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국가가 출현한 17세기만 해도 국가란 곧 영토를 의미했다. 국 가는 영토 내에서 절대적인 주권을 행사하며, 주권과 주권이 충돌하 는 지점에 그어진 정치적 경계가 바로 국경이었다. 그러나 이후 무 역이 활발해지면서 물자가 국경을 넘어 이동하기 시작했고, 이는 결 국 사람의 이동으로 이어졌다. 홀리필드(James Holliefield)에 따르 면 국가는 그 기능에 따라 병영국가(garrison state)에서 통상국가 (trading state)로, 다시 이민국가(migration state)로 진화해왔 다.45) 국민국가 출현 이후 19세기 이전까지는 국가가 군대를 통해 영토와 국민을 지키는 것이 중요했다면 19~20세기에는 국가가 무 역과 통상을 통해 경제적 번영을 이루는 것이 중요해졌다. 그리고 21세기에는 이민을 조정(manage)함으로써 국익은 물론 국제사회의 안보와 안정을 도모하는 것이 국가의 중요한 역할이 되었다. 결국
‘인간’의 국경 간 이동은 오늘날의 국가들이 가장 예민하게 대응하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국경에 대한 개념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우선 국경의 의미를 세 가지 차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째, 국경을 ‘기능적’ 시각에 서 이해하는 관점이다. 국경에 대한 전통적 이해라고 할 수 있는 이 시각은 국경을 ‘우리(us)’와 ‘그들(them)’로 나누는 지리적, 정치적 구분선으로 이해한다. 둘째, 국경을 ‘구조’로 보는 시각이다. 국경을 사회문화적 구성물이라고 인식하는 이 시각은 국경 지역에서 발생 하는 대립이나 협력, 그리고 그로 인해 새롭게 구축되는 국경의 맥 락에 주목한다. 셋째, 국경을 하나의 ‘의미 체계(systems of meaning)’
45) James Holliefield, “The Emerging Migration State,” International Migration Review, vol. 38, no. 3 (2004), pp. 885~912.
로 보는 시각이다. 이는 지역 고유의 정체성이 드러나는 공간으로의 국경에 주목한다.
국경에 대한 시각은 ‘기능적’ 측면에서 ‘상징적’ 측면으로 그 초점이 점차 이동해 왔다. 과거 국경이라는 것은 주권에 대한 ‘정치적 표식 (political marker)’이었으며, 영토에 관한 모든 문제는 국가중심적으로 이해되었다. 애그뉴(John Agnew)는 국가(state)와 민족(nation)을 고 정불변의 것으로 간주하는 이러한 경향을 ‘방법론적 민족주의 (methodological nationalism)’라고 명명하고, 오직 국경만이 나와 타자를 가르는 경계라고 인식하는 고정관념을 ‘영토의 덫(territorial trap)’이라고 비판하였다.46)
오늘날의 국경학자들은 ‘사회적 제도(social institutions)’로서 국경이 갖는 의미에 주목한다.47) 국경은 다양한 행위자들이 행동과 담론을 통해 구성하는 것이며,48) 이렇게 형성된 국경은 또다시 사회 와 개인의 정체성에 영향을 미친다.49) 이제 국경은 대치와 충돌의 공간에서 문화와 상징의 공간으로 변모하고 있다.
국경의 사회문화적 맥락이 강조되기 시작하면서 국경 그 자체보
46) John Agnew, “The Territorial Trap: The Geographical Assumtions of International Relations Theory,” Review of International Political Economy, vol. 1, no. 1 (1994), pp. 53~80.
47) James Wesley Scott, “European Politics of Borders, Border Symbolism and Cross-Border Cooperation,” in A Companion to Border Studies, eds. Thomas M. Wilson and Hastings Donnan (Hoboken, New Jersey: Wiley-Blackwell Publishing, 2012), pp. 83~99.
48) Gabriel Popescu, “The Conflicting Logics of Cross-Border Reterritorialization:
Geopolitics of Euroregions in Eastern Europe,” Political Geography, vol. 27, no. 4 (2008), pp. 418~438; Hank van Houtum, “Borders of Comfort, Spatial Economic Bordering Processes in the European Union,” Regional and Federal Studies, vol. 12, no. 4 (2002), pp. 37~58.
