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식면에서 서로 많은 유사성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안에는 분명 수많 은 작은 차이점들도 존재하고 있다.
먼저, 넉넉한 가정에서 자란 김영랑과 쉬즈모는 모두 어릴 때부터 푸른 산과 푸른 물결 속에서 살아 왔다. 그래서 그들은 자연의 아들이라고 불렸다.
영랑은 “5세 되던 때부터 북산골에 있는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였다. 북산골은 소 나무와 대나무 숲이 우거져 한낮에도 호랑이가 나온다 할 만큼 깊은 산골이었다. 그래 서 서당에 가려면 부모가 직접 데려다 주거나 머슴의 등에 업혀가기가 일쑤였다. 서당 가는 길은 윤식의 집 앞을 지나게 되어 있어서 심하게 비가 내리거나 눈이 많이 오는 날에는 서당 가던 아이들이 그냥 윤식이 집에서 쉬었다가곤 했다. 그때 윤식의 놀이터 는 주로 뒷산 병풍바위나 비둘기 바위, 감나무 밭, 동백 숲, 집안의 은행나무 밑이었 다.”269)
쉬즈모는 부잣집 자제로서 어려서부터 총애를 받으며 풍족한 생활을 보냈다. 쉬즈모 의 생가는 중국 남부 지방 문화의 전통을 담은 고택이며, 앞뒤 입구와 출구가 모두 4 개로 되어 있고, 상하 두 층이다. 이곳은 또한 쉬즈모의 서당으로, 여기서 사서오경과 서예를 배우며 즐거운 어린 시절과 소년 시절을 보냈다. 쉬즈모의 눈으로 본 고향은 마치 선경과도 같아 그의 마음속을 떠나지 않았다. 1926년 발표된 유명한 산문 「날 고 싶다」는 어린 시절의 고향 산의 경치가 그의 기억 속에서 발효된 걸작이다.
그는 「날고 싶다」를 통해 “우리 마을에는 동관산 외에 황니산이 하나 있고, 산꼭 대기에는 7층 탑이 있는데 탑 꼭대기가 천정을 받치고 있다. 이 외에도 탑 안은 종소 리가 울리고 해가 서쪽으로 질 때 붉은 꽃들이 서산의 귀밑머리에 닿아 탑산의 구름을 비추며, 종소리는 울려 탑 꼭대기를 감돈다”270)라고 고향을 묘사했다.
김영랑과 쉬즈모는 비슷한 생활을 배경으로 자연 사상을 시에 담았다. 주로 경치를 빌어 감정을 표출하였는데, 사회의 어두움, 가난한 생활, 민족의 비참함을 모두 자연을 통해 시에 담았다. 이는 독자의 감각을 자극하여 독자의 사상과 연상을 인도하는데, 여기에 인생에 대한 작가의 반성과 사색을 반영하였다. 그러나 그들 시에는 서로 다른 점도 존재한다. 김영랑은 자연을 빌려 ‘나의 마음, 마음속의 세계’ 등 개인을 드러낸 반면, 쉬즈모는 자연을 빌려 ‘사랑, 자유, 아름다움’에 대한 이상과 그에 대한 추구를
269)조수웅, 「김영랑의 생애」, 『문학춘추』, 40, 2002, 95쪽.
270)我們鎮上東關廂外有一座黃泥山, 山頂上有一座七層的塔, 塔尖頂著天。塔院裏常常打鍾, 鍾聲響動 時, 那在太陽西曬的時候多, 一枝豔豔的大紅花貼在西山的鬓邊回照著塔山上的雲彩, —鍾聲響動時, 繞著 塔頂尖, 摩著塔頂天, 穿著塔頂雲. (徐志摩, 「想飛」)
표현했다.
또, 영랑과 쉬즈모는 시 속에서 비슷한 이미지를 사용하였다. ‘이미지’는 현실적인 삶의 모습이자 심미 창조의 결정체이다. 시인은 하나 혹은 수많은 ‘이미지’를 창조하여 자신의 감정을 토로하는데, 김영랑과 쉬즈모는 서로 비슷한 시각과 청각 이미지를 선 택하여 사용했다. 예를 들면, ‘천체 이미지’, ‘물 이미지’, ‘새 이미지’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미지가 전하는 실질적인 감정의 내용은 서로 다르다. 김영랑은 이 미지에 대해 중점적으로 생각하고 여기서 위로를 찾으며, 이를 통해 자신의 감정을 드 러낸다. 예를 들면 ‘천체 이미지’ 중 ‘하늘’을 빌려 자신과 자신의 동경을 표현하는 것 이 그렇다.
