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litico-Ideological Characteristics of South Korean Anti-Americanism
Ⅱ. 개성신문의 연혁과 특징 1
북한은 중앙에서 발행하는 조선로동당의 당보인 ≪로동신문≫과 함께 지방로 동신문을 각 도당에서 직접 발행하고 있다. 지방로동신문은
1945년 해방되면서
각 지방에서 자체적으로 발행했던 신문이 1946년 8월 중앙당의 로동신문이 발행 된 직후 ‘도 로동신문’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시작되었다. 평안북도에서 발행되던≪바른말≫은 ≪평북일보≫가, 함경남도에서 발행되던 ≪정의≫는 ≪함남일보≫ 가 되었다. 또한 평안남도에서 발행되던 ≪봉화≫는 ≪정로≫가 발행될 때 통합 된 이후 1950년 ≪평남일보≫로 재간행 되었다.2 이후 1949년과 1955년 ≪자강일 보≫와 ≪량강일보≫가 간행되고 한국전쟁 중 북한이 점령한 개성에서 ≪개성신
1현재 확보하고 있는 개성신문은 1953년 9〜12월의 다수 날짜와 1956년 1〜12월, 1958년 1월,
4〜8월, 1959년 1〜6월치이다. 비록 많은 일자의 신문을 확보하지는 못했지만 이를 통해 당시
신해방지구 정책이 개성지역에 구현되는 과정에 주민들의 반응을 대략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2이외에도 함경북도의 ≪횃불≫은 ≪함북일보≫로, 강원도 원산의 ≪선봉≫은 ≪강원일보≫로 변경되었다. 김영주 외, 북한언론의 이론과 실천 (서울: 나남, 1991), p. 163.
문≫이 발행되면서 총 10개의 지방 로동신문이 발행되고 있다. 이들 도급 로동신 문은 일간지로 시대와 상황에 따라 2면〜4면으로 편집되며 하루에 약 4〜5만부 정도가 발행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지방로동신문은 ‘자기대로 고유한 얼굴을 가지고 자기의 사명과 독자대상의 특 성에 맞게 편집’3된다면서 지방신문의 독자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지방신문 역시 당의 정책을 지방에 현실화하기 위한 선전과 교양의 역할을 수행할 뿐, 지방의 이 익이나 지방의 담론을 형성하는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다. 지방만의 여론을 형성하 거나 지방의 이해를 공론화 하는 것은 ‘지방주의’나 ‘지방이기주의’라는 비난을 감 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문의 주요 내용과 논조는 중앙 ≪로동신문≫과 궤를 같이한다. 이처럼 북한에서 지방 로동신문이 중앙 로동신문과 비슷함에도 불 구하고 지금까지 계속 발행되고 있는 이유는 지방마다 처한 상황이 다르기 때문 이라고 주장한다. 즉 지방마다 자연환경과 경제적 환경, 생산적 조건, 주민들의 구 성들이 다르기 때문에 이것들을 반영한 지방만의 신문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지방신문의 역할은 정치문제, 당생활문제와 경제, 문화건설문제들을 자기 지방 의 구체적 실정에 맞게 취급하며, 문화정서 교양면에서도 해당 지방의 당원들 과 근로자들의 문화기술수준과 문화정서를 높이는 방향으로 지향하게 된다.4
지방 로동신문이 중앙 ≪로동신문≫과 차별을 두는 것은 주로 기사의 형식이 다. 대부분의 독자들이 농민과 노동자, 즉 노동대중이기 때문에 기사는 가능한 알 기 쉽게 작성한다. 중앙의 로동신문 보다 일상적인 노동현장에 대한 기사가 많고 주민들의 편지나 인터뷰, 수필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따라서 신문사에 일반 주 민들이 자기가 속한 조직과 노동현장의 소식이나 경험, 모범을 소개하거나 비판하 는 기사를 보내는 ‘로농통신원’5의 역할도 중앙의 로동신문에 비해 더 중요하게 취급된다. 특히 주민들의 의식제고를 위해 로농통신원의 폭로성 비판기사가 강조
3김영주·이범수, 현대 북한언론의 이해 (서울: 한울출판사, 1999), p. 105.
4위의 책, p. 105.
