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na’s Standpoint on the North Korea-America Relationship Improvement After February 13 Agreement
Ⅱ. 자주외교의 지정학적·역사적 공통성 1. 지정학적 환경
한반도와 인도차이나 반도는 아시아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을 연결시키기도 하 고 분리시키기도 하는 대표적 반도이다. 지리학적으로 반도는 대륙과 해양, 해양 과 해양세력들 간에 분리 및 결합의 기능을 수행하는 위치에 있다.6 반도는 대륙 과 해양을 결합시키는 완충지역이면서, 대륙과 해양세력의 충돌지역이기도 하다.
두 반도는 지정학적 위치에 따른 ‘득(得)’과 ‘실(失)’을 모두 가지고 있는 지역이
4Han S. Park and Kyung A. Park, “Ideology and Security: Self-Reliance in China and North Korea,” Edward E. Azar & Chung-in Moon, National Security in the Third World (Aldershot: Gower Publisher, 1988), pp. 107-109.
5김기정, “외교정책이론과 외교사 연구,” 김달중 편, 외교정책의 이론과 이해 (서울: 오름, 1998), pp. 77-78.
6김한식, 동남아시아 (파주: 한국학술정보, 2005), pp. 19-20.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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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세력이 만나는 접점지역으로서 대륙문화를 해양으로, 해양문화를 대륙으로 전파하는 역할을 해왔다. 중국대륙의 선진문물을 수용하여 주변 국가의 전달함으 로써 문화 전파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한반도는 중국의 문물을 수용하여 해양세력
(일본)에 전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베트남은 중국의 문물을 동남아시아 국가에 전파하였다.
주목할 것은 두 지역의 지형이 남북으로 길기 때문에 남부와 북부의 문화가 상 당한 차이를 보이는데, 두 지역 모두 중국과 인접한 북부지역이 중국 문화에 영향 을 많이 받았다. 분단 이후 북부에 사회주의 정권이 수립되고 그 정권이 중국의 혁명에 영향을 받은 것 역시 이러한 지리적 특성에 기인한다. 이러한 특성은 베트 남에서 더욱 두드러지는데, 남부지역은 동남아시아 지역 문화와 유사한 반면 북부 지역은 중국 문화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
한편 대륙과 해양을 연결하는 반도인 두 지역은 대륙국가가 해양으로 진출하기 위해서 또는 해양국가가 대륙으로 진출하기 위해서 통과해야 하는 교두보의 역할 을 하며, 전략상의 요충지로 간주되어왔다. 반도가 가지는 전략적 중요성 때문에 고대 시기부터 끊임없는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의 침략과 약탈을 경험해야 했고 해 양세력과 대륙세력이 충돌하는 장이 되었다. 두 지역은 오랜 기간에 걸쳐 이웃 국 가들의 관심의 대상이었으며 침략에 목표가 되었다.
두 지역에 있어서 중국 대륙은 북방 이민족의 통로였으며, 대륙으로부터의 침략 에 항상 노출되어 있었다. 중국은 통일 왕조를 이루기 이전 북방민족들과 빈번한 무력 충돌에 직면하였다. 중국 대륙의 통일 왕조가 등장한 이후부터는 이 통일 왕 조의 세력이 강성하면 상대적으로 두 지역의 안보가 안정적이었고, 통일 왕조의 세력이 약하여 이민족이 대륙을 위협하면 지역 안보도 불안정해지는 구조를 이루 었다. 즉, 대륙의 안보 상황과 두 지역의 안보는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이러 한 지리적 특성으로 인하여 한국과 베트남은 항상 외부강국의 침략에 노출되어 있어 독립항쟁에 대한 욕구가 높았다.
2.