쉬즈모는 자신을 이미지에 투영시켜 타인을 밝히며 벅찬 감동으로 가득 찬다. 그가 시에서 자주 사용하는 이미지는 ‘천체 이미지’ 중 ‘구름’이다. 쉬즈모 자신은 끊임없이 상승하는 구름으로서 자유로우며 꿈과 환상에 가득 차 있다. 그는 하늘과 같은 사랑으 로 타인에게 도움을 준다.
마지막으로 두 시인 시의 형식미를 살펴보았다. 문학 작품에서 청각의 기능은 주로 형식의 변화를 반영한다. 시의 형식미는 주로 다른 음성과의 조화로운 배합 및 음의 아름다운 리듬을 형성하는 것이다. 이는 독자들에게 청각적인 즐거움을 준다. 김영랑 과 쉬즈모는 어릴 때부터 동양 고전 문화의 영향을 받았고, 자연스럽게 동방 고전 시
‘음률미’의 전통을 전수 받았다. 그들은 시를 쓸 때 청각의 음률 조화에 힘쓰고 음악적 아름다움을 중시하였다. 또, 음률의 반복을 이용하여 전체적인 시의 조화를 완성했다.
김영랑과 쉬즈모는 시의 리듬미를 통해 시를 형상화한다. 그들이 이러한 방식을 통 해 궁극적으로 표현하고자 한 것은 순수한 자아의 모습이다. 그들은 또한 작품 중에 사투리를 사용하는데, 김영랑은 한국 전라도의 방언을, 쉬즈모는 중국 북방의 방언을 각각 시에 넣었다.
김영랑을 말하면서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전라도 사투리이다. 『시문학』창간 호에 실린 「언덕에 바로 누워」에 나타난 ‘잊었읍네’나 ‘없드라냐’의 전라도 방언은 유연한 느낌으로서 그의 시의 본령을 이룬다. 「‘오 - 매 단풍 들것네’」에서 순수한 전라도 방언인 ‘오 - 매 단풍 들것네’는 가을을 연상시키면서 훨씬 강한 인상으로 독 자의 심장을 때린다.
아울러 남도지방의 사투리에서 가장 큰 특색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나긋나긋하면서 감칠맛이 있는 말투다. 이것을 결정하는 데 있어 가장 큰 힘이 되는 것은 어미이다.
영랑은 이런 남도지방의 어미를 작품 속에 잘 살림으로써 시를 유연하게 만들면서 여
운을 남기는데 성공하였다. 또, 사투리의 시어화로 정감 있는 남도의 분위기를 형상화 하여 낭만적이고 토속적인 심상을 이루었다.271)
쉬즈모는 어린 시절과 소년 시절을 모두 고향에서 보내고 유학한 뒤, 귀국 후 북경 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이 때문에 그의 많은 시에는 고향인 협석 사투리와 북경 사 투리가 들어가 있다. 그는 고향의 동산을 배경으로 「동산소곡」, 「유지 몇 장 덮 기」, 「금색 빛자국 하나」등 세 편의 시를 썼는데, 「동산소곡」과 「금색 빛자국 하나」는 기본적으로 고향 사투리를 사용하며, 이는 발랄하고 진실하며 깊이 있게 들 린다.
하지만, 두 시인의 시는 시행의 배열에서 서로 다른 특징을 보인다. 김영랑 시는 주 로 4행시와 3/4 음보를 위주로 하면서 세련되고 의미가 풍부하다. 반면 쉬즈모의 시는 중국 전통 정형시를 토대로 미국과 유럽의 시풍을 흡수하였으며 음의 변화가 풍부한 특징을 갖는다. 그는 산문시, 십사행시, 무운체 등을 사용함으로써 한 가지 방식과 규 칙에만 구애받지 않는다. 또한 창법이 정교하고, 다양하며 격식 음률이 아주 정미하다.
이렇게 두 시인의 시에 있어서의 형상화 방식이 차이를 보이는 원인은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두 시인이 처한 시대의 문학 환경의 차이 때문이다.
김영랑이 살았던 때는 20년대 중반부터 나타난 프로 문학272)이 퇴색하고 순수 문학 을 지향하면서 한국 시의 예술적 가치를 높이는 시기였다. 또, 1920년대는 사회주의문 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면서 예술운동이 정치적 방향을 선택한 시기다. 이는 문학의 예술성에 가장 큰 장애가 되었다.
