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한반도 평화’가 정부 차원에서 처음 언
급
된 것은 노태우 정부 때이다. 전임
전두환 대통령도 1982년 1월 22일 국정연설을 통
해 “통일은 민족자결의 원칙에 의거
하여 겨레 전체의 의사가 골고루
반영되는 민주적 절차와 평화적 방법으로 성취되어야 한다”며 ‘민족
화합 민주통일 방안
’을 제안한 바 있다.13) 그러나 전 대통령의 제안13) 국가기록원, “민족화합‧민주통일방안,” <https://www.archives.go.kr/next/search /listSubjectDescription.do?id=003340&sitePage=1-2-1> (검색일: 2021.9.25.).
은 ‘평화’ 자체보다는 ‘평화적 통일’에 방점이 찍혀 있어 한반도 평화
논
의의 시작으로 보지 않았다. 게다가 전두환 정부의 8년 임기 중 1984년 말을 제외한 전 기간 동안 남북관계가 냉각되어 의미 있는 대화가 이루
어지지 않았다. 1983년의 아웅산 테
러 사건과 1987년 11월
29일의 대한항공 858편 공중 폭파 사건 등이 발생하며, 남북관계 는 힘 대결 양상을 보였다.노태우 정부가 출범한 1988년은 전 세계적으로 탈냉전 분위기가
확산되 던 시기였다. 이 시기 한국 사회에서도 의미 있는 변화가 나 타났다. 세계적인 변화의 흐름 속에서 노태우 정부는 1991년
12월 13일 제5차 남북 고위급
회담을 개최하고,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이하 남북기본합의서)」를 채택하였
다.14) 남북한이 정전상태를 남북한 간의 ‘공고한 평화 상태’로 전환 하기 위해 공동 노력하기로 합의한 것이다.15)한반도는 1953년 7월 27일 조인된 「국제연합군 총사령관을 일방 으로 하고 조선인민군최고사령관 및 중국인민지원군사령관을 다른 일방으로 하는 한국 군사정전에 관한 협정(이하 정전협정)」에 따라 수
립된 정전체제를 유지 중이다.
16) 정전협정은 과도적 군사협정으 로 당사국 간 무력 행사를 일시적으로 중단시킨
다는 뚜렷한 목적을 가진다. 과거에도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회의가 개최된 바 있다. 정전협정 제4조 제60항
17)에 따라 1954년 4월 26일부터 614) 국가기록원, “남북기본합의서 개요,” <https://theme.archives.go.kr//next/
unikorea/1991/cont1991_1.do> (검색일: 2021.5.10.).
15) 국가기록원,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 <https://
theme.archives.go.kr/viewer/common/archWebViewer.do?archiveEventId=
0052223859&singleData=Y> (검색일: 2021.5.31.).
16) 외교부, “한반도평화체제,” <https://www.mofa.go.kr/www/wpge/m_3982/contents.
do> (검색일: 2021.5.24.).
17)「국제연합군 총사령관을 일방으로 하고 조선인민군최고사령관 및 중국인민지원군사
령관을 다른 일방으로 하는 한국 군사정전에 관한 협정」 제4조 60항 “한국문제의 평
월
15일까지 제네바에서 남북한과 미국, 소련, 중국 등 19개국이 참 가한 고위급 정치회담이 개최된 것이다. 이 회의에서는 ‘외국군 철
수’와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방안’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었다.
한국은 변영태 외무장관을 수석대표로 파견하여 ‘통일에 관한 14개
원칙(안)’을 제안하 였으 나,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한 총선 거 방안, 유 엔
의 권위 인정, 외국군 철수문제 등에 대한 이견으로 성과 없이 종료
되었다.18)이
후
에도 한반도 평화논의는 남북한 간의 입장 차와 북핵 문제 등 으로 인해 진전을 이루지 못하였다. 북한은 평화 담론을 ‘대남 공산
화 전략’이라는 국가 목표의 하위 전술로써 다양하게 활용하였다.반면, 한국은 평화체제를 정치적, 법적, 군사적 신뢰 구축 등 안보적
측
면에 한정하여 활용하는 모습을 보였다.19) 이에 따라 한국의 평화논
의도 북핵‧미사일 문제와 미국과 중국 등 주변국의 전략에 초점 을 맞추는 등 충분한 전략적 고려가 담기지 못하였다. 이 같은 문제 점은 한반도 평화논의 전개 과정에서 고스란히 확인된다.북한은 1993년 NPT(핵비확산조약) 탈퇴를 선언하고, 1994년 정 전협정 무효화와 군사정전위원회 탈퇴를 선언하였다. 또 1994년 6
월
에는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와 사찰 요구에 맞서며 IAEA(국제원자 력기구)를 탈퇴하였다. 이에 대해 미국이 ‘대북 선제공격
’ 카드로 응화적 해결을 위하여 쌍방 군사령관은 쌍방의 관계 각국 정부에 정전협정이 조인되고 효력을 발생한 후 삼개월내에 각기 대표를 파견하여 쌍방의 한급 높은 정치회의를 소 집하고 한국으로부터의 모든 외국군대의 철수 및 한국문제의 평화적 해결문제들을 협 의할 것을 이에 건의한다,” 외교부, “군사정전협정,” <https://overseas.mofa.go.
kr/www/brd/m_3984/down.do?brdid=10909&seq=341009&data_tp=A&file_seq
=1> (검색일: 2021.5.10.).
