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는 문화 영역, 문예 담론을 다루는 데 있어 먼저 소련으로부터 들여온 사회주의 리얼리즘 언어 체계의 기본적 성격에 대해서 지적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와다 하루키나 암스트롱의 지적처럼 문화 부문의 건설을 포괄해 북한의 사회주의 건설을 이해해야 한다는 관점이 필요한데, 이러한 문화 부문의 건설이 왜 경제 건설과 밀접하게 맞물린,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총체의 일부로 다뤄져야 하는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소련의 원형을 이해해야 한다. 1930년대 스탈린 시기의 사회주의 건설은 경제-문화를 포괄한 전체론적 관점에서 이해, 추진된 것이었고 그 경제-문화 건설은 반드시 경제 건설에 문화 건설이 종속된 형태는 아니었다. 즉 하나의 총체로서의 사회주의 건설에서 문화 건설의 문제는 경제 건설에 환원되는 것이 아니라 독자적 존재의미, 자율성을 가지고 더 큰 전체를 완성하는 중요한 구성 요인으로 작용했다. 암스트롱이 지적한 “스탈린주의적 형식”은 그 자체가 물질-정신 관계에 대한 독특한 관점을 가지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입각한다는 점에서 경제적 효율, 타산이 아닌 사회주의적 인간의 헌신을 강조하는 성격을 포함하고 있었다.
즉 먼저 주목할 부분은 소련의 사회주의 리얼리즘 자체가 가지는 주의주의적 성격이다. 거트킨(Gutkin 1999)이 지적한 1930년대 사회주의 리얼리즘 정식화 이전의 1910-1920년대 문화 인텔리들의 정치-미학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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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들의 중요성을 참고하면, 사회주의 리얼리즘에까지 그 유산이 나타나는 1920년대 문예 담론 및 실천은 현실 변화에 대한 정신적 작용의 힘에 대한 믿음, 이와 결부된 지식인들의 세계 개조의 역할에 대한 특유의 사명감을 강조한다는 점이 특징적이다(Gutkin 1999). 이러한 1920년대 문예에서 두드러졌던 정신의 조직 혹은 문예 부문의 현실 변혁 및 구성의 역할에 대한 강조는 1930년대 사회주의 리얼리즘 정식화가 ‘지금, 여기’ 건설되고 있는
‘소비에트 현실’을 조명하고 이상적으로 재현하는 방향을 확립하면서
일정하게 약화되었다(Gutkin 1999). 그것은 예술적 창작, 완전히 새로운 미학적 재현을 통해 ‘현실’ 자체를 개조하려던 1920년대 문예 인텔리들의 기획이 혁명 후 소비에트 사회에서는 조정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미 혁명이 승리한 사회에서 문화 영역에서 구 생활을 대체하는 새 생활 건설을 통해 기존의 세계를 완전히 대체한다는 작업은 정치 인텔리의
‘사회주의 건설’의 기획과 충돌하는 측면이 있었고, 1920년대부터 지속된 문예 인텔리들의 활동은 ‘좌경적’인 시도로 좌절되었다. 변화하는 혁명후 현실을 반영하는 ‘사진사적 기록주의’나 과거의 재현 방식들과 차별된 전혀 새로운 형식을 산출하는 미학적 실험들은 혁명후 사회에서 좌경적 현상으로 비판되었고, 그 자리를 차지한 1930년대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창작 방법은
‘사회주의 건설’이 진행되는 변화의 현실을 이상적으로 재현하는 데
집중되었다. 아직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현실을 그 혁명적 발전 속에서’
표상함으로써 곧 실현될 유토피아–현실을 인민에게 제공하는 ‘예술적 생산’의 방법이 사회주의 리얼리즘이었다. 그 결과 1920년대의 실험적 기획들은 무기한 중단되는 대신 ‘지금, 여기’를 채울 유토피아–현실의 예술적 이미지들로서 새로운 소비에트 인간에 대한 예술적 재현들이 나타났다(Dobrenko 2007).
거트킨이 지적한 1920년대 문예 인텔리의 예술적 실험은 그 실험 자체는 방기되었지만 정신 자체를 개조하는 문학예술의 힘에 대한 신념에 근거했다는 측면에서 1930년대 사회주의 리얼리즘에까지 지속된다. 새로운 인간 전형 창조를 통해 사회주의 건설에 복무한다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창작 실천에서 그 기본적 근거인 문예가 가지는 정신 개조의 힘이라는 명제는 1920년대 문예 인텔리들의 영향이 유지되었음을 확인해준다(Gutkin 1999). 거트킨의 논의는 소련 사회와 이후 국제 사회주의 진영이 공유하는 주의주의적 성격의 기원을 확인해주는 동시에 1920년대 문예 인텔리들이 주도한 ‘새로운 생활’(novyi
byt)의 기획에서 정의된 생활, 일상 개념을 통해 사회주의적 문화가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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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된 기존의 맥락을 확인하는 데 도움을 준다. 1910-1920년대 러시아 문예 인텔리들이 구시대의 유물로 간주하고 그 낡은 것을 청산하고 새로운 것으로 대체해야 한다고 믿었던 ‘일상’(byt)은 주로 의식주와 관계된 생활 전반의 경제–문화적 환경을 의미했다(Gutkin 1999). 그 환경은 의복, 식기, 가구, 인테리어, 건축 등을 포괄하는 생활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다양한 구성의 문예 인텔리들은 이 공간을 자신들의 예술적 실험을 통해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일상 소품, 예술-생산품들(artifacts)로 채움으로써 ‘일상의 혁명’을 성취할 수 있다고 보았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일상’, ‘생활’이 가지는 범위로 이 개념이 인민 대중의 경제적 활동과 긴밀히 연결된 문화적 영역으로 인민이 삶을 영위하는 매일의 환경, 공간을 포괄한다는 것이다.
