 길을 내려오다가 낯선 사람을 만나 같이 내려왔다. 이 길을 내려온 주민이 냇가를 건너기 위해 바지를 걷는데, 함께 온 사 람을 보니 물 위를 걷고 있었다. 도깨비에게 홀렸다고 하여 그 집에서는 당골네(무당)를 불러 굿을 했다. 이 이야기에서 도깨비는 사람을 홀리는 귀신으로 나타난다. 이런 점에 서 도깨비와 귀신의 구분이 상당히 모호했으며, 이곳에서는 양자가 상당히 밀접히 연관 될 가능성을 보여준다.

38) “도채비골”의 어원에 대해서도 주민들은 “또깨비가 많이 나와서” 도깨비골로 부른다고 하여 양자를 연관 짓는 경우도 있었다. 이와 달리 의신면지(2009: 452)에서는 도채비골 의 “도채비”가 “근부(斤夫)”였다고 밝히기도 하여, 도깨비와 무관하게 보는 관점도 있었 다. 이처럼 주민들의 의견이 다르기에 이 글에서 지명과의 관련성은 고려하지 않았다.

39) 칠전리에서 도깨비굿은 “호열자(콜레라)” 같은 돌림병을 예방하는 방법으로 인식되었 다. 도깨비굿은 정월 대보름에 하던 진도 세시풍속의 하나로, 밤에 여자들만 모여 속옷 으로 깃발을 만들어 들고 다녔다. 동네 여자들이 모두 나와, 꽹과리와 장구를 아무렇게 나 “또깨비처럼” 치고 다니며, 집집마다 들려 춤을 추었다고 한다. 도깨비굿을 하며 집 집마다 들리면, 방문 받은 집에서는 이들에게 쌀과 돈을 주었다. 주민마다 언제 사라졌 는지에 대한 증언은 다른데, 대략 1970년대를 전후하여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40) 칠전리에서 사용되는 “또깨비”라는 용어는 상당히 다양한 범주를 포괄하고 있었다. 하 지만 그 양상은 연령대에 따른 차이를 보여준다. 마을의 70대 이상 노년층에게 도깨비 의 범위는 상당히 넓었으며, 사람을 홀리는 존재에 대한 이야기도 “또깨비 이야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