18) 홍용표, “1954년 제네바회의와 한국전쟁의 정치적 종결 모색,” 뺷한국정치외교사논총뺸, 28집 1호 (2006), pp. 49~50; 임수호, “한반도 평화체제 논의의 역사적 경험과 쟁점,”
뺷한국정치연구뺸, 제18집 제2호 (2009), pp. 54~55.
19) 전재성, “한반도 평화체제: 남북한의 구상과 정책 비교검토,” 뺷한국과 국제정치뺸, 제 22권 1호 (2006), p. 34.
수하며,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은 최고조에 이르렀다.20) 악화일로 (惡化一路)로 치닫던 북‧미관계는 4자회담 개최로 국면전환의 계기 를 맞았다. 한‧미 정상이 1996년 4월 16일 한반도 평화체제 수립을 위한 4자회담 개최에 합의하고, 이
듬해 3월부터 1999년 8월
까지 총6차 례에 걸쳐 한국과 미국, 북한, 중국이 머
리를 맞댔다. 남‧북‧미‧중은 한반도 평화체제의 필요성에는 공감하였지만, 주한미군 철수 및 평화협정체결 주체 문제에 대한 이견을 좁히지 못해 결렬되었다.
한반도 평화
논의는 이후
에도 큰 진전이 없었다. 핵을 포기하지 않 는 북한과 북한의 비핵화를 추진하는 미국이 팽팽히 맞선 탓이다.북한은 계속해서 미국과의 직접 대화를 요구하였고, 미국은 다자회
담
을 통한 해결을 주장하였다. 북한과 미국은 오랜 대치 끝에 ‘다자 회담
속 양자회담’이라는 절충안을 도출하였다. 미국과 북한 그리고 중국은 2003년 4월 베
이징에서 3자회담을 개최하 였으 나,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대화 재개라는 의의만 성과로 남긴 채 종료
되었다.이
후 중국이 적극적인 중재에 나
서 6자회담이 추진되었다. 제1차 회담은 2003년 8월, 제2차 회담
은 2004년 2월 베이징에서 개최되었
다. 2004년 6월 개최된 제3차 회담에서는 북
‧미가 구체적인 협상 안을 제시하고 실질적인 문제를 협의하였다. 2005년
7월 베이징에
서 열린 제4차 회담에서는 6자회담 참가국들이 연쇄적으로 양자회담
을 개최하고, 비핵화의 범위와 평화적 핵 이용 문제 등을 논의하였
다. 제4차 회담 2단계 회의에서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6자회담의 최초 합의서인 ‘9.19 공동성명’이 채택되었
다. ‘9.19 공동성명’에는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체제 관련 협상을 위한 별도 포럼 개최에 관한 내용이 담겼다.21) 제5차 회담에서 ‘9.19 공동성명’의 초기 단계 이행20) 국가기록원, “4자회담 출범,” <https://www.archives.go.kr/next/search/listSubject Description.do?id=010544&subjectTypeId=05&pageFlag=C&sitePage=1-2-2>
21)‘9.19 공동성명’ 제4조.
조치 협의가 진행되
었으 나 별다 른 소득
없이 종료되 었
다. 그 과정에 서 북한이 대포
동 미사일 및 장거리 미사일 발사, 핵 실 험 등을 감행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국제사회는 6자회담의 모멘텀(momentum)을 이어나가고자 노력하였다. 그 결과, 2007년 2월 13일 「9.19 공동성명
이행을 위한 초기 조치(이하 2.13 합의)」가 체결되었다. 「2.13 합
의」에도 한반도의 비핵‧평화 실현을 위한 공동 노력에 관한 내용이
담겼다.
22)2007년 10월 개최된 남북정상회담에서는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 번영을 위한 선언(이하 10.4 선언)’이 채택되
었다. ‘10.4 선언’은 “남
북한은 정전체제 종식과 항구적인 평화체제 구축 필요성에 인식을같
이하고, 직접 관련된 3자 또는 4자가 함께 종전선언을 위해 협력 할 것”을 명시하였다.23) 하지만 핵심 당사국의 합의에 기반한 종전 선언 논의는 6자회담과 함께 중단되었다.오
랜 냉각기 끝에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면서 한반도 평화논의가 재개되었다. 2018년
개최된 세 차례의 남북정상회담과 2018년과 2019년 개최된 두 차례의 북미정상회담, 2019년 6월의 남‧북‧미 판 문점 회동이 연이어 개최되면서 한반도 평화논의가 비교적 활발히 진행되었다. 2018년 4월, 제1차 남북정상회담에서 채택된 ‘한반도
의 평화와 번영, 통일을 위한 판문점선언(이하 판문점선언)’ 제3조 3항에는 “정전협정의 평화협정으로의 전환과 평화체제 구축 논의”와 같은 내용이 명시되었다.24) 또 북미정상회담 공동성
명에도 “한
반도의 항구적이고 공고한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공동 노력”에 합의 하는 내용이 담겼다.25)22) ‘2.13 합의’ 제6조.
23) ‘10.4 선언’ 제4조.
24)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통일을 위한 판문점선언’ 제3조 제3항.
25) ‘The United States and the DPRK will join their efforts to build a lasting and
그러나 코로나19 팬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