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을 국가중심적으로만 바라보던 시각이 쇠퇴하면서 국경 협력 을 추진하는 행위자의 하나로 시민단체의 역할이 강조되고 있다. 국 경을 둘러싼 시민단체 네트워크가 부재한 상황에서 국가 간의 정치 적 외교적 관계가 경색되면 국경 지역 주민들의 삶이 불안정하게 변 해 버리는 경우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소비에트 연방에 가입되어 있던 에스토니아는 1990년대 초반 구소련의 붕괴와 함께 독립하면서 러시아와 에스토니아 사이에 국경이 새롭게 그어졌다.
이전까지만 해도 주민들은 서로의 지역을 자유롭게 오가며 물건을 사고팔고 생계를 이었다. 그러나 국경이 생기면서 국경을 오가는 물 자에 무거운 관세가 붙기 시작했고 국경 무역이 쇠퇴했다. 페이푸스 (Peipus) 호수는 이 지역 주민들의 중요한 소득 원천이었으나 호수 를 가로지르는 국경이 설정되면서 생산성을 상실했다. 살길이 막막
and Borders,” in Culture and Cooperation in Europe’s Borderland, ed. James Acderson, Liam O’Dowd and Thomas M. Wilson (Amsterdam; New York:
Rodopi, 2003), p. 21.
해진 주민들은 핀란드, 노르웨이, 영국 등지로 떠났고 지역은 황폐 화되었다.90)
이러한 측면에서 시민단체는 일종의 대안적 경로를 제공한다. 국 가 간 충돌 등 공식적 채널이 여러 가지 정치적 이유 때문에 막혔을 때 시민사회는 최소한의 협력 창구를 열어놓는 역할을 할 수 있다.
또한 시민사회를 통한 국경 협력은 환경, 문화, 교육 등 비정치적 영역의 문제를 공동 대응하는데 효과적이라고 할 수 있다. 에스토니 아와 러시아의 시민단체들은 정부의 지원을 받아 활발한 문화교류 를 하고 있는데, 양국은 역사적으로 치열한 영토 분쟁을 겪어왔기 때문에 정부가 주도하는 협력은 아무래도 한계가 있다. 대신 정부는 우회적으로 시민단체를 지원하여 문화적 협력을 도모함으로써 양국 간의 긴장을 완화하는데 힘쓰고 있다.
유럽연합의 주변국 정책은 국경 협력을 추진함에 시민사회가 활 용되는 양상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유럽연합은 쉥겐 조약 체결 이후 가입국 간의 내부 국경(internal border)은 전면 개 방하는 대신 비가입국과의 외부 국경(external border)을 엄격히 통 제하는 이른바 ‘요새 유럽(Fortress Europe)’을 구축했다. 그러나 유럽 전역의 지역안보를 위해서는 유럽연합에 인접한 비가입국과의 협력 또한 중요하다는 인식 아래 2004년부터 ‘이웃 정책(European Neighborhood Policy: ENP)’을 펼쳐왔다. ENP의 대상 국가는 남 쪽으로는 알제리, 이집트, 이스라엘, 요르단, 레바논, 리비아, 모로 코, 팔레스타인, 시리아, 튀니지, 동쪽으로는 아르메니아, 아제르바 이젠, 벨라루스, 그루지아, 몰도바, 우크라이나이다. 러시아와는 별 도의 협력 프로그램(EU-Russia Cross-border Cooperation)을 운
90) Gulnara Roll, “Civil Society Cooperation in the Face of Territorial Adversity:
The Estonian-Russian Case,” European Integration, vol. 32, no. 5 (2010), pp.
475~490.
영하고 있다.
ENP는 제3국에게 유럽연합 회원국의 지위를 주지 않으면서도 유 럽연합의 영향력과 가치를 전파하여 지역 안정과 안보를 꾀하는 프 로젝트라고 할 수 있다. 자유, 민주주의, 인권과 같은 가치와 규범을 전파하는 것은 정부 간 협력에 의한 하향식(top-down) 접근보다 비 정부 행위자를 통한 상향식(bottom-up) 접근이 거부감이 적고 효 과적이다. 유럽연합은 이러한 점 때문에 ENP를 구현시킬 행위자로 시민단체의 중요성에 주목한다. 유럽공동체위원회는 “ENP의 행동 계획을 수행함에 있어 시민단체(Civil Society Organizations: CSO) 는 우선적으로 실행에 옮겨야 할 과제가 무엇인지를 선별하고, ENP 수행을 촉진하고 모니터링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밝혔다.91)
특히 핀란드-러시아의 국경 협력은 시민단체의 역할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유럽국가들은 1971년에 이미 국경 간 협력을 도모하기 위한 유럽국경지역협회(Association of European Border Regions)를 설립하고, 2개 이상의 국가들의 경계가 접한 지 역을 유로리전(Euroregion)으로 지정해 이 지역의 협력을 도모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해왔다. 특히 1991년 구소련의 붕괴와 함께 동유럽 및 중앙아시아 국가들이 독립하면서 유럽과 신생국들 간에 새로운 국경이 다수 발생하게 되었다.