한국 현대시 문학사에서 “30년대의 <시문학파>는 순수시라는 새로운 경지를 연 유 파로서, 이후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모더니즘 시의 길을 연 것으로 평가된다. 즉, 본격 적인 현대시로 이행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시문학파>의 지속성은 20년대 및 전통적 시문학과의 지속성이다. 반면, 변성은 30년대 모더니즘 시들과의 연계로 이어짐을 의 미한다. 곧, <시문학파>의 변혁성이 모더니즘 시에 와서는 <시문학파>와의 지속성으 로 이어짐을 뜻하는 것이다. <시문학파>의 순수시는 20년대의 목적론적 문학론에 대 한 상대적 의의로써 출발했으며 추상적이지도, 모호하지도 않다. 세상에 대한 판단중
271)강혜영, 「시어연구서설(詩語硏究序說) -김영랑을 중심으로-」, 『한성어문학』, 6, 1987, 64~65쪽.
272)프롤레타리아 문학의 준말.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적 의식을 바탕으로 하여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처지에서 그의 감정․ 이데올로기 및 생활을 내용으로 하는 문학. 사회주의 문학. 프롤레타리아란 자본 주의 사회에서, 생산 수단을 가지지 못하고 자신의 노동력을 자본가에게 팔아서 생활하는 노동자. 임금 노동자. 무산자.
지로서의 순수이고, 자율적 미의 추구로서의 순수이며, 세상과 차단된 절대적 자아의 세계로서의 순수이다.”273) 순수시는 특히, 자연 이미지를 통한 순수 자아의 이상화 지 향이라는 특징을 가진다.
시문학파의 중심 시인인 김영랑의 시는 내용면에서, 분리의 자아가 여러 자연 이미 지를 통해 자신 곧, ‘내 마음’의 세계를 표현한 것을 주제로 삼았다고 볼 수 있다. 예 를 들면, 앞의 제 Ⅲ장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김영랑의 시는 하늘을 중심매개로 하고 있다. 「동백닢에 빛나는 마음」,「언덕에 바로 누워」,「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 라」, 「내 마음 고요히 고흔 봄 길 우에」등의 시에서 시적 화자는 하늘을 동경하고 그것과 하나 되면서 마음의 슬픔을 초월하는 동시에 자신을 갱신한다.
또한 자연의 ‘물’ 이미지인 강물, 눈물, 이슬, 바닷물 등을 통해 ‘내 마음’의 내면세 계를 표현하고 자아의 존재성을 찾으며, 정체성을 회복한다. 따라서 그의 시에 나타나 는 시적 주체는 대부분 자연과의 합일을 통해 초월적으로 현실에 대응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는 현실과 시적 언어의 질서가 상충하는 것을 반증하는 동시에, 언어가 현실을 뛰어넘어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상상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274)
“김영랑 시는 형식적인 면에서 볼 때, 4행 시형에 대한 추구와 집착이 강했다고 볼 수 있다.”275) 김영랑은 4행시 사용에 힘썼는데, 4행시의 형태적 기원은 한국의 고전 시가에서 찾을 수 있다.
김영랑은 시문학파의 자아 세계를 잘 드러내기 위해 시 형식을 자연스럽고 자유롭게 하였다. 시문학파는 서정시를 추구하지만 시형 측면에서는 구체적인 요구를 하지 않는 다. 시인들은 자신의 순수 서정 세계를 표현하기 위해 시형을 자유롭게 사용한다. “내 自由詩의 한 理想으로 한 詩는 한 詩形을 가질 뿐이라는 嚴然한 詩約을 세우고”276)라 는 말은 그가 자유시의 영역 안에서 개성적이고 아름다운 순수시형을 창조하기 위하여 나름대로 彫琢하고 모색하였음을 의미한다.277) 이처럼 김영랑 시는 4행시의 형태에 의 지한 운율을 기본구조로 특유의 언어 요소들을 적절히 채택하며 리듬 효과를 만들어낸 다.
쉬즈모의 경우, 원이둬와 쉬즈모를 대표로 한 신월시파278)는 “중국의 새로운 사상 273)진순애, 「<시문학파>연구 – 순수성을 중심으로」, 『한국시학연구』, 8, 2003, 307~313쪽.
274)신진숙, 「시문학파 시의 근대성과 공간 인식 고찰 - 김영랑과 박용철의 시를 중심으로 」, 『우리문 학연구』, 27, 2009, 185쪽.
275)정한모, 「김영랑론」, 『현대시론』, 민중서관, 1973, 175쪽.
276)김영랑, 「박용철과 나」, 『자유문학』, 1958.6, 138쪽. (조창환, 「김영랑 초기시의 율격과 형태 - 『영 랑시집』을 중심으로」, 『한국시학연구』, 10, 2004, 317쪽, 재인용.)
277)조창환, 위의 논문, 31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