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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관계 진전을 보는 중국의 시각

Dalam dokumen 제17권 2호 2008 (Halaman 43-55)

Vision 3000: Denuclearization and Openness’

Ⅳ. 북미관계 진전을 보는 중국의 시각

될 수 있다는 계산에 따라 추구하게 된 상호 정책변화가 오늘날 북미관계의 변화 를 가능케 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한국의 역할 역시 간과 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한국정부는 6자회담이 교착상태에 빠지고 북미관계진전 의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에도 미국을 꾸준히 설득했다. 즉 BDA문제를 넘어서 비핵화, 북미관계 정상화, 한반도 평화체제 등을 놓고

‘빅딜’을 해보자는 이른바

‘포괄적 접근방안’을 끈질기게 강조함으로써 이에 대한 미국의 관심을 불러일으키

고 결국은 미국의 태도변화를 이끌어내는데 일조한 것이다.

예를 들어 대북정책의 전환을 가져온 ‘젤리코 구상’이 완성되는 과정에서 한국 정부는 백악관에 관리를 파견하여 평화체제구상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고 적극적 으로 한국의 입장을 반영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17 송민순 前외교부장관 역시 국 내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북핵문제 및 북미관계 진전 과정에서 한국정부의 숨은 역 할에 대하여 강조한 바 있다.18 이러한 한국정부의 노력은 이명박 정부 들어서도 지속되고 있는데 유명환 외교부장관 역시 “한국 정부가 북미관계 개선을 위해 북 한에 대해 공화당 부시 정권 하에서 진전을 이루도록 권유”하는 등 노력하고 있음 을 표명하였다.19 향후에도 북핵문제가 해결되고 북미관계가 완전히 정상화되기 까지는 우여곡절 속에 긴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 속에서도 한 국정부는 북한과 미국의 양자 이익이 만나는 전략적 공통점을 찾아내고 제시함으 로써 북미관계 진전의 추동력을 높이는데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

태에서 전략적 필요에 입각해 형성된 이해관계의 측면이 강하다는 것이다.20 최근 들어 북중관계가 정체상태에 머물거나 소원해지는 모습을 보이게 된 데에 는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고 볼 수 있다. 우선 탈냉전기 들어 기 본적으로 양국의 혁명세대가 사망하고 국가건설 노선의 차이가 확대되는 과정에 서 북중간 ‘인적 유대’와

‘이념적 연대’의 약화는 양국관계 변화를 가속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해 왔다. 또한 중국이 후진타오(胡錦濤)시기에 들어서면서 이데올 로기 중심에서 벗어나 양국관계를 ‘당대당관계’가 아닌 국가이익에 바탕을 둔 실 리중심의 ‘정상국가관계’로 변화를 시도해온 것 역시 양국관계가 소원해지는 요인 으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21 물론 이보다 앞서 1992년 8월 한국과 중국의 수교 는 양국관계가 소원해지는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으며 동아시아 국제정치의 측면 에서 중·미 전략적 관계의 진전과 파장 역시 북중관계 변화에 점점 더 중요한 요 인으로 작용하였다

.

그 결과 중국에서는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점진적으로 북한 에 대한 부담론이 증대되었으며 대북정책 재검토와 관련된 전략적 딜레마를 느끼 는 가운데 북한에 대한 인식의 다원화가 이루어졌다.22

그러나 최근 들어 북중관계가 급격히 소원해지는 데에는 역시 북한 핵문제가 핵심적인 요인으로 작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특히 2006년 10월 북한이 전격적으 로 실시한 핵실험은 조금씩 변화의 관성을 보이던 북중관계를 결정적으로 악화시 키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중국은 북한 핵문제가 불거진 이후 6자회담 의장국으 로서 적극적인 중재역할을 통해 ‘책임있는 강대국’으로서의 정체성을 강화하는 한 편 국제적인 영향력을 확대해 온 것이 사실이다.23 그러나 그 과정에서 중국의 입 지를 강화시켜 주었던 대북영향력은 지속적으로 의구심의 대상이 되었으며 중국

20이러한 관계를 잘 보여주는 최근의 글로는 이상숙, “데탕트 시기 북중관계의 비대칭갈등과 그 영향,” 󰡔한국정치학회보󰡕, 제42집 3호 (2008), pp. 439-456; 최명해, “1960년대 북한의 대중국 동맹딜레마와 계산된 모험주의,” 󰡔국제정치논총󰡕, 제48집 3호 (2008), pp. 119-147; 박종철, “북 중관계의 구조적 특징: 긴장된 동맹” (성균관대 동아시아지역연구소 북중관계전문가 집중토론 회 발제문, 2008.9.25) 참조.

