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 규제조치에 맞서 이들 기업들이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에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투자 수용국은 규제를 위한 입법권에서부터 국유 화 권한까지 광범위한 제도적 수단을 가지고 있는 반면 초국적 기업 은 수용 희망국 간의 경쟁과 투자확대를 거부할 수 있는 능력 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양자 간에는 각자의 이러한 능력을 바탕으로 하 는 정치적 협상이 불가피했다.14)
초국적 기업들이 주도하는 국경 협력은 이러한 면에서 경제적 이 득의 배분을 뛰어넘어 정치적 위협이라는 측면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수많은 저발전 국가에게 초국적 기업을 파트너로 하는 국경 협력 프로젝트는 발전의 수단이자 해법으로 받아들여졌 다. 초국적 기업에 의한 투자자본의 유입 없이는 불가능한 것으로 인식되었던 대규모 장치산업 분야의 발달과 이로 인한 경제성장의 사례들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과 대만을 비롯한 동아시아 국가들의 성공적 산업모델은 개방과 교역 증대가 경제적 성취의 수 단이었음을 입증한다.15)
해보는 것도 유의미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전통적 의미에서 ‘지역’의 개념은 공간을 상호분리하는 ‘경계’의 개념으로 이해되었다. 국경은 서로 다른 국가를 경계 짓는 공간인 동시에 서로 다른 지역을 구분하 는 경계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지역주의(regionalism) 개념이 등장하면서 서로 다른 공 간을 통합(grouping)하려는 사고가 대두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 후 국제경제체제를 지배해왔던 다자주의(multilateralism)는 비차 별적, 호혜적 작동원리를 기반으로 탄생하였다. 그러나 이후 다자주 의의 침체 국면에서 소수 국가에 의해 추진되는 무역협정이 추진되 었다. 호혜성과 비차별 원칙이 아닌 배타적 성격을 띠는 무역협정을 기반으로 지역주의 흐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지역주의는 기본적 으로 차별적 조치를 교환하고자 하는 소수 국가 간 합의, 즉 이에 참여하는 국가에게만 특별한 혜택을 제공하고 비참여자에게는 차별 적 대우를 기반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역주의에 참여하는 소수의 국가는 지리적 근접성을 뛰어넘어 정치적, 경제적, 전략적 이익 계산에 따라 선택되었다. 한국 정부와 최초로 추진했던 칠레와의 자유무역협정(Free Trade Agreement:
FTA)처럼 국내 경제에 미치는 경제적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의도 적으로 지리적 근접성을 배제하는 경우도 나타났다. 미국이 최초로 자유무역협정을 맺은 나라가 이스라엘이었다는 사실은 경제적 효용 성보다 전략적 안보이익이 지역주의의 동기로 작용했다는 것을 보 여준다. 따라서 지역주의의 동기와 배경에는 국경을 공유하는 국가 들이 가진 물리적 근접성뿐만 아니라 상호의존성과 동질성 등 국경 과 무관한 요소들이 내재된 것이다.
국경이 가지는 경계와 분리의 기능을 뛰어넘어 연계와 통합을 통 해 전략적 이익을 확보하려는 지역주의 현상은 교역과 통상 분야에
서 출발하여 역내 무역의존도나 투자집중도 등을 주요지표로 삼아 왔으나 점차 제도화의 수준을 높여가면서 정치지향적 개념으로 발 전했다. 지역의 자주성을 유지하면서도 연대와 협력을 통해 공통의 정치적 이해관계를 추구해온 것이다. 지역주의를 설명할 때 국가 간 경제적 거래를 목적으로 정부 또는 정부 간(inter-governmental) 협력기구들이 주체로 나서 벌이는 목적지향적이고 의식적인 움직임 을 강조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라고 볼 수 있다.
본 연구에서 다루고자 하는 국경 협력의 가능성과 미래를 검토하기 위 해 본 장에서는 지역주의(regionalism)보다는 지역화(regionalization) 현상이라는 분석 틀을 제시하고자 한다. 지역화 현상이 지리적 국경 이라는 공간을 공유하고 있는 국가들의 비정부 행위자들이 협력을 이뤄내는 양상을 관찰하는 데 유용한 시사점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지역주의와 지역화는 특정한 가치와 이익을 공유하는 국가들의 연 대라는 측면에서 공통점을 보여주지만 지역주의는 정치적 목적의식 이라는 규범적 측면을, 지역화는 경제적 협력이라는 발생적 측면을 강조한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해거드(Stephen Haggard)는 지역주의를 경제정책의 협조나 조정을 기본내용으로 하는 정치적 과정으로, 지역화를 경제 교류의 지역적 집중현상으로 정의한다.16) 갬블(Andrew Gamble)과 페인(Anthony Payne)은 지역주의를 민족국가들 차원에서 국경을 초월하는 공동의 이익을 다루기 위한 공식적 형태의 메커니즘을 만 들어내기 위한 목적의식적이고 의도적인 시도로 설명한다. 반면 지 역화는 국가 행위자들이 사전에 정치적으로 결정한 구도의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국경 주변에서 주로 하위국가적(subregional)
16) Stephen Haggard, “Regionalism in Asia and the Americas,” in The Political Economy of Regionalism, eds. Edward D. Mansfield and Helen V. Milner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97), p. 47.