5로농통신원은 신문과의 련계 밑에 신문보도사업에 참가하는 조직된 대중적 력량이다. 로농통신 원들은 자기의 혁명초소에서 기본혁명과업을 모범적으로 수행하는 동시에 신문사와 긴밀한 련계 를 맺고 자기단위의 새로운 성과와 경험, 모범을 소개하는 기사와 자료를 써보내며 신문에 대한 의견과 요구를 통보하고 신문자료에 의한 실효투쟁을 벌리는 등 광범한 사회정치활동을 하는 사 회의 선진분자이며 군중의 교양자이며 신문의 믿음직한 방조자이다. 로농통신원들은 또한 기자 후비로 교양육성되며 따라서 기자대렬의 저수지이기도 하다. ‘로동 통신원들은 어떻게 활동할 것 인가,’ 로동신문, 1954년 9월 16일.
된다.
그것은 농민들 속에서 여러가지 형태로 표현되는 자본주의적 사상 의식을 뿌 리 채 뽑자는 데 있는 것이다. 례하면 농업협동조합에서 로동규률의 위반, 공 동농기구의 파손, 공동 가축을 되는 데로 관리하는 태도, 특히 일부 농민들이 남몰래 머슴을 두며 축력에 대한 부당한 댓가를 받는 등 방법으로 남의 로력 을 착취하는 현상, 그 외에도 나라에서 덕만 바라는 비근로적 현상, 량곡을 랑 비하는 현상들을 철저히 폭로함으로써 전체 근로 농민들로 하여금 이러한 행 위를 증오 배척하게 하며 그와 투쟁할 수 있도록 농촌통신원들이 조직선전자 적 역할을 수행하여야 하기 때문인 것이다.6
≪개성신문≫은 정부정책을 홍보하고 주민들에게 사회주의적 이념과 생활방 식을 주입시키기 위해 북한이 개성을 점령한 직후인 1952년 2월 19일부터 발행되 었다. 개성신문은 장마당에서 장사하는 사람들까지 구독할 만큼 인기가 좋았다고 한다.7 전쟁 중 새로운 소식을 접하고 갑작스럽게 북한에 편입된 이후 불안한 마 음을 달래기 위해 개성신문을 많이 구독했던 것이다.
1953년의 개성신문은 일반적인 정부정책의 홍보와 선전 이외에도 주민생활과
밀접한 기사에 대한 비중이 높았다. 신해방지구인 개성지역이 어떻게 복구가 되고 있는지, 주민들의 반응은 어떠한지에 대한 기사가 구체적으로 실려 있다. 또한 전 문기자들의 기사는 물론이고 일반주민들의 투고형식 기사들과 시, 소설, 수필, 수 기, 편지 등 다양한 형태의 기사들이 많다.개성신문은 1957년경까지 개성지역의 역사와 문화유적 등을 꾸준히 소개했다.
매주 일요일 ≪향토연구≫라는 코너를 통해
‘개성의 지명과 행정구역의 력사적
변천’, ‘개성의 향토지리’, ‘개성 지방의 전설’, ‘개성 지방의 민화’ 등 개성에 대한 다양한 내용을 소개하기도 했다.8이렇게 개성신문이 한국전쟁 중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빨리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일제시기부터 ≪고려시보≫라는 지역신문을 통해 지역의 여론을 형 성하고 사회문화적 발전을 도모했던 역사적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려시 보≫는 1933년 4월 15일에 개성지역신문으로 창간되었다. 삼포경영으로 부를 이 루었던 집안에서 태어난 신진청년들이 개성에서 보통학교와 송도고보 등을 졸업 하고 20대에 유학을 마친 이후 개성 주민들을 지도하고 개성지방의 위상을 높이
6‘로농 통신원들에게-농촌기사에서 비판성을 높이자,’ 개성신문, 1956년 1월 7일.
7송경록, 북한 향토사학자가 쓴 개성이야기 (서울: 푸른숲, 2000), p. 125.
8개성신문, 1957년도 각호.
기 위해 ≪고려시보≫를 창간한 것이다. 창간된 이후 1941년 폐간될 때까지 ≪고 려시보≫는 개성지방의 사회문화운동을 이끌었으며 개성주민들은 지방 정체성을 확인하고 문화적 자존심을 유지할 수 있었다.9 개성신문은 ≪고려시보≫의 이같 은 경험을 통해 개성주민에 대한 이해가 가능한 신문이 될 수 있었다.
개성신문은 창간된 이후 1957년까지는 4면이 발행되었으나 1958년을 전후로 2 면으로 축소되었다
.
