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sion 3000: Denuclearization and Openness’
Ⅱ. 북미관계 진전의 내용과 흐름
미국 부시 행정부 등장 이후 북미관계는 오랫동안 깊어가는 불신감 속에서 팽 팽한 적대적 대립상태를 유지해 왔다. 부시 미국 대통령은 등장 초기부터 클린턴 시기에 이루어진 ‘제네바 합의’를 부정했으며 2002년 1월 연두교서에서 북한을 이 란, 이라크와 더불어 ‘악의 축(axis of evil)’으로 규정했다. 그리고 2003년 1월 발 표한 연두교서에서는 북한을 ‘무법정권(outlaw regime)’으로 지칭했으며 2004년 재선에 성공한 뒤에도 여전히 북한을
‘폭정의 전초기지(outpost of tyranny)’로
규정하였다. 나아가 미국은 북한의 정권교체(regime change)를 거론하는 등 대 북 압박위주의 ‘강압외교’를 추진해왔다.6 특히 북한의 핵실험은 미국의 강압외교5‘전략적 삼각관계’에 관한 이론적 논의 및 그것의 적용에 관해서는 서보혁, “탈냉전기 한반도 안
보질서 변화에 관한 연구: 남·북·미 전략적 삼각관계를 중심으로,” 국가전략, 제14권 2호 (2008), pp. 63-85; 최운도, “미·중·일 삼각관계와 그 역학에 관한 시론,” 한국정치학회보. 37집 3호 (2003), pp. 175-195; Lowell Dittmer, “The Strategic Triangle: An Elementary Game- Theoretical Analysis,” World Politics, Vol. 33, No. 4 (July 1981), pp. 485-515를 참조.
에 결정적인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한편 북한은 미국의 비난과 압박정책에 강한 반감을 드러내며 저항해 왔다. 북 한은 미국의 강압외교에 대응해 부시를 “불망나니”, “도덕적 미숙아”라고 맞받아 치면서 “애당초 상대할 대상이 못 된다”고 규정하였다.7또한 북미관계의 악화 속 에서 북한은 6자회담 불참 및 ‘핵무기 보유선언’과 ‘미사일 발사실험’ 등으로 한반 도의 불안을 고조시켰으며 2006년 10월에는 전격적으로 ‘핵실험
’을 단행하기도 했
다.
즉 북한은 미국을 강력하게 규탄하는 자극적 성명과 이를 과시하기 위한 일련 의 행동으로 이어지는 ‘벼랑끝 전술’을 채택해 왔다. 따라서 부시 행정부 등장 이 후 북미관계는 대립과 불신을 지속했으며 현실적으로 양국관계 회복과 북핵문제 해결은 기대하기 어려운 실정이었다.그러나 이처럼 서로를 비난하고 불신하던 북미관계는 아이러니하게도 북한 핵 실험 이후 오히려 괄목할만한 진전을 보이게 되었다. 더욱이 흥미로운 것은 양국 관계 개선을 위해 먼저 손을 내민 것이 미국이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미국은 북 한이 줄곧 요구하던 양자대화를 받아들여 2007년 1월 6자회담장 바깥인 베를린에 서 크리스토퍼 힐과 김계관의 양자접촉을 수용하였기 때문이다. 미국은 “6자회담 틀 내에서만 북한과 양자대화를 할 수 있다”는 원칙을 깨고 사전에 북미간 합의를 토대로 6자회담 내에서 이행 로드맵을 확정하는 방식을 채택함으로써 북핵문제와 북미관계 진전의 돌파구를 열었다. 베를린 접촉을 통해 미국은 북한이 줄기차게 요구하던 ‘BDA 해결카드’를 제시하였으며 북한은 영변 핵시설을 폐쇄하는 비핵 화 1단계 구상에 합의했다. 북미 양자접촉을 통한 거래(deal)는 결국 ‘9·19공동성 명’ 이행의 초기조치를 담은
‘2·13합의’를 탄생시키는 모체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2007년 ‘2·13합의’ 직후 북미관계 진전은 예상처럼 순조롭지 못했다. 중
국은행
(中國銀行)이 돈세탁 은행으로 낙인찍힌 방코델타아시아(BDA)의 북측 자
금을 송금받을 수 없다고 버텼기 때문이다. 이는 북한과 미국 모두 예기치 못한 것으로서 특히 북한의 경우 내심 중국에 대한 실망과 불신을 가중시키는 요인으 로 작용하였다. 그러나 BDA 문제는 이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북한과 미국 으로 하여금 상호신뢰와 인내의 토대를 쌓는 계기로 작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특
6미국의 대북 강압외교에 관해서는 신성호, “북핵과 강압외교,” 하영선 편, 북핵위기와 한반도 평화(서울: 동아시아연구원, 2006), pp. 43-67; Victor D. Cha, “Hawk Engagement and Preventive Defense on the Korean Peninsula,” International Security, Vol. 27, No. 1 (Summer 2002), pp. 40-78 참조.