행위자 또는 비국가 행위자의 행동들이 만들어내는 초국경적 거래 의 과정(process)이다.17) 다시 말해 지역화는 국경을 넘어 이동하는 자연발생적 인적, 물적 교류를 포함하면서도 정부기관이 사전적으 로 취한 정책적 의사결정 없이 사회와 시장 속에서 산재해 있는 행위 자들이 주도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지역화 과정에 참여하는 비국가 행위자들은 국경 주변에서 다양한 사회적, 경제적 네트워크를 창출 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매우 정교하고 복잡한 형태의 ‘모자이크’로 발 전하기도 한다.18)
이러한 이유로 인해 지역주의를 ‘하향식(top-down)’ 협력 및 통합 의 과정으로, 지역화를 ‘상향식(bottom-up)’ 협력 및 통합의 과정으 로 분류하기도 한다. 또 지역주의와 구별하여 지역화를 ‘연성 지역주 의(soft regionalism)’ 또는 ‘비공식 통합(informal integration)’으 로 정의하기도 한다.19) 앞서 지적했듯이 지역을 둘러싼 논의가 ‘장소 의 공간(space of place)’ 에서 ‘교류의 공간(space of flow)’으로 진 화하는 과정임을 감안하면 지역화를 통한 국경 협력 논의의 필요성은 더욱 증대된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진행되는 세계적 차원의 저성장 기조와 반 세계화의 흐름 등에 비춰보더라도 지역주의가 아닌 지역화의 흐름 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분명해진다. 유럽에서의 브렉시트(Brexit) 와 미국에서 ‘트럼프 현상’으로 대표되는 신고립주의적 분위기 또한 민족주의적 움직임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높은 정치적 결사체를 지 향하는 지역주의에 대해 경계의 신호를 보내고 있는 중이다. ‘역사
17) Andrew Gamble and Anthony Payne eds., Regionalism and World Order (Basingstoke: Palgrave Macmillan, 1996), p. 250.
18) Andrew Hurrell, “Regionalism in Theoretical Perspective,” in Regionalism in World Politics. eds. Andrew Hurrell and Louise Fawcett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95), pp. 39~40
.
19) Ibid., p. 40.
의 종언’의 저자인 프랜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는 ‘트럼
프 현상’이나 브렉시트가 일회적 현상이 아니며 세계가 포퓰리스트
민족주의(populist nationalism)로 진입했다는 분석마저 내놓고 있 다.20) 특히 중국의 일대일로(一帶一路) 전략과 미국과 일본의 인도 -태평양 구상이 충돌할 조짐마저 보이는 아시아 지역에서 패권 경 쟁에 대한 경계지수도 상승한다. 이러한 요인들은 모두 경성모델로 의 지역주의보다는 연성모델을 지향하는 지역화에 대한 관심도를 높이는 이유로 작용할 수 있다.
국경을 공유하고 있는 접경지역은 대부분 전통적으로 국가운영의 중심부에서 멀리 떨어진 주변부에 위치했다. 따라서 국가 주도의 발 전과정에서는 발전의 혜택에서 소외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또한 국가의 안보 이익만이 강조되는 시대에는 접경지역에 장벽이 세워 졌다. 국경 지역의 장벽은 이를 넘나드는 인적, 물적 자원의 이동을 방해하거나 비용을 높이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초국적 기업 의 활동 증가와 저개발 국가들의 대외지향적 발전 전략으로 인해 국 경의 기능이 ‘분리의 공간’에서 ‘연결과 교류를 통한 발전의 공간’으 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접경지역을 경제발전을 위한 허브로 구상하 는 초국경적 협력과 지역화의 가능성에 대한 관심이 함께 높아진 것 도 이러한 배경에서였다.
20) Francis Fukuyama, “US against the world? Trump’s America and the new global order.” Financial Times, November 11, 2016, <http://www.ft.com/content/
6a43cf54-a75d-11e6-8b69-02899e8bd9d1> (Accessed July 27,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