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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인계층의 형성과 구성

북한에서 시장화를 이끌고 있는 핵심세력은 ‘신흥상인계층’이다.이들은 ‘고난의 행군’

초기 굶주림 속에서 생존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존재를 드러내기 시작했으며

, ‘7‧1

경제 관리개선조치

등 북한 당국의 일련의 시장 허용 정책으로 ‘경제적 시민권’을 얻게 되었

다.이들을 ‘신흥’상인계층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들 또한 사회주의 계획경제에서는 원 칙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인데2)

,

고난의 행군 이후 이루어진 시장화 용인조치와 함께 사회적으로 존재를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1)

초기 상행위와 시장참여자의 증가

‘고난의 행군’

이전까지만 해도 상업 행위는 북한 사람들에게 낮게 평가되고 백안시되는

행위였다.무엇보다도 장사를 한다는 것은 개인적인 이익을 위한 행동을 하는 것이었고, 그것은 ‘공산주의적 인간형’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인식됐기 때문이다.하지만 1990년대 중반부터 불어닥친 혹독한 식량난은 많은 북한 주민들을 시장으로 내몰았다

.

심층면접 대상자들 중 상당수가 고난의 행군을 거치면서 북한 사회에

“여우하고 승냥이만 남았

다”는 말이 널리 퍼졌다고 구술했다

.

여기서 여우는 ‘남의 것을 속여서 빼앗는 사기꾼

’을

가리키고, 승냥이는 ‘깡패처럼 돈을 빼앗는 이’를 지칭한다

.

그만큼 북한 사회 전체가 부 족한 식량을 앞에 두고 큰 혼란에 경험했다는 말이다

.

북한 사회는 이런 과정을 통해 기존의 ‘공동체’를 지향하던 사회 흐름이

‘개인주의 ’를 지향하는 사회 흐름으로 크게 바

뀌게 됐다(사례15).

1990년대 중반부터 ‘고난의 행군’이 시작돼서 말 할 여지가 없이 살다가 2001년 되니 까, 북한에서는 순수한 사람들은 다 죽었다고 말해요.그때 얼마나 많이 굶었겠어요? 당시 생활력이 아주 강한 사람들이 살고 그 다음에 밑돈이 있는 사람들이 살아서 그것을 가지고 장사를 했어요. 그 전에는 장사를 못 하게 했는데 ‘고난의 행군’ 시기에는 마음대 로 장사를 했단 말이지요.그리고 2000년 고난의 행군 끝나고서도 장사를 풀어놨어요. 어놓다보니깐 장사를 해서 모두 떨쳐나섰지요.(사례22)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장사에 나서는 것

”은 일반 북한 주민들에게 결코 녹록치 않

은 일이었다.여전히 “상행위는 나쁜 일”이라는 관념이 북한 주민들의 머릿속에 뿌리 깊 이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

이에 따라 처음에는 주로 노인계층을 중심으로 장사에 뛰어들 었다

.

노인 계층은 장사를 해도 이들에 대한 규제가 약할 뿐만 아니라

,

주변의 비판도

2)북한은 상인에 대해서도 “원시공동체사회 말기에 교환관계가 일정하게 발전한 결과로 발생하였으며 모든 착취사회에 존재한다”고 정의한다.북한은 사회를 사회주의적으로 개조하는 과정에서 상인들의 활동이 착취에 기반한 자본주의적 방향으로 발전하지 못하도록 하는 조치를 취했다고 밝힌다.대표적 인 것이 상인들을 계획체계에 포함돼 있는 ‘생산협동조합’으로 개편한 것이다.사회과학원 경제연구소, 경제사전Ⅱ (평양 : 사회과학출판사, 1970), pp. 186-187.

젊은이들을 대할 때와는 달리 그렇게 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3)

안 나간 사람들도 많아요.왜냐하면 다 직장에서 일 하다가 로임타고 배급타고 하다가, 장사를 하면 얼굴이 아주 뜨거웠단 말이예요.낯가죽이, 비위가 천한 인간으로 본 단 말이 에요. 보통 각오 안 하고는 안돼요.내 새끼를 위해서 나는 각오해야겠다. 낯가죽이 두껍 다는 얘기를 들어도 창피해도 난 해야겠다.이렇게 마음먹고 하지요.창피해 하면 못해요.

다 직장만 나가던 사람들이니까 장사를 하게 되면 천하고 못 할 짓이라고 생각했단 말이 예요.그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하는데, 그래서 할머니들이 먼저 시작했다고요.젊은 사람들 은 낯가죽 두꺼운 사람 아니면 창피해서 안 했지만 늙은 사람들이, 나이 많은 사람들이 먼저 나가서 먼저 했다고요.(사례19)

이에 반해 젊은층에서는 처음에는 장사를 멀리 하려는 경향이 여전히 강했다.위에서 언급한 사례

19도 처음에는 자식들에게 장사를 할 것을 권하지 않았다. “그 때에는 젊은

아이들은 장마당에 얼굴 팔기 싫어했다”며 당시는 “내가 희생해서 조금 벌어오자는 생 각이었다”는 것이다.하지만 사례19는 곧 자신의 자녀들을 시장으로 끌어들였다고 한다.

딸들도 할 줄 모르지만 끌고 다녔어요.힘이 있으니까 짐이라도 지워줘야지요.내가 다 벌어다 먹일 수 없고, 젊은 아이들은 할 줄 모르니까요. 그런데 또 창피해서, 젊었으니까 요, 되게 싫어한단 말이예요. 그러나 그렇게하면 굶어 죽는단 말이예요. 얼굴 창피하다고 안하면 죽는단 말이예요. 그래서 끌고 다녔어요.(사례19)

사례19의 지적대로 “장사에 관여하면 굶어죽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한 사람들이나 주 변의 사례 등을 통해서 이를 확인한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장사를 하겠다고 나서는 사람 들도 많아지게 됐다

.

