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천체 이미지
2.1 김영랑 : 이상의 동경, 슬픔과 그리움, 희망
김영랑의 시에서 ‘하늘’은 가장 많이 나타나는 시어로서 총 28회 출현한다.173) 영랑 은 현실에서 오는 괴로움과 갈등을 의식적으로 차단하고 하늘을 통해서 자신의 마음을 투명하게 정화하고자 하였다. 영랑의 시에서 하늘은 단순한 자연의 하늘이 아니라 꿈 과 이상이 있는 동경의 세계로 그려지고 있다.174) 이는 ‘하늘’을 지향함으로써 처한 현 실을 극복하려는 의지의 표출이라고 볼 수 있다.175) 김재홍은 이를 절망을 안겨 주는 대지에서 인간이 바라는 열린 세계로서의 하늘에 대한 동경이라고 말한다.176)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길 위에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173)허윤희, 『한국의 현대시와 시론』, 소명출판, 2008, 67쪽.
174)김숙, 앞의 논문, 109쪽.
175)문정현, 앞의 논문, 37쪽.
176)김재홍, 『한국 현대시의 사적 탐구』, 일지사, 1998, 146쪽.
…(중략)…
보드레한 에메랄드 얇게 흐르는 실비단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부분
김영랑의 시는 우주적 모티프인 하늘을 중심 매개로 하고 있다. 하늘은 마음의 거울 로서 하늘과의 동일시를 욕망하는 우주적 나르시시즘의 순수이미지를 상징한다. 순수 에 대한 동경을 하늘을 거울삼아 추구하고자 한 것이다.177) 이 시에서도 하늘에 대한 동경과 기대감이 충만하다. 자신과 하늘을 동일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러르고 싶다’,
‘바라보고 싶다’ 등의 시어를 통해서 하늘과 동일시되고자 하는 욕망을 드러낸다. 열린 하늘에서야말로 온갖 정신의 질곡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178) 하늘을 우러르고 바라보 는 것은 ‘눈’이 아니라, 그것을 우러르고 바라보고 싶은 ‘마음’이다. 외계의 사물을 감 각적으로 투시하려 하지 않고 그 근원인 ‘마음’으로 끌어들이고 있다.179)
언덕에 바로 누워
아슬한 푸른 하늘 뜻 없이 바래다가 나는 잊었읍네 눈물 도는 노래를 그 하늘 아슬하여 너무도 아슬하여
이 몸이 서러운 줄 언덕이야 아시련만 마음의 가는 웃음 한때라도 없더라냐 아슬한 하늘 아래 귀여운 맘 즐기운 맘 내 눈은 감기었데 김기었데
-「언덕에 바로 누워」전문
화자는 언덕에 똑바로 누워 아득한 푸른 하늘을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본다. 그러자 자신의 마음속에 남아 있던 눈물 도는 노래가 잊혀지는듯하다. 푸른 하늘이 너무나도 아스라하기에 슬픔의 기억도 사라진 것이다. 이는 현실의 삶을 벗어나 초월하고자 하
177)진순애, 『현대시의 자연과 모더니티』, 새미, 2003, 70쪽.
178)문정현, 앞의 논문, 38쪽.
179)김학동 편, 『김영랑(개정판)』, 문학세계사, 1993, 193쪽.
는 적극적인 화자의 모습은 아니다. 다만, 그저 이상적 공간인 하늘을 바라봄으로써 위안을 얻고 현실의 고통을 잠시라도 잊고 싶은 것이다.180) 푸른 하늘의 신비로움으로 내면의 슬픔을 잠시 잊고 새로운 국면에 관심을 갖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오직 가을 하늘에 떠도는 구름
다만 후젓하고 줄 데 없는 마음만은 예나 이제나 외로운 밤 바람 섞인 찬 별을 보았습니다
-「눈물 속 빛나는 보람과」부분
이 시에서는 가을 하늘을 보며 대립되어 나타나는 화자의 심적 상태를 교차해 보여 준다. 즉, 눈물과 보람, 웃음과 슬픔, 원망과 기대감이 교차하고 있는데, 인생도 마찬가 지로 그것들이 교차하는 과정이다. 그렇기에 어두운 슬픔을 겪고 빛나는 보람을 얻을 수 있다. 이 시의 ‘하늘’은 눈물과 웃음, 보람과 슬픔의 전환 매개로 작용한다.