49) Vladimir Kolossov, “Border Studies: Changing Perspectives and Theoretical Approaches,” Geopolitics, vol. 10 (2005), pp. 606~632; Ulrike Meinhof ed., Living (with) Borders: Identity Discourses on East-West Borders in Europe (Aldershot: Ashgate, 2002), pp. 1~176.
다 국경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주목한 ‘국경화(bordering)’라는 개념 이 등장했다. 국경이라는 것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주민들이 일상적 으로 국경을 넘나들며 문화, 관습, 상징, 언어 등을 주고받고 그 과 정에서 ‘탈국경화(debordering)’와 ‘재국경화(rebordering)’가 발생 한다는 것이다.50)
최근에는 국경화에 이어 ‘국경경관(borderscape)’이라는 개념이 부상하고 있다.51) 국경(border)과 경관(landscape)이 합쳐져 만들 어진 이 단어는 말 그대로 국경을 선(線)이라는 1차원적 시각에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국경의 이미지(2차원)나 공간(3차원), 그리고 그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함축한다. 국경이라는 현상의 복잡성과 유동성을 좀 더 강조한 이 개념은 정치학이나 지리학에 국한되었던 국경 연구의 지평을 모든 학제가 참여하는 학제 간 연구로 확대해야 할 필요성을 부각시킨다.
그렇다면 국경의 의미는 왜 이렇게 변화했을까. 국경의 유동적 의 미를 증가시킨 역사적 사건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는 구소련의 붕괴다. 소비에트 연방에 속해 있던 많은 국가들이 독립 하면서 새로운 국경이 형성되었을 뿐 아니라 냉전이 종식되면서 적 대 관계에 있던 국가 간의 국경통제가 완화되었다. 구소련의 몰락과 사회주의 국가의 체제 전환은 국경의 군사적 보호 기능과 이데올로
50) James Wesley Scott, “European Politics of Borders, Border Symbolism and Cross-Border Cooperation,” p. 84; Lawrence A. Herzog and Christophe Sohn,
“The Co-mingling of Bordering Dynamics in the San Diego-Tijuana Cross-border Metropolis,” Working paper n°2016-01 (Luxemburg Institute of Socio-economic Research, 2015), pp. 1~19.
51) ‘국경경관’ 개념의 유래에 대해서는 다음의 문헌을 참조. Elena Dell’Agnese and Anne-Laure Amilhat Szary, “Borderscapes: From Border Landscapes to Border Aesthetics,” Geopolitics, vol. 20, no. 1 (2015), pp. 4~13; Prem Kumar Rajaram and Carr Grundy-Warr eds., Borderscapes: Hidden Geographies and Politics at Territory’s Edge (Minneapolis, MN: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2007), pp. 1~376; Chiara Brambilla, “Exploring the Critical Potential of the Borderscapes Concept,” Geopolitics, vol. 20, no. 1 (2015), pp. 14~34.
기 단절기능을 약화시켰다. 국가 간 대립이 청산되면서 국경의 결합기 능과 접촉기능이 활발해지고 사회문화적 상호협력이 활성화되었다.
둘째는 세계화의 가속화다. 세계화는 국가가 영토 내에서 행하던 독점적 주권을 약화시키고 국경지역을 ‘탈영토화’된 초국적 공간으 로 탄생시킨다.52) ‘탈영토화’된 국경 지역에는 국민국가의 완고한 영토성에서 벗어난 혼종화된 지역 정체성이 발생한다. 마누엘 카스 텔스(Manuel Castells)의 ‘흐름의 공간(space of flows)’ 이론에 따 르면 ‘공간’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사회를 구성하기 때문에
‘국경’이라는 인위적 경계가 공간을 정의 내리는 잣대가 될 수 없음 을 시사한다.53) 세계화가 반드시 국경의 퇴색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 다. 오히려 세계화는 국경의 존재와 의미를 부각시키며 국경에 대한 인식 전환을 요구한다. 아민과 트리프트(Ash Amin and Nigel Thrift)는 “세계화가 영토 구분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 히려 지역 정체성과 발전 역량에 새로운 영향력을 미친다”고 주장하 였다.54)
마지막으로 지역화(regionalization), 특히 유럽화(Europeanization) 를 들 수 있다. 유럽연합은 창설 초기부터 회원국 간 실질적 통합을 위해 국경 철폐를 추진해왔다. 1995년 쉥겐협정이 발효되면서 내부 국경의 기능은 약화되거나 거의 소멸되다시피 했다.