21박두복, “중국의 대북한 영향력과 북핵 문제에 대한 중국의 역할,” 󰡔주요국제문제분석󰡕 (외교안 보연구원, 2005.7.25); 김흥규, “북한 핵실험과 중국의 대북외교” (한국국제정치학회연례학술회 의 발표문, 2006.12.3) 참조.

22중국의 대북 딜레마와 부담론에 관해서는 한석희, “6자회담과 중국의 딜레마,” 󰡔국제정치논총󰡕, 제45집 1호 (2005), pp. 175-199; 대북인식의 다원화에 관해서는 Andrew Scobell and Michael R. Chambers, “The Fallout of a Nuclear North Korea,” Current History, Vol. 104, No. 683 (September 2005), pp. 292-293 참조.

23신상진, “중국의 북핵 6자회담 전략: 중재역할을 통한 영향력 강화,” 󰡔국가전략󰡕, 제11권 2호 (2005), pp. 29-54; 林利民, “朝核危機管理與中國的外交抉擇,” 󰡔現代國際關係󰡕, 2006年 第8期, pp. 36-38.

은 북한에 대한 부담론이 증대되어 왔다. 이런 와중에 북한의 핵실험은 국제사회 에서 중국의 ‘체면(面子)’을 여지없이 구겨버리는 결과를 낳았으며 전례 없이 양 국관계를 악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돌아보건대 북한 핵실험직후 중국정부는 매우 예외적으로 북한에 대한 불쾌감 과 배신감을 직접 토로하였다. 즉 중국정부는 외교부 대변인을 통해 “북한이 국제 사회의 광범위한 반대를 무시한 채 제멋대로(悍然) 핵실험을 했으며 중국정부는 이에 대해 단호히 반대 한다”고 강력하게 비난한 바 있다.24 뿐만 아니라 중국은 유엔(UN)안보리의 대북제재 결의안(1718호)에도 찬성함으로써 과거와는 확연히 다른 대북태도를 취하였다. 북한 역시 중국의 이러한 태도에 큰 충격을 받았을 뿐 아니라 양국관계는 한동안 소원해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핵실험 이후 6자회담에서 발표된

‘2·13합의’는 북미관계 진전 뿐 아니라

북중관계의 회복에도 하나의 기점으로 작용한 측면이 있다. ‘2·13합의’가 발표되 고 얼마 지나지 않은 2007년 3월초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이례적으로 평양주재 중 국대사관을 전격 방문한 바 있다. 김정일 위원장의 중국대사관 방문은 2001년 7월 이후 처음 있는 일로서 그의 이례적 방문은 소원해진 양국관계를 복원하려는 의 도로 풀이되었다. 그 결과 3월 하순에는 안영기 인민무력부 외사국장을 단장으로 하는 북한 군사대표단이 중국을 방문했으며 4월에는 중국의 류홍차이(劉洪才) 대 외연락부 부부장을 단장으로 하는 중국공산당 대표단이 방북하는 등 양국관계는

‘2·13합의’이후 전통적 우호관계 회복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북중 양국은 이미 북한 핵실험을 전후한 과정에서 서로 가 더 이상 “혈맹”을 내세우던 과거의 관계로 돌아갈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깨달았 다고 볼 수 있다. 나아가 북한은 더 이상 중국을 ‘중립적인’ 존재로 여기지 않게 되 었으며 이는 북중관계를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고 하겠다.25 실제로 북한은 ‘2·13합의’를 전후하여 북미관계 개선이 추진되는 과정에서 철저하게 중국 을 소외시키는 듯한 양상을 보여 왔다. 예를 들어 2007년 1월 북한은 미국과의 베를 린 접촉 이후 중국에 대해 구체적인 내용을 설명하는데 소극적이었을 뿐 아니라 같 은 해 3월 힐 차관보의 초청으로 방미한 김계관은 뉴욕 회담에서 “중국은 우리를 너무 이용만 하려 한다

”고 하면서 “중국은 우리에게 영향력이 없다.