유럽연합은 2000년 핀란드-러시아 국경지역을 ‘유레지오 카렐리 아(Euregio Karelia)’로 선정하고 다양한 협력 프로그램을 운영해 왔다. 이 지역에는 총 127개 지방자치단체가 포함되어 있으며 약 127만 명의 인구가 살고 있다.
91) Commission of the European Communities, “A Strong European Neighborhood Policy” 2007, <https://www.ab.gov.tr/files/ardb/evt/1_avrupa_birligi/1_9_k omsuluk_politikalari/A_strong_European_Neighbourhood_Policy_5_12_2007.p df> (Accessed September 1, 2018), p. 11.
<그림Ⅲ-1> 유레지오 카렐리아
출처: http://www.euregiokarelia.com
러시아는 구소련 붕괴 이후 체제 전환을 겪는 과정에서 국가의 사 회보장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이 러한 복지 공백을 메우기 위해 러시아 내에는 취약 계층을 돕는 자조 단체 내지는 구호단체들이 다수 생겨났다.92) 핀란드와 러시아 NGO 들은 서로 연합하여 핀란드 정부 및 유럽연합의 재정적 지원을 받아 러시아 사회경제 개선을 위한 다양한 사업을 러시아에서 수행해왔 다. 특히, 노인, 장애인, 아동 등 취약계층에 대한 사회서비스, 문화
92) 2006년도를 기준으로 러시아 정부에 등록된 총 7만여 개의 NGO 가운데 약 30%는 사회복지 분야에 대한 것이다. James W. Scott and Jussi Laine, “Borderwork:
Finnish-Russian Co-operation and Civil Society Engagement in the Social Economy of Transformation,” Entrepreneurship & Regional Development, vol.
24 (2012), pp. 181~197.
및 교육, 공중 보건 분야에서 러시아의 발전을 도모하였다. 예를 들
어 ‘핀란드-러시아 사회 보건 NGO 네트워크’(Finnish-Russian
Network of Social and Health NGOs)는 핀란드의 약 50개 NGO와 러시아 100여개 NGO가 연합한 단체인데, 유럽연합의 재정적 지원 을 받아 러시아 측 국경 지역의 공중보건 및 사회보건 개선 활동을 펼쳤다.
일각에서는 유럽연합의 지원을 받아 핀란드 및 러시아의 시민단 체가 복지 기능을 대행하는 이러한 방식의 협업이 권력을 견제하고 감시하는 시민단체의 본질적 기능을 훼손한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재정 원조를 받게 되면 사업 내용 자체가 지역사회 주민에게 맞춰지 기보다 재정 공여자의 이해관계를 반영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가 령 러시아 시민단체가 유럽연합의 원조를 받아 복지사업을 수행할 경우 러시아 지역 주민의 안위보다는 유럽연합의 이해관계에 더 충 실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또한, 재정을 시민단체가 자체적으로 해 결하지 못하고 외부로부터의 지원에만 의존할 경우 재정을 따내는 데 성공하는 단체와 그렇지 못한 단체 사이의 양극화가 심화될 소지 가 있다. 재정 조달에 성공적인 시민단체는 규모가 커지다보니 지역 사회의 문제에 세심하게 대응하는 능력이 떨어질 가능성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단지 유럽연합의 재정적 지원을 받아 시민단체가 협력 업무를 대행할 뿐인 이러한 관행이 양국 사회에 의미 있는 변화 를 가져오지는 못할 것이라는 회의론도 존재한다. 사실 CSO의 기능 과 의미에 대한 러시아나 중동부 유럽국가들의 이해는 서구 세계와 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CSO는 그 역할과 기능에 따라 크게 수행적 (operational) 단체와 옹호적(advocacy) 단체로 나누어볼 수 있다.
수행적 CSO는 주로 정부, 국제기구, 후원자 등의 재정적 지원을 받 아 도움이 필요한 영역의 구호 업무를 대행하는 역할을 한다. 반면
옹호적 CSO는 특정 집단의 이해를 대변하며 이들의 권익을 옹호하고 쟁취하는 활동을 벌인다. 많은 CSO들이 수행적 기능과 옹호적 기능 을 동시에 구사하기 때문에 이 둘을 분명하게 구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러시아에서 활동 중인 CSO들의 경우 전자의 기능을 주로 수행하며 후자의 기능은 없거나 미약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민사회에 대한 서구 중심적 시각을 비서구 사회에 일방적으로 기대하고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반론도 있다. 시민단체 협력 초기에는 서구사회가 비서구사회를 일방적으 로 도와주는, 일종의 인도적 지원에 가까운 형태로 교류가 진행된 다. 그러나 일단 교류의 물꼬가 트이면 교류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비서구사회의 시민단체들은 사회적 학습(social learning)을 하게 된다. 비록 비서구사회의 시민단체들이 처음부터 민주화나 사회변 혁 같은 원대한 목표를 설정하고 이를 수행하지는 않더라도, 서구사 회의 도움을 받고 서구사회의 시민단체들과 교류하는 과정에서 자 체적인 역량이 강화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