7“불망나니무리와는 상대하지 않을 것이다,” 로동신문, 2005년 5월 10일.
히 미국의 뉴욕연방준비은행이 직접
BDA송금문제 해결에 나선 것은 북한으로
하여금 미국의 대북정책 전환 의지를 어느 정도 신뢰하게 만드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BDA송금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일정부분 상호이해와 신뢰를 회복한 북미
양측은 정식으로 상대방을 대화상대로 인정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BDA문제 해결 직후 미국의 크리스토퍼 힐(Christopher R. Hill) 차관보가 2007년 6월 전격적으 로 평양을 방문한 것은 미국이 북한을 진정한 대화상대로 인정한다는 징표로 해 석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한편 북한은 미국의 행동에 화답하여 힐 차관보의 방 북 한 달 뒤 영변 핵시설 가동중단에 착수하는 한편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감 시단을 맞아들였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흥미로운 것은 북한의 영변 핵시설 가동 중단 사실이 미국 국무부 대변인을 통해서 외부에 처음으로 알려졌다는 점 이다.8 즉 북한은 북핵 폐쇄조치의 시작을 미국에게 가장 먼저 통보할 정도로 정 부차원에서의 양자관계 진전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이러한 분위기를 반영 하여 영변 핵시설 가동 중단 직후 베이징에서 개최된 6자회담을 앞두고 북미 양측 대표는 전례 없이 양국 대사관을 오가며 직접 대화를 진행했다.한편 ‘2·13합의’ 도출과 BDA문제 해결을 거치면서 진전되기 시작한 북미관계 는 마침내 양측의 공식 대표단이 2007년 9월 초 제네바에서 만나 관계정상화를 위한 실무회의를 개최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북미관계정상화회의’로 불리는 이 회의에서 북핵문제의 핵심 당사국인 두 나라는 사실상 대부분 쟁점에 합의함으로 써 같은 달 말에 열린 제6차 6자회담 2단계 회의가 순조롭게 풀릴 수 있도록 기틀 을 마련하였다. 즉 남북정상회담이 한창이던 10월 3일 공개된 이른바 ‘10·3합의문’
은 북한이 핵 폐기 2단계 조치에 해당하는 핵시설 불능화와 핵 프로그램 신고를 연말까지 완료하고, 미국은 북한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제외하는 등 상응조치를
‘병렬적으로’
취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또한 북한과 미국은 테러지원국 해제의 시한도 연말까지 명기한 일련의 ‘별도 양해사항(side understanding)’ 문서를 교환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9
그러나 2008년에 들어서면서 전년도 말까지 예정되었던 북한의 핵 프로그램 신 고가 지연되고 양국관계 개선에 대해서도 비관적 전망이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미 양측은 4월에 싱가포르에서 대표회동을 통해 핵심
8“북한 영변 핵시설 가동중단,” 동아일보, 2007년 7월 15일.
9The Washington Post, October 4, 2007.
