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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외교의 비교

Dalam dokumen 제17권 2호 2008 (Halaman 71-85)

China’s Standpoint on the North Korea-America Relationship Improvement After February 13 Agreement

Ⅳ. 자주외교의 비교

1.

북한의 자주외교 형성과정

1950년대 후반 중소분쟁에서 중립노선을 취하던 북한은 1960년대 초 사회주의

진영의 분열상황에 대하여 “1960년대 들어와서 일부 사회주의나라들 사이에 발생 한 의견상이는 사상리론적 범위를 벗어나 국가관계에까지 영향을 미치면서 사회 주의나라들과 국제공산주의운동의 통일단결에 저애를 주었다”고 진단하였다. 북 한은 “전체 사회주의나라들을 옹호한다는 것은 … (중략) … 어느 한 개의 사회주 의국가나 혹은 일부 국가들만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회주의나라들을 다 같이 옹호한다는 것33

”을 의미한다고 설명하였다.

북한은 사회주의권 분열에 대한 자국에 입장을 “형제 당, 형제 나라들 사이의 통일단결을 이룩하는 전제로 간주하 고 이에 기초하여 단결·협조하며 국제적 연대성을 강화하면서 자주성을 견지하는 일관한 방침을 더욱 철저히 관철해 나갔다”고 주장하였다.

1961년 조선로동당 제4차 당대회에 소련과 중국 대표가 모두 참석하였는데,

기 자국의 입장을 밝혔다. 소련의 코즈로프(Frol L. Kozlov)는 우주선 스푸트니 크(Sputnik)의 발사성공을 자랑하고, 서독과 관계 정상화를 이루는 등 평화공존 정책의 성과를 설명하였다. 중국에서는 소련과 이념 논쟁에 참여하였던 덩샤오핑 이 평화공존론을 반박하였다. 그는 평화공존의 이론을 이해할 수 있으나, 아시아 에는 타이완 문제, 한반도 및 베트남 문제가 있고, 라오스와 캄보디아 문제가 있기 때문에 이를 아시아에 적용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미국과 일본의 안보 협 력은 지역 불안정의 근본 원인이라고 하였다.34

1961년까지 북한은 중립적인 자세를 취하며 1961년 7월에 소련 및 중국과 각각

체결한 우호협력조약을 체결하였다. 1961년

6월과 7월 김일성은 소련과 중국을

방문하고 ‘조·소 우호협조 및 호상원조 조약’과 ‘조·중 우호협조 및 호상원조 조약’

33박태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외관계사 2󰡕 (평양: 사회과학출판사, 1985), p. 8.

34서대숙, 󰡔현대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과 김정일󰡕 (서울: 을유문화사, 2000), p. 99.

을 각각 체결하였다. 그해 7월 10일부터 15일까지의 김일성을 단장으로 하는 북한 의 당 및 정부 대표단과 중국 당 및 정부 대표단은 양국간의 우호, 협조 및 원조관 계를 공고히 발전시키기 위한 문제와 당시 주요 국제문제에 대해 회담하였다. 이 회담 결과 북한과 중국은 ‘조·중 우호협조 및 호상원조조약’을 체결하였다.35 중국 및 소련과 유사한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양국 모두로부터 안보지원을 보장받고, 양 국이 충돌할 경우 북한이 개입하지 않을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그러나 1961∼1962년 사이에 쿠바 미사일 사태와 라오스 사태에 대한 소련의 대응은 북한이 친중노선을 취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1962년부터 북한의 대중국 관계는 더욱 강화되었다. 1962년

3월 소련의 군비축소 제안에 분명히 반대하는

논조를 표방하는 중국의 보도기사들을 강조함으로써 더욱 명확해졌다.36 북한으 로서는 실질적으로 중국의 이념 노선에 치우쳤다. 한반도에서 미제국주의 세력을 몰아내고 민족 통일을 이루어야 하는 입장에 있던 북한은 ‘제국주의와 민족주의’

의 모순을 주요 모순으로 상정하는 중국의 노선과 일치하였다.