기사내용 또한 개성지역의 현장 기사보다 중앙의 기사를 받아 쓰거나 중앙정권차원에서 실시하고 있는 각종 정치적 선전이나 경제발전정책이 개성지역에서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에 대한 내용이 많아졌다. 더 이상 개성의 역사와 문화를 소개하는 기사도 나타나지 않았다. 1957년까지 종종 실렸던 한시 대회나 편지들도 사라졌다. 그러한 기사들이 빠진 대신 남한을 비판하거나 다른 나라들의 기사들로 채워졌다.1959년에 지면이 다시 4면으로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신문내용상의 변화는
나타나지 않았다. 각 면의 편집도 중앙의 로동신문과 다를 바 없이 배치되었다.
1면은 김일성의 현지지도를 비롯한 활동이나 교시와 사설이 절반을 차지했다. 2면
에는 개성지역의 현지에서 진행되고 있는 각종 경제관련 기사들이 배치되었다.3면의 절반은 2면과 마찬가지로 개성지역의 상황이,
그리고 나머지는 남한관련 비판 기사가 실렸으며, 4면은 거의 국제면으로 채워졌다.
특히 1차 5개년 계획이 시작된 1957년이 지나면서는 생산과 경제건설을 독려하 는 기사와 정부의 정책시행을 독려하는 기사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이렇게
1958년 이후의 개성신문은 지역신문의 특성이 점점 사라지고 중앙 로동신문과 별
다른 차이점 없는,
개성이 아닌 다른 지역에서도 발행할 수 있을 정도로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이는 북한 정권이 사회주의 협동화와 장기적인 경제발 전계획을 효율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각 지방의 특성을 무시하고 여론을 통제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라 추측된다. 또한 1956년 8월 종파사건 이후 지방세력에 대한 억압이 진행되면서 지방신문의 주필과 기자들도 이같은 분위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도 이유라 할 수 있다.9양정필, “1930년대 개성지역 신진엘리트 연구,” 역사와 현실 63호 (2007), pp. 204-216.
Ⅲ. 1956년 개성인민위원회 선거 분석
1.
선거준비과정 및 후보자 추천한국전쟁 이후 북한은 전후 복구과정을 진행하면서 전시체제를 평시체제로 복구하는 작업을 동시에 진행했다. 1954년 12월 11일에는
‘군사위원회’와 ‘지방
군정부’의 효력을 중지하고 주권기관과 행정기관, 재판 및 검찰기관을 정상화했 다. 이어 동년 3월 11일에는 내각구성법을, 동년 10월 30일에는 지방주권기관구 성법을 제정하여 중앙행정기관체계와 지방주권기관을 정비했다. 이때 지방주권기관은
‘지방인민회의’를,
지방인민회의의 집행기관이면서 지방행정기관으로는‘지방인민위원회’를 설치하도록 했다.
10 지방주권기관구성법이 제정된 이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1956년 9월 4일 ‘도·시·군(구역)·리(읍, 로동자구)인민 회의 선거 실시에 관한 정령’을 발표하고, 리(읍, 로동자구) 인민회의 대의원은 동년 11월 20일, 도·시·군(구역)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는 동년 11월 27일에 실시 하기로 했다.
1956년 지방인민위원회 선거가 진행되기 이전 개성지역은 시,
군, 리(읍)인민위
원회 조직위원회가 인민위원회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었다. 개성시 인민위원회 조 직위원회는 1951년 9월 5일부터 ‘개성시 림시인민위원회’로 시작되어 매월
1〜2
회씩 회의를 조직·운영하면서 중앙의 정책을 집행했다.
또한 지방경제를 복구하고 인민들의 요구를 받아 해결하고 결산보고를 진행하는 등 실질적인 지방인민위원 회 역할을 대신하고 있었다.111956년 9월 18일 ‘선거위원회’가 구성되면서 본격적인 선거준비가 시작되었
다. 먼저 선거위원회는 각급 주권기관 대의원 선거사업을 지도하고 선거구와 선 거자 명부를 작성했다. 규정에 의해 조직된 개성시 선거위원회는 다음과 같다.
10“지방주권기관구성법(1954.10.30 최고인민회의 법령 제72호),” 북한법령집 1(서울: 국토통일 원, 1971), pp. 255-263.
11‘지구내 인민들이여, 시인민위원회는 당신들의 위하여 이렇게 일하였다(개성시 인민위원회가 지
난 6년 동안 걸어온 영광스러운 길),’ 개성신문, 1956년 10월 2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