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출한 초중, 고중 졸업생들의 새로운 세대는 1960년대 문예 창작에서 주인공들로 부각되었을 뿐 아니라 신인 작가들을 배출하는 사회적 지반이었다.
7년제의 전반적 의무교육제가 시행된 1958년 말 천리마 운동과 결합된
‘공산주의 교양’의 중요성이 강조되었고 이러한 새로운 교육을 받고 자라난 새 세대는 1960년대 북한 문예 부문의 신인 작가 대열을 구성하는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되였습니다.76
대회의 맥락으로 1956년 2월의 소련공산당 20차 전당대회와 1954년 12월의 2차 소련작가대회를 고려할 때, 한설야가 과거 소비에트 이론의 잘못된 수용을 조선문단의 도식주의를 심화한 하나의 계기로 언급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국제 사회주의 진영 내 변화, 개방적 분위기와 조응하는 것이다.
동시에 이러한 ‘무비판적’ 수용에 대한 비판은 국내정치적으로 1955년 12월
28일 수상 김일성의 ‘주체’ 연설과도 맥이 닿는다.그러나 2차 조선작가대회의
논쟁은 이 시기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조선화’ 담론의 논자들의 주장이 위로부터 전일적으로 정리된 입장 속에서 전개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확인시켜 준다.
이러한 성격은 번역 작가 박영근의 발언에서 대표적으로 확인된다.
박영근은 번역 사업의 기존 결함을 비판하면서 특히 번역시에서 나타나는
“뼉다구 시”와 같은 원작의 형해화와 무미건조한 ‘축자적 직역주의’를
비판하고 전후 조선문단의 도식적 경향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을 적극적으로 제기한다.77 우선 그는 종종 문예계와는 거의 무관한 이들이 주요 문헌 등의 번역 사업에 종사하면서 번역물에서 주요 개념은 물론 작가 이름과 작품까지 용어 통일이 되지 않는 상태를 비판, 문예의 내용과 형식을 아는 번역자들의 작업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더불어 그는 번역 작가들의 독자적 위상을 설정하면서 원작의 정수를 전달하기 위해 원작에 대한 예술적 이해는 갖추어야 함은 물론 그를 다시 하나의 예술로 정립하기 위해 번역 작가 스스로 개성적 스타일을 통해 재표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78 이렇게 될 때만 독자들이 양질의 외국 문학을 번역의 장벽 때문에 외면하는 현상을 극복할 수 있으며 나아가 현 조선문학 창작의 수준을 제고하는 이론 및 창작 실천의 학습과 활용이 일어날 것이라 기대하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그는 소련 및 사회주의권 문화 뿐 아니라 자본주의권의 양질의 현대문학을 번역하는 사업까지 그 필요성을 대담하게 언급한다.
그런데 일부 사람들은 갑작스럽게 외국 문학 출판 계획을 심중히 연구 검토함이 없이 삭제 축감시키는 방향을 취하고 있다. 이것은 또한 세계 평화 옹호 리사회
76 한설야, “보고”, 39.
77 박영근, “번역 문학의 발전을 위한 제 문제”, 『제2차 조선 작가 대회 문헌집』, (평
양: 조선작가동맹출판사, 1956), 165, 162.
78 박영근, “번역 문학의 발전을 위한 제 문제”, 169-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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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에 의하여 기념는 고전적 작가들인 하이네, 몬테슈큐, 도쓰또옙쓰끼, 휘드맨, 세르반테스 등의 작품을 출판하는 사업이 일부 출판 일꾼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는데서도 나타나고 있다. ...
딴 나라 이야기이며 우리 시대와 다르며 현하 우리 혁명의 리익에 도움을 덜 주기 때문이라고 판단하는 사람이 있다. 우리에게 『오네긴』이 무슨 소용인가?
쉑스피어와 레르몬또브가 우리 혁명에 무슨 리익을 주는가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다. 자본주의 국가의 작품이라면 겁을 집어먹으며 서구라파 문학이라면 퇴폐 문학으로 아는 어리석은 사람이 있다. 세계 문학의 고귀한 성과들을 이렇게 원시적인 립장에서 근시안적인 소박한 리기주의의 견지로 본다는 것이 우리의 맑스-레닌주의 미학의 견지와는 아무런 공통성도 없음은 더 말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프로레타리아 문화가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는다는 레닌의 말씀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미국, 불란서, 영국을 포함한 자본주의 국가의 진보적 작가들의 작품에
대해서도 우리는 귀중하게 대하고 출판하여야 하며 연구하여야 한다. 인도, 일본, 비르마, 인도네시아 등 아세아 각국과 아프리카 제국의 진보적 작품들을 번역 출판한다는 것은 평화를 위한 투쟁과 각국의 문화 교류와 아세아 인민들의 친선 단결에 있어서 거대한 의의를 갖는 것이다. 세계 인민들과 우방 인민들과의 친선 관계와 호상 리해는 사람들의 방문과 한 편의 론문으로는 부족하며 전 인민적 지반으로는 되지 못한다.79
박영근의 제안은 대회 이전인 1955년 12월 김일성 ‘주체’ 연설을 상기할 때, 1950년대 중반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조선화’에 관한 담론이 공식적 체계를 확립하지 않은 채 논쟁되는 초기의 상태를 확인할 수 있다.
대회에서 ‘조선화’의 담론은 다양한 쟁점을 포괄하는 활발한 모색의 과정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박영근은 자기 쟁점인 선진 문화의 광범한 수용과 창조적 활용을 논하는 데서 앞서 언급한 쟁점인 고전 유산 및 민족 전통의 계승 문제와 연결시켜 그 정당화를 시도하기도 했다. 과거 민족 전통의 현재적 계승이 대회 전후 중요한 대안으로 제기되면서 이러한 관점과 일맥상통하게 선진 문화의 ‘조선적 맥락’에 부합하는 번역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박영근은 예술 작품의 번역이 원작과 마찬가지로 예술적 특수성을 고수해야 한다고 지적하면서 형식, 기교의 측면을 강조하는데 여기서 “우리말의 순수성”을 내세운다. 독자, 인민에게 감흥을 줄 수 있도록 원작의 예술성을 살리는 번역은 조선 민족, 조선 인민의 말을 제대로 아름답게 구사해 조선 문학에 기여하는 작업이라는 점을 강조한 박영근의 이러한 주장은 첫 번째
79 박영근, “번역 문학의 발전을 위한 제 문제”, 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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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점과도 연결된다. 박영근이 두 쟁점을 연결시켜 주장을 펼치는 데서 보듯, 두 쟁점은 모두 현대 조선문학의 새로운 (민족적) 형식, 예술적 형상성의 제고
– 그것이 도식주의 비판을 통해 나아갈 목표라는 점에서 – 를 위한 대안으로
의미를 가졌다.
1960년대 번역 사업과 그 비판적, 창조적 적용 문제는 『조선문학』
지면에서 작가들의 창작 기교, 스타일의 제고 등을 위한 참고자료로 소련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경전이나 주요 작가들의 창작 관련 언급을 단편적으로 번역, 소개하는 형태로 지속되었다. 『조선문학』에서는 1967년 ‘당의 유일사상체계’가 확립되기 이전까지 소련 및 사회주의권의 주요 창작이 번역 소개되었고 이러한 흐름은 고전 유산에 해당하는 주요 창작의 경우에서도 공통적으로 발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