미국은 핵문제

24중국외교부는 북한의 핵실험 발표 2시간 만에 이에 대한 중국정부의 입장과 태도를 밝히는 성명 을 발표했으며 성명 전문은 중국외교부 홈페이지를 참조. <http://www.fmprc.gov.cn/chn/

xwfw/fyrth/t275346.htm> (검색일: 2006.10.9).

25박병광, “북한 핵실험과 북-중관계” (2006 한국정치학회 연례학술회의 발표문, 2006.12.7).

해결을 위해 중국에 너무 기대하지 말라

”고 발언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26 이는 북한이 중국에 대해 가지는 전략적 인식의 단면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마치 이를 입증이라도 하듯 북한 판문점 대표부는 2007년 7월 13일 “북

·유엔간 한반도 평화문제를 논의하자”는 주장을 펼침으로써 한반도 평화체제 구

축과정에서 중국을 배제하려는 의도를 표출한 바 있다. 뿐만 아니라 2007년

10월

개최된 ‘남북정상회담’에서 발표된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은 종전 선언을 위한 정상회담이 성사될 경우 중국이 배제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담음으 로써 중국의 의혹과 불안을 증폭시키는 결과를 낳았다.27 이와 같은 북중관계의 흐 름 속에서 북한이 북미관계 개선 과정과 내용에 관하여 중국에게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하기보다 오히려 소극적 자세를 취하였을 것이라는 점은 충분히 짐작이 가고도 남으며 일부 중국의 한반도 전문가들은 이에 대한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다.28

한편 흥미로운 것은 2008년 들어서 핵 프로그램 신고문제 및 검증문제를 놓고 북미간에 갈등이 지속되면서 북한은 다시금 중국에 대해 유화적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2008년 3월 티베트에서 발생한

反중국시위 당시 중국정부의

강경진압에 대해 세계 각국이 우려와 경계의 목소리를 높인데 반해 북한은 거의 유일하게 중국의 입장을 지지한 바 있다. 또한 티베트사태의 여파로 베이징(北京) 올림픽 성화 봉송이 국제적 반발과 비난여론에 직면하였음에도 북한에서는 성화 봉송 과정이 전국에 중계되면서 축제적인 분위기를 연출한 바 있다. 이에 화답하 여 중국 후진타오(胡錦濤) 주석은 류샤오밍(劉曉明) 북한주재 중국대사를 통해 김정일 위원장에게 “구두친서와 따뜻한 인사”를 전달하였다.29 또한 2008년 6월 중순에는 후진타오 주석의 뒤를 이을 유력한 후계자로 거명되고 있는 시진핑(習

近平)

부주석이 취임 이후 첫 해외 순방국으로 북한을 방문하여 김정일 국방위원 장과 회담하는 등 양국간 친선관계 회복을 대내외에 과시하였다.30

26“김계관, 힐에게 핵시설-핵무기 모두 폭발시켜 없앨테니 곧바로 수교하자,” <http://www.

viewsnnews.com/article/view.jsp?code=NOD&sch_key=key&sch_word=장성민&seq=

13546> (검색일: 2007.3.21).

27중국은 남북정상회담 선언문 제4항에서 표현된 종전선언 관련 3자의 범위가 중국을 배제하려는 것으로 이해하고 한반도 평화체제 전환과정에서 중국이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입장 을 강조한 바 있다. “中, 정전협정 당사국 빼고 무슨 평화논의?,” 󰡔조선일보󰡕, 2007년 10월 8일.

28上海國際問題硏究所 및 中國現代國際關係硏究院의 전문가 인터뷰 (2007년 9월 1일; 2007년

10월 7일).

29󰡔조선중앙방송󰡕, 2008년 5월 6일.

30다른 한편으로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부주석의 평양방문은 이명박 정부 등장 이후 한미관계 강화에 대응하여 남북한관계의 균형을 유지하려는 중국의 의도가 담긴 것으로 볼 수도 있다.

Dalam dokumen 제17권 2호 2008 (Halaman 43-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