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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민족․다문화사회의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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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국가보다 단일민족성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지만 그들 내부의 민족 적 다양성을 살펴보면 일본 역시 어느 나라 못지않은 다문화적 상황에 놓 여있었다고 볼 수 있는데, 북쪽의 ‘아이누’30), 남쪽의 ‘류큐’31)민족이 대표

28) 박상영(2011), “프랑스 다문화 학교교육정책 분석 : 우선교육지대 정책을 중심으로”, 전 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p.43-44

29) 최충옥(2009)의 의해 작성된 다문화진행 프로세스에 의하면 한국과 일본은 다문화 진행 과정에 도입기에 속한다.

30) 아이누의 경우는 동북지방 위쪽으로 북해도 전역, 사할린 일부까지 광범위하게 존재하

적이다. 이들 중 아이누족은 일본내에 영입된 이후에도 와진(본토인)과 구 토인(旧土人)이라는 명칭으로 사회적, 경제적 차별을 받아왔으며, 류큐민족 의 경우, 일본에 복속된 이후로 점차 축소과정에는 있으나 오키나와 열도 의 8할이 미군기지로 사용되기도 했으며, 오키나와 주민이 일본 본토로 가 기 위해서 비자를 신청해야 하는 등의 대우를 받았다. 따라서 일부 소수의 류큐인들 가운데 지금까지도 류큐민족의 독립성을 강조하면서 독립운동을 펼치고 있는 이들이 있다. 또한 봉건적 신분제질서의 잔재로 ‘피차별부락 민’, ‘동화지구주민’이라 불리며 신분적 차별을 받아온 집단이 존재한다. 이 들은 메이지유신 때, 법적으로는 해방되었으나 그들에 대한 편견, 사회적 차별은 현재까지도 이어져왔다.32)

국내적인 민족적 차별문제를 넘어서, 국외로부터 유입된 외국인의 경우는 대표적으로 제 1차 세계대전을 거쳐, 식민주의를 펼친 일본에 1910년 조선 합병을 통해 강제노동 징용을 통해 들어온 사람들을 포함해, 태평양전쟁에 서 패배한 이후에, 해방이 되었음에도 귀국하지 못하고 일본에 남게된 재 일 한국 조선인들을 들 수 있다. 이들은 1980년 당시까지만 해도, 외국인등 록자 총수 782,910명 중 재일한국 조선인이 664,536명으로 84.9%을 차지하 고 있을 만큼 일본 내의 외국인들의 다수로써 존재했다.33) 이외에도, 또 다

고 있던 선민족이었으나, 15세기 와진(당시 일본 본토인)과의 전투 과정에서 점차 세력이 약화되어 16세기에는 전쟁이 종식되었고, 점차 일본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17세기에도 몇 차례 본토인에 의한 아이누에 대한 핍박에 반발한 저항이 있었으나 모두 패하고, 메이지시 대 에조치라 불렸던 지금의 북해도로 명칭이 바뀌면서 일본 영토로 완전히 영입하였다. 이 후로도 북해도의 아이누인들을 구토인(旧土人)이라 칭하며 와진과 구분하여 불렀다. 이후 많은 차별속에서 자신들의 문화를 지키기 위한 노력들이 이어졌고 1997년에서야 ‘아이누문 화진흥법’에 의해 아이누의 문화를 존중하고 계승하려는 노력들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아이누민족박물관 http://www.ainu-museum.or.jp/nyumon/rekishibunka/index.html) 31) 류큐민족은, 메이지시대인 1872년 류큐번(영지)이 된 이후, 1879년 오키나와라는 명칭으 로 바뀌면서 류큐왕국은 종말을 맞이했다. 이를 ‘류큐처분’이라고 명명하고 있다. 제2차세계 대전이후, 샌프란시스코조약에 따라 미국의 시정하에 잠정적으로 있었으나, 1971년 반환협 정에 따라 일본에 반환되었다.(일본 외무성 http://www.mofa.go.jp/mofaj/gaiko/summit /ko_2000/outline/jp/okinawa/oki0302.html) 오키나와내에는 일본어와 함께 류큐어를 사용하 는 사람이 존재하고 있으며, 이들 중 소수지만 류큐의 독립을 희망하고 있으며 활동을 펼 치고 있는 단체도 존재한다.