강한 민족적 자부심한국과 베트남은 민족적 자부심이 강한 공통성이 있다. 한반도는 단일민족으로 서 북부를 제외하고는 바다로 둘러싸여 있어 다른 이민족이 정착하기가 용이하지 않았다. 베트남은 다민족국가이지만 국민의 대다수를 이루는 경(京, Kinh)민족이 전체 국민의 88%를 차지하고 있다. 경민족은 북쪽에 중국의 황하와 베트남의 메
콩강
(Red River)
주위에 자리잡고 문화적 중심을 차지하여 비옥하고 농토가 풍부 한 지역에 밀집되어 거주하여 베트남의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반면 소수민족은 산간지역이나 국경지역에 흩어져 살기 때문에 국가의 중심부는 대부분 경민족으 로 구성된다.7 냉전 시기 분단 이후 양국은 민족국가의 복원이라는 열망이 컸으며 이것은 통일의 염원으로 이어졌다.8이들 양국의 높은 민족적 자부심의 원인은 선진 중국문화의 빠른 수용과 그로 인한 문화적 자부심을 그 원인으로 들 수 있다. 페어뱅크(Fairbank)에 따르면 고 대 중국적 세계질서를 중화권(中華圈: Sinic Zone), 내륙아시아권, 외부권의 세 가지로 구분한다.9 그 중에서 지리적으로도 가장 근접하고 문화적으로도 동질적 인 조공국가들을 포함하는 중화권에는 한국, 베트남, 류큐10가 여기에 속했으며, 일본은 몇 차례 일시적으로 이 범주에 속할 때가 있었다. 중화권은 중국과 가장 많은 교류가 있어 중국과 가장 유사한 문화를 공유한 지역이다.
가장 중요한 공통성은 유교적 도덕을 기본으로 하는 사회 질서의 유지와 과거 제를 통한 유교 엘리트의 양성이다. 유교 엘리트들은 중국, 한국, 베트남의 사회 내에서 유교적 질서를 지탱하는 신분제를 유지하였다. 신분제 유지의 중요한 수단 이 과거제도였고 이를 통하여 유교 질서는 재생산되었다.
그리고 베트남이나 한국과 같은 주변국들이 중국 조공 무역체제라는 커다란 틀 안에 그들 자신의 또 다른 소규모 조공체제를 만들었다. 남북조 시대의 고구려가 남북 양조로부터 모두 책봉을 받으며, 자국을 천제의 아들인 천손국(天孫國)으로 상정하고 신라를 ‘동이(東夷)’로 간주한 사례가 있다. 또한 베트남 역시 10세기 이 후 중국과의 조공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참파왕조에 대하여 일찍부터 조공관계를 강요했던 것은 또 하나의 전형적인 소중화의 세계를 형성한 사례이다.
북베트남과 북한의 민족적 자부심은 제국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제국주의에 대 항하는 저항의식으로 표현되었고, 독립 욕구를 강화시켰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7Brantly Womack, China and Vietnam: The Politics of Asymmetry (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6), p. 11.
8호치민은 “우리 민족은 하나요 나라도 하나입니다. 우리 인민은 반드시 모든 어려움들을 극복하 고 민족 재통일을 완수해서 북부와 남부를 다시 하나로 만들 것입니다”라고 민족 통일의 당위성을 표현하였다. 호치민, “베트남노동당 제3차 전국대회 개막연설,” 버나드 폴 편, 호찌민의 베트남혁 명론 (서울: 거름, 1987), p. 364.
9존 K. 페어뱅크· 에드윈 O. 라이샤워· 앨버트 M. 크레이그, 김한규·전용만 옮김, 동양문화사 (상) (서울: 을유문화사, 1991), pp. 325-328.
10일본 오키나와현에 있던 옛 왕국으로, 류큐는 현재 오키나와[沖繩]의 옛 지명이다. 1879년에 다 시 일본의 침략을 받아 450년간의 왕조를 끝내고 오키나와현이 되었다.
민족국가 수립과정에서도 이러한 저항의식은 강대국에 의한 분단에 대해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국가 형성 이후 이러한 저항의식은 대외관계에서 자율성을 확보하 려는 노력으로 나타났다.
3.
외국 지배 경험고대 아시아의 질서를 주도했던 중국은 주변 국가들에 대해 장기간의 지배 경 험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중 인도차이나 반도와 한반도의 국가들은 가장 저항 의식이 높은 민족들이었다. 618년 이후 당(唐)왕조는 주변의 민족들에 대해 대체 로 자치를 허용하였지만, 상당히 강력한 몇몇 민족에 대하여는 자치에 맡길 수 없 어 도호부를 설치하고 이들을 감시하였다. 주요 도호부로서 고구려에 두어진 안동 도호부(安東都護府)를 비롯한 여섯 개가 존재하였는데, 안남(An Nam: 安南)에 있었던 안남도호부
(安南都護府)는 이 중의 하나였다.
11 이처럼 한국과 베트남은 중국 대륙의 민족들로부터 피지배 경험을 가지고 있다.또한 근대 이후 제국주의 시대에 양국은 모두 제국주의의 식민지 국가가 되었 다. 이러한 경험은 더욱 뚜렷하게 각인되어 제국주의에 대한 투쟁의지가 그 어느 국가보다 높게 되었다. 한반도의 식민지배는 서양의 문물로 무장한 일본이었다.