처음에는 여러 경로를 통해 장사를 먼저 시작한 사람들이 주로 자 신과 혈연관계에 있는 사람들부터 끌어들였으나, 차츰 일반적인 젊은이들도 본격적으로 시장에 뛰어들기 시작했다(사례

19).

시집가기 전 친정어머니가 장사를 해서 살기가 괜찮 았다는 사례

26은 시집간 뒤 “생활하기 바쁘고 굶기도 하는”

상황이 계속 되자, 스물 여 덟에 직장을 그만 두고 장사를 시작했다.청진에서 단고기국집을 운영했던 사례10도 결 혼하기 전 식료품 공장에 다녔었는데, 차츰 장사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게 됐다고 한다.

“공장에서 주는 것을 가지고는 생활을 해나가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

3) 사례8의 어머니는 80년대부터 청진 시내 외화벌이 상점에서 물품을 가져와 시골에서 파는 장사를 시작했다.사례8의 어머니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도 나이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때 당시에 엄마 가 연세가 계셨으니까 농촌에 농장에서 통제할 만한 대상이 아니었어요.그러다보니까 나는 늙었기 때문에 상관이 없다, 내가 너네를 위해서 하는거지 내가 좋다고 하냐라고 말씀하셨어요(사례8).”

2)

시장의 허용과 상인계층의

‘시민권 획득’

이렇게 시장 참여자가 늘게 됨에 따라 북한 당국은 고민에 빠지게 됐다

.

과연 이런 새로운 현상을 허용할 것인가, 억제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심층면접 대상자들은 북한 당국이 초기에는 젊은 사람들이 시장에 참여하는 데 대해 제재도 심하게 했다고 지적한 다.여자들이 시장에서 불법적으로 상행위를 하면 보위대 대원들이 그 여자를 구타하기 도 하고, 물건을 빼앗는 일도 잦았다는 것이다(사례21). 하지만, 극심한 식량난은 결국 북한 당국에게 이런 새로운 현상을 허용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

심층면접 대상자들은 북한이 차츰 시장에 대해 허용하는 정책을 펴 나간 것을 시기적으로는 1997년, 장소적으 로는 양강도 혜산 등 국경도시로 본다.4)

고난의 행군 때 너무 먹고살기 힘드니까, 서로서로 시장에 막 나가다보니까 그때 통제 를 막 하다가, 좀 풀어놨잖아요. 97년, 98년, 이때는 살만한 사람들이 머리를 짜가지고 어 떻게든 살려고 하다보니까, 그래서 좀 풀리고 활성화가 좀 많이 되었다고 봐야죠. 왠만한 거 다 봐주고 하니까. 왠만한 사람들은 다 나와서 하게 하고 정말 장사를 하지 말아야지 하는 품목들만 좀 못하게 하고. 그러고는 서로서로 한 거 같아요. 그러니까 사는 건 좀 더 나아졌다고 봐야죠. 고난의 행군을 넘겨서 그때부터는 좀 활성화가 됐어요.(사례20) 처음엔 이렇게 지방에서부터 시작된 시장 묵인 방침은 점차 평양으로까지 확대됐다.

평양에서도

“2000년도 넘어가면서 평양 사람들이 각 구역마다 장마당을 하나씩 세웠

다.” 왜냐하면 이 시기에는 평양에서도 배급이 안 나왔기 때문이다.5)

평양의 구역마다 장이 다 있는데, 그 것을 국가에서 허가한 장사가 아니고 사람들이 죽지 않으려고 지방에서도 오고 사방으로 와서 새까마니까,안전원들 몇 명이서 그것을 단속 못하 니까,그냥 움직였다가 잡히는 놈들은 잡히고 안전원들 온다 그러면 들고 뛰고 그러면서 쫓 기면서도 해요. (물건을 안전원에게) 떼이면서도 하는 거죠.그 것을 몇 해 그렇게 했어요.

그렇게 통제하다 못하니까 장마당을 이제는 공식적으로 보게 했단 말이예요.(사례19)

4) “우리 국경지역들 같은 경우에, 혜산 같은 경우에는 북한의 장사의 고향이라고도 말하는 곳이죠.모든

새로운 것은 저기서부터 시작되니까요.지금도 역시 같아요.어떤 자연지리적, 지리학적으로 유리한 곳이 있으니까 그런거죠(사례24).” ; “97년도에 조금 경제가 돌아서면서 지방자치단체들이 시장경제 로 다 넘어갔잖아요…정부자체가 백성들이 자꾸 굶어죽어나가니까 97년부터는 점차적인 방법으로 시 장을 확대시켜나가게 된 거에요. 지방에서 먼저(사례9).”

5)사례19의 구술.사례9도 이에 대해 평양은 다른 지역보다 훨씬 늦게 ‘고난의 행군’이 닥쳤다고 증언한 다.물론 평양에 그 이전에 장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가령 평양시내에서 열리는 ‘성신장’ 같은 경우는 김일성 주석이 살아있었을 때부터 이미 존재했다고 한다.평양시 선교구역에 위치한 성신장은 평양시의 주변구역에 위치해 농촌지역이 가까운데다,대동강역까지 옆에 있어 통제하기가 힘든 구역 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