32)志水宏吉 編著(2009)『エスニシティと教育』日本図書センタ;東京p.8

33)佐竹真明 編著(2011),『在日外国人と多文化共生─地域コミュニティの視点から』,明石 書店;東京p.28

른 사정으로 거주하고 있는 ‘화교’, ‘재일중국인’이라 불리는 이들과 함께 아울려 ‘올드카마’라고 칭한다. 특히 올드카마와 같은 경우, 일본에서의 장 기체재로 인해 일본인과 자신의 모국과의 관계속에서 일본인은 아니지만 일본인과 마찬가지로 여겨지는 애매한 상황에 처해 있다고 볼 수 있다. 게 다가 이들의 법적 지위 역시 일본의 패전이후로 여러번 바뀌게 되는 데, 포츠담선언수락에 따른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대일평화조약)이 발효되기 전까지 이들은 ‘외국인이기도 하면서, 일본인이기도 하다’는 위치였으나, 1947년에 「외국인등록령」에 의해 ‘당분간 이들을 외국인으로 본다’고 함 으로써 모든 참정권이 정지되었다. 이후 샌프란시스코조약이 발표되면서 구식민지출신자(대만출신 포함)는 ‘외국인’으로써 등록이 의무화되어 모든 자격이 박탈된다. 따라서 이들이 국적을 취득하기 위해서는 ‘지문등록 및 일본식 성명으로의 변경’등을 통한 귀화신청만이 가능했기 때문에 이에 대 한 비판과 반감으로 일본국적을 취득하는 것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생 겨나기도 했다.34) 이후 1965년 한일조약에 의해 구식민지출신 중 ‘대한민 국’에 한해 1945년 이전에 일본에 거주하고 있었던 한국인만이 신청에 따 라 ‘영주허가’를 받을 수 있는 대우조치가 이루어졌다. 이와 같이 일본 내 의 민족적 문제는 역사적인 배경부터 상당히 복잡한 양상을 띄고 있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1970년대까지는 일본의 거주하는 외국인의 대다수가 이들 ‘올드카마’였으 나, 1980년대부터 필리핀으로부터 들어온 여성노동자들이, 펍이나 클럽, 스 낵바등에서 일하기 시작하였고, ‘힘들고, 위험하고, 더러운(きつい、きけ ん、きたない)’이라는 앞 글자를 따서 3K라고 불리는 건설, 제조업직종의 노동자 부족으로 파키스탄, 이란, 방글라데시 등으로부터 남성노동자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또한 농촌의 결혼난으로 인해 국제결혼도 증가하면서 뉴카마라 불리는 이들의 수가 급증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에는 ‘출입국관 리와 난민인정법’의 개정으로 인해 특히 남미로부터 인구가 증가하였다. 뉴 카마의 체제가 장기화 되면서 영주자격을 취득하는 경우도 있는 반면, 일 34) 江原武一(2000), p.211

본에서는 출입국관리법에 따르면, 기간을 넘어 체재하는 초과체재자=자치 체에 외국인등록을 하지 않고 미등록자지만 장기체재하는 사람이라고 하는 데, 이들의 수도 늘어났다. 또한 일본계(역사적인 배경에 따라 어쩔 수 없 이 외국에서 태어난 사람들) 영주자들, 그들과 관련된 가족들까지 늘어나 면서 일본 사회는 복잡한 민족적, 문화적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복잡한 상황의 가장 큰 배경은 무엇보다 일본의 인구 문제(노령화 및 출생률 감소)에 따른 노동력의 확보를 위한 일본 내 수요 에 따른 외국인의 유입이라고 볼 수 있다.35)

즉, 외국인노동자를 비롯한 국제결혼, 그 외의 일본계 외국인 자녀의 귀국 등에 따른, 이들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지역생활에 있어서 문화적 배경의 차이로 인한 갈등과 문제들이 발생하면서 이에 대응해야 할 필요성이 발생 했다고 볼 수 있다.