중국이 1963년 3월 30일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서한에 대하여 6월 14일에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총노선에 대한 제안’이라는 반론을 공표하며 소련과의 전면

적인 이념투쟁을 전개하였다

.

당시 북한은 1963년 6월 최용건의 중국 방문시 양국 은 “현대 수정주의를 반대함과 동시에 교조주의 역시 반대해야 한다”는 데에 동의 하고, “사회주의와 국제공산주의 운동에 존재하는 분열은 내부 평등 협상의 방법 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37

이후 조선로동당은

1963년 10월 28일자 󰡔로동신문󰡕의 사설 “사회주의진영을

옹호하자”에서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분열 원인을

‘현대수정주의’라고 지적하며,

소련을 공격하였다. 그리고 소련이 경제 및 군사 원조를 북한에 대한 정치적 압력 의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다고 소련을 비난하였다.38 이후 1964년 6월 평양에서 개 최된 제2차 국제아시아경제회의에서 북한은 대소 비난을 더욱 강화했으며 중국과 북한은 더욱 협력을 강화하였다. 이에 맞서 소련은 이 회의가 아시아 여러 나라가 소련식의 경제 발전보다 중국식의 경제 발전을 따르라는 중국의 주장을 위한 자 리였다고 혹평하였다. 또한 중국이 아시아 여러 나라에 대한 소련의 경제 원조가

35󰡔조선중앙년감 1962󰡕 (평양: 조선중앙통신사, 1962), p. 160.

36“중국 공산당이 조선 노동당의 정책에 미치는 영향(1963년 4월 8일),” 󰡔독일지역 북한기밀 문서집󰡕

(서울: 선인, 2006), pp. 56-57.

37“刘少奇主席和崔庸健委员长联合声明,” 󰡔崔庸健委员长访问中国󰡕 (北京: 人民出版社,1963),

p. 10.

38󰡔로동신문󰡕, 1963년 10월 28일.

그들의 주권을 침해하는 것이라는 정치 선동을 했다고 소련 공산당 기관지 󰡔프라 우다󰡕를 통해 중국과 북한을 동시에 공격하였다.39

1965년 당창건 20주년 기념 연설에서는 수정주의를 겨냥한 비판을 주로 하면서

제국주의와의 평화공존이라는 환상을 퍼뜨리는 것을 가장 큰 폐해로 꼽았다. 또한

‘아시아경제토론회’를 개최하면서 ‘자립적민족경제 로선’을 강화한 이후 이를 비난

한 소련 수정주의에 대한 비판이 주를 이루었다.40 북한의 이러한 친중노선은 소 련의 압력을 수반함으로써 북한에 대한 소련의 원조를 단절시키고 말았다.

이후 1966년 8월 12일자 󰡔로동신문󰡕 논설에서 ‘자주성을 옹호하자’에서 대외관 계에서의 자주적 입장 견지를 주창하였고, 그해 10월 대외관계에서 자주성을 공식 적으로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김일성은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현정세는 우리들로 하여금 자주성과 독자성이 없이 남이 하는 대로 따라간다면 로선과 정책에서 원 칙성과 일관성을 가질 수 없게 될 것입니다”41라고 밝혀 자주노선을 견지해야 하 는 이유를 강조하였다.42