쟁점에 대한 ‘잠정합의’에 도달함으로써 6자회담 재개를 통해
2·13합의를 마무리
할 수 있는 중요한 돌파구를 마련하였다. 또한 5월에는 북한이 핵관련 자료를 미 국에 넘겨주고 불과 일주일 만에 미국이 50만 톤의 대북 식량지원계획을 발표함 으로써 북미간 화해분위기는 다시금 정상궤도에 오르기 시작했다.10 그 결과 북미 양측은 긴밀한 접촉을 통해 6월 26일 마침내 북한이 핵 프로그램 신고서를 제출하 고 미국은 즉각적으로 북한에 대한 테러지원국 해제 절차에 착수하였다.<표 1> ‘2·13합의’ 전후 북미관계 전개 과정
시 기 내 용
2007년 01월 크리스토퍼 힐 미국대표와 김계관 북한대표의 베를린 양자접촉
2007년 02월 북핵 6자회담에서 북한과 미국 ‘2·13합의’ 도출
2007년 03월 북한 김계관 외무성 부상 뉴욕 방문, 북미회담 진행
2007년 06월 미국 크리스토퍼 힐 차관보 평양방문, 북미회담 진행
2007년 07월 6자회담 북·미 수석대표 베이징의 양측 대사관을 오가면 회담
2007년 09월 북·미 대표단 스위스 제네바에서 관계정상화 실무회의 개최
2007년 10월 북핵 6자회담에서 북·미대표단 ‘10·3합의’도출
북한 태권도대표단 미국 시범공연 및 인공기 게양
2007년 11월 북·미 대표단 뉴욕에서 금융관계 정상화 위한 ‘금융실무회의’ 개최
2007년 12월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평양공연 공식 발표
부시 미국대통령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친서 전달
2008년 02월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평양공연 거행
2008년 04월 북·미 양측대표 싱가포르 ‘잠정합의’로 핵 신고 문제를 돌파
2008년 05월 북한 영변원자로 가동일지 미국 측에 제출
미국 국무부 50만 톤 대북식량지원계획 발표
2008년 06월 북한 핵 프로그램신고서 제출 및 영변 핵시설 냉각탑 폭파
2008년 08월 북한 외무성 대변인 핵시설 불능화조치 중단 및 원상복구 가능성 표명
2008년 10월 미국 국무부 북한에 대한 테러지원국 해제 발표
2008년 11월 미국 대선에서 북미 양자접촉을 주장해온 오바마(Obama) 후보 당선
10북한의 언론매체들은 미 국무부의 대북 식량 지원 발표 다음 날 신속하게 이를 보도하면서 미국 의 식량지원이 “부족한 식량 해결에 일정하게 도움”이 되고 “두 나라 인민들 사이의 이해와 신뢰 증진에도 기여할 것”이라고 평가함으로써 북·미관계개선 의지를 강하게 내비쳤다. 중앙통신, 2008년 5월 18일; 평양방송, 2008년 5월 18일; 중앙방송, 2008년 5월 18일.
그러나 2008년 10월 미국의 북한에 대한 대테러지원국 해제조치가 정식으로 발 표되기까지 북미관계는 예상대로 순조롭지 못했으며 다시금 대립과 위기의 악순 환을 반복했다. 즉 미국은 북측의 핵 프로그램 신고 및 검증내용에 있어서 자국의 기대를 만족시키지 못한다면서 북한의 테러지원국 명단 삭제를 상당 기간 미루었 던 것이다. 이에 대응하여 북한은 핵시설 불능화 작업 중단 및 원상복구를 밝히면 서 대미압박을 시도하였다. 다행히 임기 말이 다가오면서 부시 대통령은 북핵 진 전을 통한 외교적 성과가 필요했고, 김정일 국방위원장 역시 테러지원국 해제라는 정치적 상징성이 필요했다는 점에서 양측의 이해가 맞아떨어져 마침내 테러지원 국문제는 해결되었다. 한편 2008년 11월 초에 실시된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북한 과의 직접대화를 주장해온 민주당의 오바마(Obama) 후보가 당선됨으로써 향후 북미 양국 간의 관계진전 가능성은 더욱 높아진 셈이다.11 그러나 국내 일각에서 는 북한과 미국의 접근이 속도를 내고 있는 반면 남북관계는 그렇지 못하다는 점 에서 오히려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