(2) 민족 구성원에 따른 교육문제

일본에서 진행되고 있는 다문화교육의 대상으로써 ‘뉴카마’라고 불리는 1980년대 국제결혼 및 노동력 확보를 위해 유입된 대상들의 자녀들을 중심 으로 특히 ‘일본어교육이 필요한 아동’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앞서 일본의 민족적 구성내에는, 오키나와인(류큐민족), 북해도인(아이누), 그리 고 기존의 올드카마에, 일본인내에서도 천민이라는 신분계급의 잔재로 남 아있는 피차별부락민에 대한 문제까지 복잡한 양상을 띄고 있다는 점을 생 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일본 내에 증가하는 다양한 국가로부터의 이주민들 (뉴카마)에 대해 지역사회가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하면서, 정부차원에 서도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지만, 기존의 구성원으로써 소수로써의 차별적 대우를 받아온 이들에 대한 교육문제 역시 여전히 보이지 않게 지속되고 있으며, 이들에 대한 지원 역시 부족한 실정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눈에

35) 일본의 현재 취업인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国連의 보고서(Population Division 2000)에 따르면 , 향후 50년간 걸쳐 연간 약 60만명의 외국인노동자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松 尾知明, “日本における多文化教育の構築-教育のユニバーサルデザインに向けて-”, 松尾知明 編著(2013), 『多文化教育をデザインする-移民時代のモデル構築-』, 勁草書房:東京p.5

띄지 않기 때문에 (일본어라는 언어적인 문제가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이 들의 사회적응, 교육에 있어서의 소수자로써의 차별문제는 뉴카마보다 더 열악한 상황이라고까지 할 수 있다.

이들 가운 데 대표적으로 피차별부락민과 올드카마(재일 한국 조선인), 그 리고 아이누를 중심으로 교육에 있어서의 문제를 살펴고자 한다.

첫 번째, 봉건시대의 신분제도의 최하층에 속했던 피차별부락민들의 경우 는 메이지유신 때 법적으로 해방되었지만, 그들에 대한 편견과 차별은 현 재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이들은 서일본을 중심으로 부락민이라는 카테고 리화 되어 있으나 정확한 수는 알려져 있지 않다. 미취학, 장기결석, 중도 퇴학, 학업부진 등 이들은 교육집단에서의 아웃사이더로 취급되었다.36) 그 런 가운데, 1969년 동화대책사업특별조치법이 제정되어 물리적인 환경개선 이나 장학금, 가배교원(특별지원교사)의 배치 등으로 지원이 이루어졌다.

일반아동과의 학력격차는 좁혀지기 어려운 상황에, 어렵게 진학한 학생들 의 경우, 자신들과 같은 부락민을 위한 해방운동에 참여하기보다는,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지역에서 벗어나 생활하는 경우가 많았다.

두 번째, 올드카마에 해당되는 재일 한국 조선인의 경우에는 1947년 4월, 문부성이 학교교육국장통달에의해 '조선인아동의 취학의무에 관한 건'을 발표 당시만 하여도, 재일 한국․조선인의 자녀에 대한 취학의무를 명확히 하였다. 하지만, 1952년 4월 샌프란스시코강화조약에 의해 재일외국인들의 일본 국적이 상실되면서, 1953년 2월 초등행정국장통달에 의해 조선인 자 녀의 취학의무를 박탈하였고, 이들은 ‘외국인’으로써 어떤 교육적인 지원을 받을 수 없었다.37) 특히, 조선총련 등과 같은 민족내부에서 학교를 설립하 여 교육을 시키려는 움직임이 일어났지만, 독자의 학교 설립에 관하여 학 교교육법이 정하는 곳에 따라 도도부현감독청(都道府県監督廳 각 지자체의 대표관청)의 허가를 받아야만 한다는 원칙을 내세워 민족학교의 설립을 법

36) 志水宏吉, “マイノリティー グループと学校文化─システム内的要因による変化”, 志水宏 吉 編著『エスニシティと教育』日本図書センタ;東京(2009)p.153

37) 栗原 真孝(2010), “オールドカマーの子どもを対象とする教育政策に関する歴史的考察 : 大阪市教育委員会を事例として”, 早稲田大学大学院教育学研究科紀要 Vol 17 (2). p.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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