유럽연합은 다양한 지역 간 협력프로그램(예: INTERREG)을 통
52) 이성훈‧김창민, “세계화 시대 문화적 혼종성의 가능성,” 이베로아메리카연구 , 제19 권 2호 (2008), pp. 91~110; 박치완, “탈영토화된 문화의 재영토화,” 철학연구 , 제 42집 (2011), pp. 59~92.
53) Manuel Castells, The Informational City: Information Technology, Economic Restructuring, and the Urban Regional Process (Oxford, UK: Cambridge, MA:
Blackwell, 1989), pp. 1~416.
54) Ash Amin and Nigel Thrift, “Living in the Global,” in Globalization, Institutions and Regional Development in Europe, eds. Ash Amin and Nigel Thrift (Oxford, UK: Oxford University Press, 1995), pp. 1~22.
해 국가 간 격차를 줄임으로써 궁극적으로 유럽의 통합을 추구하였 다. 한편 유럽연합은 회원국이 아닌 국가들과의 외부국경은 통제를 강화하여 이른바 ‘요새 유럽(Fortress Europe)’을 구축하였다. 최근 에는 비회원국과도 여러 협력사업(예: European Neighbourhood Policy)을 추진하고 있는데, 궁극적 목적은 이들 국가들에 유럽의 영향력과 가치를 전파함으로써 지역안보를 높이는 것이다.
국경의 의미 변화는 안보에 대한 개념 자체를 흔들어놓았다. 과거 안보라는 것은 자국의 힘에 의존하거나(self-help) 타국과의 동맹 을 결성하는 방식으로(alliance) 보장되었다. 군비를 통한 세력균형 (balance of power)이 안보의 기본원칙이었으며 이는 결국 안보 딜 레마(security dilemma)로 이어져 안보 불안이 가중되는 결과를 낳 았다. 국제사회는 ‘군비에 기초한 안정이란 절대적으로 유지될 수 없다’는 문제의식 아래 적대국과의 대립이 아닌 공존을 통해 안보를 구축하는 이른바 ‘공동안보(common security)’를 꾀하였다.55) 탈 냉전 이후에는 안보환경이 다변화되면서 안보의 개념은 군사적 차 원을 넘어 비군사적 차원으로 확장되었고, 그 결과 경제, 환경, 마 약, 테러 등 다양한 위협 대상을 포괄하는 ‘협력안보(cooperative security)’의 개념이 대두되었다.56)
안보에 이르는 방식이 대립에서 협력으로 이동하였고 안보의 영 역도 군사적 차원에서 비군사적 차원으로 확대된 만큼 국경의 전통 적 역할과 기능에 대한 새로운 인식론적 전환이 필요한 것은 당연하 다. 크람쉬(Olivier Kramsch)는 국경을 ‘국가’ 중심적으로 분석하는
55) 신범식, “다자 안보협력 체제의 개념과 현실: 집단안보, 공동안보, 협력안보를 중심으 로,” JPI 정책포럼 , no. 2015-09 (2015.2.16.).
56) 신범식의 글에 따르면 ‘공동안보’와 ‘협력안보’는 그 개념이 상당히 유사하기 때문에 자주 혼용되기도 한다. 따라서 이 둘을 기계적으로 구분하는 것은 두 개념이 지니는 공통성을 인위적으로 나누는 위험성이 있다. 다만, 공동안보와 비교할 때 협력안보는 안보에 이르는 ‘과정’을 중시하며, 자국의 안보를 위한 방어의 수단에서 제약을 덜 받는다는 차이가 있다. 위의 글, p. 9.
기존 연구를 비판하면서, 국경 지역의 일상성과 정체성에 초점을 둔 연구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57) 국가중심적 관점을 탈피한 국경 연 구는 국경을 국가의 전유물이 아닌 그 지역 주민들의 삶의 공간으로 다시금 환원시킨다는 점에서 의의가 깊다. 또한 국경 협력에서 시민 사회의 역할을 강조함으로써 공식적 채널이 아닌 비공식적 채널을 통한 국경 협력의 가능성을 한층 확대시킨다는 점에서 의의가 깊다 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