내 어린 날!
아슬한 하늘에 뜬 연같이 바람에 깜박이는 연실같이 내 어린 날! 아슴풀하다
하늘은 파 - 랗고 끝없고 팽팽한 연실은 조매롭고 오! 흰 연 그새에 높이 아실아실 떠놀다 내 어린 날!
바람 일어 끊어지던 날 엄마 아빠 부르고 울다 희끗희끗한 실낫이 서러워 아침 저녁 나무 밑에 울다
오! 내 어린 날 하얀 옷 입고 외로이 자랐다 하얀 넋 담고 조마조마 길가에 붉은 발자욱
180)임자영, 앞의 논문, 22쪽.
자욱마다 눈길이 고이었었다
-「연 (1)」전문
이 시는 연을 소재로 한 작품 중 하나로서 어린 시절의 세계와 화자를 통해 지금 처 해 있는 현실 세계를 대비하여 보여준다. 소재인 ‘연’에는 일종의 실존적 성찰이 투영 되어 있다. 이 시를 지을 때 김영랑의 나이가 만 36세이니 젊음을 지난 중년의 위치에 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서 자신의 존재와 삶의 위상을 점검해 본 것이다.181) 화자는 과거에 즐겁게 날리던 ‘연’과 이제는 끓어진 ‘연’을 대비하며 슬퍼한다. ‘하늘은 파-랗고 끝없고’에서 나타나듯이 과거에는 연이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무한했다. 때 문에 희망적이며 밝고 환한 이미지로 나타난다.182)
위에 언급한 ‘하늘’ 이미지는 모두 ‘낮 하늘’ 이미지이다. 영랑 시에서 ‘밤하늘’ 이미 지도 자주 ‘낮 하늘’ 이미지와 함께 나타난다.
마당 앞 맑은 새암을 들여다 본다 저 깊은 땅 밑에 사로잡힌 넋 있어
언제나 먼 하늘만 내려다 보고 계심 같아
별이 총총한
맑은 새암을 드여다 본다
저 깊은 땅 속에 편히 누운 넋 있어 이 밤 그 눈 반짝이고 그의 겉몸 부르심 같아
마당 앞
맑은 새암은 내 영혼의 얼굴
-「마당 앞 맑은 새암을」전문
181)이승원, 앞의 책, 249쪽.
182)손민달, 「김영랑 시에 나타난 비극성 연구」, 『국어국문학』, 159, 2011, 244쪽.
이 시에는 1연과 3연, 2연과 4연이 유사한 어구로 반복되고 있다. 또 ‘낮 하늘’ 이 미지와 ‘밤하늘’ 이미지가 동시에 나타나고 있다. 낮에 화자가 마당 앞에 있는 맑은 샘 물을 들어다보니 저 깊은 땅 밑의 넋은 먼 하늘을 내다보고 있는 것 같다. 이것은 땅 밑의 넋과 샘물 밖의 내가 소통을 이루는 것을 의미한다. 밤이 되자 맑은 샘물에는 하 늘의 총총한 별이 비친다. 그 별의 총총한 빛남을 통하여 영혼의 눈이 밖에 있는 화자 에게 반짝이는 눈빛을 보내는 것 같다.183) 결국 화자는 이 맑은 샘이 자기 영혼의 얼 굴이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여기서 ‘하늘’은 맑은 샘물과 함께 화자가 자신의 영혼을 찾아주는 도구가 된다. 화 자는 이 맑은 샘물과 하늘을 통해 자신의 내면적 순결한 영혼을 찾아내고 마침내 그가 추구하는 순결한 마음의 상태를 하늘과 맑은 샘물을 통해 드러낸다.
황홀한 달빛 바다는 은銀장 천지는 꿈인 양 이리 고요하다
…(중략)…
저 은장 위에 떨어진단들 달이야 설마 깨어질라고
…(중략)…
호젓한 삼경 산 위에 홀히 꿈꾸는 바다 깨울 수 없다
-「황홀한 달빛」부분
183)이승원, 앞의 책, 204쪽.