이 광범한 공간, 그 자체로 경제-문화적 성격을 포괄하는 ‘일상’을 조직한다는 사명 때문에 문예 인텔리의 작업은 거트킨이 추적한 바와 같이 소비에트 혁명 기간 권력을 쟁취함으로써 사회 혁명을 추구한 정치 인텔리와 경쟁, 협조할 수 있는 위치에 설 수 있었던 것이다. 거트킨에 따르면, 소비에트 혁명 기간 정치에서의 혁명을 추구한 정치 인텔리들과 병행하여 자신들의 정치-미학적 활동을 통해 일상에서의 혁명을 추구한 문예 인텔리들의 정치- 미학적 실험은 1930년대 들어 정치 인텔리와의 경쟁, 또는 협조 관계를 통해 사회주의 리얼리즘 정식으로 포섭되었다. 이 경쟁, 협조의 과정은 1920년대 말 1930년대 초 ‘계급 투쟁’으로 정의된 일련의 ‘부르주아 인텔리’에 대한 숙청과 고리끼를 대표로 하는 새로운 인텔리들의 진출을 수반했다(Fitzpatrick 1979;
1992). 이러한 교체의 과정에도 불구하고 1920년대 인텔리들의 정치-미학적
담론과 실천의 영향은 소비에트 사회주의 리얼리즘에서 지속되었다.
무엇보다 혁명 기간 소비에트 문화 인텔리들이 논쟁한 ‘일상’ 공간이 가지는 경제-문화적 성격은 이후 유토피아적 이미지들을 통해 혁명후 사회의 구체적 공간을 채우는 문예 행위로 혁명과 건설에 이바지한다고 본 사회주의 리얼리즘 체계에서 문화 부문이 어떻게 설정되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돕는다.
본 연구는 소비에트 사회주의 문화 건설을 북한 맥락에서 구현하고자 했던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조선화’ 과정에서도 소비에트 원형에서 사고된 경제-문화적 일상 공간의 조직이라는 문제의식이 지속되었다는 데 주목한다.
문예를 통한 일상의 조직이라는 관점을 가질 때 비로소 북한 사회주의 체제 형성기 문예, 문화의 건설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분명해진다. 현실 사회주의 진영이 공유하는 인간 정신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기존의 생활, 현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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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시킨다는 이 인식 때문에 사상 사업의 하나의 중요한 ‘무기’를 구성하는 문예 부문의 건설이 중요한 의미를 가졌고 그 문예의 ‘당성’이 문화 부문 건설의 핵심이 되었다.
최근 북한의 체제 형성기 일상의 조직에 초점을 맞춘 역사적 접근을 내놓은 수지 킴(Kim 2013)은 이러한 광범한 일상을 조직하려는 사회주의 진영의 공통된 관심을 지적한 바 있다. 수지 킴은 소련의 ‘새 생활’(novyi byt) 운동, 중국의 ‘신생활’ 운동으로부터 문화대혁명에 이르는 생활 개조 노력과 같은 선상에서 해방후 북한에서 일제의 사상문화적 잔재를 청산하는 뿌리깊은 일상의 개조 노력으로서 ‘생활 혁명’이 전개되었다고 밝힌다(Kim 2013). 수지 킴은 북한의 ‘생활 혁명’이 1920년대 소련의 문화 부문 건설자들이 상상했던 것처럼 문화가 현실의 개조에 미치는 강력한 힘에 대한 신념을 공유하면서 정치적 권력 쟁취만이 아니라 문화 영역에서의 혁명적 변화를 중요시했다고 본다(Kim 2013, 40). 북한의 체제 형성기 사회와 문화 전반을 아우르는 혁명, 일상의 혁명적 조직의 과정을 보임으로써 수지 킴은 이러한 일상의 조직을 통해 북한이 추구한 독특한 근대성을 데이비드 하비가 정의한 ‘영웅적 근대주의’(heroic modernism)의 사례로 해석했다(Kim 2013, 40-41). 자본주의적 근대성에 대항하면서 북한이 체제 형성기 일상의 혁명적 조직을 통해 근대화한 노력은 인민 집단의 영웅적 의지, 헌신에 기반한 근대성이었다는 것이다.
수지 킴의 연구는 일상에 대한 ‘근대적’ 조직의 관점에서 ‘북한의 일상 혁명’의 역사적 과정을 추적함으로써 사회 문화적 사료를 방대하게 활용했을 뿐 아니라 북한의 ‘일상의 혁명’을 비교적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다만 현재로서 수지 킴과 같은 역사적 접근은 1950년대 이후 이러한 사회 문화사적 사료에 대한 접근이 가능하지 않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18 본 연구는 소비에트 문화 건설의 원형에서 보듯 문예 부문이
‘일상의 혁명적 조직’에 직접적인 역할을 가진 것으로 이해되고 그 문예
부문에서의 이상적 재현을 통해 현실을 대체, 개조하려고 했던 현실 사회주의 진영의 공통된 기획을 고려할 때, 수지 킴과 같은 일상사 연구를 현실적으로 수행하기 어려운 1950년대 이후 시기에 대해 문예 부문 담론의 역사적 접근이 유의미한 접근이 될 수 있다고 본다. 특히 1967년 ‘당의 유일사상체계’ 확립
18 수지 킴은 한국전쟁기 미군 노획 문서에 망라된 다양한 북한 주민들의 자술 기록, 당
및 정부, 사회단체의 선전 자료들을 활용했다. 따라서 자료는 그가 ‘북한 일상 혁명’의 시기로 잡고 있는 1945-1950년까지의 시기에 한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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