1876년 강화도 조약과 ‘한성조약’
이후 일본은 한반도를 식민지배하면서 대륙 진출을 위한 교두보로 삼았다. 1910년 8월 22일 합병조약의 체결을 강행함으로써 일제의 한국식민화 침략은 완성되었다.
그러나 36년간의 일본의 식민지배는 한국인들에게 뼈아픈 시련의 역사였다. 한 국의 사상을 통제하기 위해 한국 역사와 문학 수업을 금하게 하였다. 한국의 민족 적 전통을 말살하려는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 때문에 한국 독립정신 은 성장할 수 있었다. 그것은 1919년 3·1운동처럼 공공연한 폭력 행동으로 폭발되 기도 했으며 이런 사태가 빈번히 일어났다.12 이러한 식민지배 시기 동안 일어난 한국인들의 투쟁은 독립의식을 고취시켰고 민족의 자부심을 강조하였다.
베트남의 경우 16세기 말과 17세기 초, 서방 선교사들이 베트남에 들어왔고 베 트남에 대한 식민 지배를 시작하였다. 1860년 9월 프랑스 군대는 베트남군을 격파 하고 포위망을 풀었다. 1862년 베트남 응우옌(阮)왕조가 제1차 ‘사이공조약’에 서
11이러한 도호부의 설치는 중국이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지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는데 이 지역들은 저항이 강한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12맥마흔 볼, 손중기 역, 아시아의 민족주의와 공산주의 (서울: 학문과 사상사, 1981), p. 69.
명하면서 베트남 서부의 빈 롱, 안 쟝, 하띠엔 등의 3성을 점령하였다. 1874년 프 랑스와 베트남의 응우옌 왕조가 이른바 ‘제2차 사이공 조약’이 체결되면서 코친차 이나의 6성에 대한 프랑스의 주권을 인정해주었다.
이후 1883년 8월 프랑스 판무관 아르망(Francois Jules Harmand)과 응우옌 왕조의 쩐딘뚝(Tran Dinh Tuc, 陳廷肅)및 응우옌 쫑 헙(Nguyen Trong Hop,
阮仲合)
사이에 체결된 ‘아르망 조약’으로 베트남은 프랑스의 보호국임을 인정하고 대외관계는 프랑스를 통해서만 하기로 약속하였다. 1885년 2월 프랑스가 1만 여 군대를 베트남에 보내어 공격을 하였고, 그해 6월 9일 리홍장과 프랑스 공사가
‘중국-프랑스간 베트남조약(中法会订越南条约)’에 서명함에 따라 베트남에서 프
랑스 식민 통치가 시작되었다.13곧 이은 일본의 베트남 진출은 베트남의 오랜 식민지배 기간을 연장시켰다. 동 남아시아에서 일본이 점차적으로 수세에 몰리게 되면서 일본이 점령하고 있던 동 남아시아와 일본 본토가 격리되었다. 1945년 3월 일본은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 행정부를 강제로 제거해 버리고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에 각기 군주를 중심으 로 한 준독립 정권을 세웠다. 이러한 일본의 노력은 베트남에서 민족주의적 열망 을 더욱 뿜어내도록 강화시켰다.
이와 같이 두 지역의 오랜 외국지배 경험은 향후 대외정책에 영향을 주게 된다.
제국주의의 식민지배는 제국주의에 대한 강한 저항의식을 높였다. 북한과 북베트 남은 서양 및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사회주의자들과 협력을 강화하면서 중국과 소련 사회주의의 혁명과정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러한 피지배 경험은 자본주의 세력을 제국주의로 상정하고 완전한 통일을 위해 제국주의에 대한 투쟁 을 최우선하는 대외노선을 취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중소분쟁 시기 중국과 소련 의 제국주의 투쟁에 대한 입장은 중소 양국에 대한 비판과 지지를 선택하는 중요 한 요인이었다.
4.
정치적 통합 추구북한의 경우 한반도 전체의 사회주의를 목표했던 한국전쟁이 분단으로 끝나자 북한 지도부에게는 전후복구를 통한 경제 재건과 당내 통합이 우선적 과제로 부 과되었다. 김일성은 전쟁 실패의 책임을 다른 지도자들에게 돌리기 위해 전쟁과정
13유인선, 새로 쓴 베트남의 역사 (서울: 이산, 2002), pp. 287-297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