이 작품에서 영랑은 ‘달빛’, ‘은장’ 등의 이미지를 통해 황홀하고도 고요한 밤하늘의 세계를 노래하고 있다. 시각과 청각의 어우러짐, 정적 이미지와 동적 이미지의 활용은 영랑의 음악적 감각을 구조적으로 상승시켜 달빛의 아름다운 정경을 묘사한다.184) 특 히 ‘은장’이라는 새로운 조어를 통하여 달빛이 비친 바다의 황홀한 은빛 공간을 간결 하게 표현하고 있다. 신비롭게 비치는 달은 ‘내’가 부르면 선뜻 내려올 것처럼 다정한 모습을 보이는데 그 정겨운 달에서는 맑고 은은한 노래가 울려나올 것 같기도 하 다.185)
사개 틀린 고풍의 툇마루에 없는 듯이 앉아 아직 떠오를 기척도 없는 달을 기다린다 아무런 생각 없이
아무런 뜻 없이
이제 저 감나무 그림자가 사뿐 한 치씩 옮아 오고 이 마루 위에 빛깔의 방석이 보시시 깔리우면
나는 내 하나인 외론 벗 가냘픈 내 그림자와
말 없이 몸짓 없이 서로 맞대고 있으려니 이 밤 옮기는 발짓이나 들려 오리라
-「사개 틀린 고풍의 툇마루에」전문
이 시는 밤에 홀로 앉아 달을 기다리고 있는 고독한 화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보이 지 않는 달을 기다리며 바라는 화자의 모습은 독자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마치, 화자 역시 캄캄한 밤에 달과 함께 사라져 버릴 것만 같다.
화자는 자신의 존재조차 잊고 달빛의 정경에 동화되다가 다시 자신의 고독과 마주하 게 된다. 감나무 그림자뿐 아니라 자신의 그림자도 툇마루에 비치는데, 그 그림자를 시인은 ‘가냘픈 내 그림자’, ‘내 하나인 외론 벗’이라고 한다. 자기 자신을 연약하고 외 로운 존재로 인식하면서 고독 속에서 자연의 정경과 하나가 되려는 태도를 보이는 것
184)임자영, 앞의 논문, 23~24쪽.
185)이숭원, 앞의 책, 208쪽.
이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화자의 외로운 심리는 더욱 깊어져 간다.186)
밤 사람 그립고야
말 없이 걸어가는 밤 사람 그립고야 보름 넘은 달 그리매 마음 아이 서어로아 오랜 밤을 나도 혼자 밤 사람 그립고야
-「밤 사람 그립고야」전문
‘밤 사람’은 표면적으로 어둠과 대상이 합쳐진 시어이다. 실제 ‘밤 사람’은 밤길을 걷 는 외로운 사람을 뜻한다. 밤 사람이 그립다는 것은 자신도 그만큼 외로워서 밤길을 혼자 걷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의미이다. 그렇게 밤 사람을 그리워하며 시간을 보내다 가 어느덧 보름을 넘기고, 쓸쓸한 달그림자는 밤길에 비친다.187)
‘달’은 이 작품에서 중요한 이미지다. ‘달’은 고전 시부터 ‘그리움’의 상징으로 여겨 졌다. 사람들은 ‘달’을 보며 마음속의 무언가를 그리워했다. ‘달’을 통해 ‘밤’은 어둠의 이미지에서 자연스럽게 아득한 ‘그리움’의 이미지로 변용 된다. 또 ‘밤’이라는 시간은 그에 대한 간절함을 더하는 시간으로 작용한다. 결국 보름을 넘긴 달을 보면서 허전한 마음으로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모습은 외로움과 그리움의 순환 관계를 나타내고, 화자 가 그리는 대상의 모습을 곱고 부드러운 색채로 만들어준다.
“대개 별은 어둠을 밝히면서 빛나는 정신적인 것의 표상으로 인식된다. 영랑의 시에 서도 별은 높은 곳에서 빛나는 순수와 절대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188) 다시 말하자 면, 영랑 시의 ‘별’ 이미지는 눈으로는 볼 수 없지만 마음으로는 여전히 갈망하는 빛에 대한 추구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좁은 길가에 무덤이 하나 이슬에 젖이우며 밤을 새운다 나는 사라져 저 별이 되오리 뫼 아래 누워서 희미한 별을
-「좁은 길가에 무덤」전문
이 시에서 좁은 길가에 있는 무덤은 누구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이 무덤 위에 이슬
186)위의 책, 199쪽.
187)위의 책, 63쪽.
188)문정현, 앞의 논문, 3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