특히 이즈음에 베트남전쟁에 대해 북한은 중국공산당과 소련공산당 사이에 명 확한 분계선을 획정해야만 한다는 중국의 제의를 거부하였다. 오히려 북한은 북베 트남 지원을 위한 소련의 연합전선결성제의를 중국이 수락해줄 것을 촉구하고 나 섰다. 북한은 미제국주의와의 투쟁에서 요구되어지는 ‘단결된 행동’은 수정주의에 대한 투쟁과 모순되는 것이 아니며, 공산당들 간의 견해 차이는 국제적 반제공동 투쟁과 연합전선결성을 위해 잠시 동안 유보되어져야 한다고 선언하였다.43 결국 북한은 연합전선결성에 관한 중국의 비타협적인 태도와 중국의 이론적 경직성에 대해 비판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북한은 베트남 문제에서 중국과 소련의 분열 상황이 전체 국제 공산주 의 진영의 협력을 약화시키기 때문에 피압박민족의 혁명투쟁을 효과적으로 지원 하지 못한다고 판단하였다. 제국주의 세력에 대한 혁명 역량을 확대시키기 위해서 는 무엇보다도 중국과 소련의 지원이 절실한 상황에서 사회주의 내부 분열로 말 미암아 제국주의 투쟁이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을 우려하였을 것이다. 미국이 베트 남의 상황을 아시아 사회주의 전체의 향방을 가늠하게 했던 것만큼 베트남의 미

39서대숙, 󰡔현대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과 김정일󰡕, pp. 104-105.

40“조선로동당창건 스무 경축대회에서 하신 보고(1965. 10. 10),” 󰡔조선중앙년감 1966-1967󰡕 (평 양: 조선중앙통신사, 1967), p. 12.

41󰡔김일성저작선집 4권󰡕 (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68), pp. 334-335.

42정규섭, 󰡔북한외교의 어제와 오늘󰡕, pp. 87-88.

43정진위, 󰡔북방삼각관계󰡕 (서울: 법문사, 1985), pp. 143-144.

래는 같은 아시아의 사회주의 국가인 북한에게 중요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북한 은 국제 공산주의 진영의 분열이 자국의 안보를 보장해줄 수 없음을 판단하고, 국 방과 경제 병진노선을 강화하고 대외적으로 ‘자주노선’을 선택하였다.44

2.

북베트남의 자주외교 형성과정

1956년 중반 소련이 ‘두개의 베트남’이라는 개념을 유엔(UN)에서 사용한 데 대

해 북베트남은 반발하였다. 이를 수정하기 위해 1957년 7월 호치민과 레두안((Le

Duan)은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남부에서 무장투쟁 수행에 대한 계획을 협의하였다.

당시까지 북베트남은 중소분쟁에서 중립적 입장을 나타내며 교조주의와 수정 주의에 대해 모두 비판하면서 자국의 실정에 맞는 사회주의 건설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호치민은 1957년 한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다른 사회주의 국가의 경 험을 “기계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경계하며 교조주의와 수정주의의 극복을 강 조하였다.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지금의 단계에서 우리는 형제국가들의 풍부한 경험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기계적으로 우리나라에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 면 우리나라는 나름대로의 특수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형제국가의 경 험을 배우면서 자국의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는 것은 중대한 오류, 즉 교조주 의의 오류입니다. 그러나 자국의 특수성에 대한 지나친 강조와, 형제국가의 위 대한 기본적 경험이 갖는 보편적 가치에 대한 부정은 심각한 수정주의의 오류 를 초래합니다. (중략) 우리는 교조주의를 극복해야 하는 동시에 수정주의에 대해서도 경계해야 합니다.45

이러한 호치민의 논의는 중국과 소련의 영향력을 모두 경계하며 북베트남에 적 합한 혁명을 찾아야 한다는 논리이다. 이때부터 북베트남은 중소분쟁에서 중립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리고 북베트남은 1959년부터 남베트남 혁명에 대한 확고한 입장을 표명하였 다. 그해 1월 베트남 당 중앙위 제15차 확대회의에서 남베트남의 연립 민주 정부 를 형성하여 민족의 독립과 민주적인 자유를 수호하고 인민의 생활을 향상시키며

44이상숙, “1960년대 중반 북한-중국의 갈등과 북한의 자주노선,” 󰡔북한학연구󰡕, 제3권 2호 (2007), pp. 151-161 참조.

45호치민, “우옌 아이 꾸옥 학교의 첫 번째 이론과정 개설에 즈음한 연설,” 버나드 폴 편, 󰡔호치민 의 베트남혁명론󰡕, p. 338.

Dalam dokumen 제17권 2호 2008 (Halaman 71-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