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문제, 지역 비전통안보, 지역 다자협력에서 아세안은 한 국의 매우 중요한 협력 상대인 동시에 미‧중‧일 등 강대국보다 강 력한 경제적 연계를 가진 협력 대상이다. 한국과 아세안은 한류나 인적 교류를 포함한 사회, 문화 협력 차원에서도 어느 지역이나 국 가에 뒤지지 않는 중요성을 가진다. 이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김대중 정부 이후 한국의 대아세안 정책은 구체성과 지속성이 결여됐다. 김 대중 정부의 동아시아 지역협력, 아세안 중시 정책 이후 노무현 정 부의 지역 정책은 동북아를 중심으로 펼쳐졌고, 박근혜 정부에서도 지역 정책 역시 한반도와 동북아평화협력구상이라는 동북아 중심의 정책만이 있었다.
1997년 아시아를 강타한 경제위기는 동북아의 한국과 동남아의 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태국을 경제위기로 몰아넣었고 인접한 지 역 국가들도 이에 큰 영향을 받았다. 동아시아 지역협력은 물론이고 한국의 동남아 지역에 대한 보다 높은 수준의 전략적 관심도 이 경 제위기와 지역협력을 계기로 시작되었다. 경제위기와 함께 탄생한 김대중 정부는 김대중 대통령의 동남아에 대한 개인적인 관심과 함 께 경제위기를 맞은 동남아 국가와의 협력, 이 협력을 통한 경제위 기 극복이라는 명제 아래 동아시아 지역협력에 대한 정책을 매우 중 시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야당 지도자 시절 친분을 맺게 된 아시아, 특히 동남아의 아웅산 수치 등 민주화 지도자들과의 개인적 유대를 고리로 동남아 국가들에 대한 관심을 발전시켰다. 보다 중요하게 동 남아와 동북아가 동시에 경제위기를 맞을 것을 보고 동북아와 동남 아의 경제가 서로 연계되어 있고, 경제위기를 두 지역의 협력을 통 해서만 극복할 수 있다는 인식을 하게 되었다. 이런 요인들이 김대
중 정부 시절 지역협력과 동남아시아에 대한 한국의 외교정책을 형 성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아세안 국가와 동북아의 한‧중‧일 3국이 시작한 아세안+3에서 한국은 초기 형성과정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동아시아비전그룹 (East Asia Vision Group: EAVG), 동아시아연구그룹(East Asia Study Group: EASG) 그리고 동아시아포럼(East Asia Forum:
EAF) 등을 제안하면서 동아시아 지역협력의 제도화에 큰 공헌을 했 다. 한국이 이렇게 지역협력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것은 중국과 일본의 상호 견제, 동남아 국가들의 중국과 일본에 대한 경계심이 맞물린 상황에서 한국은 중국, 일본 그리고 동남아 국가에게 보다 덜 위협적인 상대 그리고 비교적 중립적인 행위자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김대중 정부 시기 본격적으로 시작된 동남아, 아세안과의 협력 기 반은 이후 한국의 대외정책 관심이 변화하는 상황 속에서 꾸준히 한 국과 아세안 지역의 협력을 추동할 수 있는 문을 열었고 일부 제도 적 기반도 마련했다. 이후 설명에서 보듯 한국 정부의 아세안 지역, 지역 다자협력에 대한 관심은 그 이후로 대체로 실종되었다. 그럼에 도 불구하고 한-아세안 간 경제협력, 사회문화 교류의 폭은 급속하 게 진전되었다. 이런 경제적, 사회문화적 관계의 확대는 김대중 정 부 시기 아세안에 대해 증가했던 관심, 동아시아 지역협력으로 만들 어진 제도적 기반에 사적 부문의 이익, 즉 기업의 이윤 추구와 사회 문화 관련 사적 부분의 관심 증가가 겹쳐진 결과다.
그러나 이런 한국과 아세안 국가들의 긴밀한 협력을 통한 동아시 아 지역협력 추동이라는 한국의 역할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김대 중 정부 시기 만들어진 남북 화해 분위기를 이어 받은 노무현 정부 는 동북아, 보다 좁게는 한반도에서 가시적인 성과를 만들어 내는데
보다 집중했다. 이런 정책 기조하에서 한국의 외교정책은 급속히 동 아시아라는 보다 넓은 틀에서 동북아, 한반도라는 틀로 축소된다.
김대중 정부 시기 확대된 아세안, 동아시아 지역협력 방면의 관심이 이상적인 발전 경로를 따랐다면 사적 부문에 의한 경제, 사회문화 협력을 정부가 지원하면서 아세안과 전략, 안보 협력을 정부 주도로 발전시켜야 했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못했다.
노무현 정부는 한반도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틀로 동 북아에 관심을 가지고 동북아 균형자로, 동북아 허브국가 등의 지역 대외정책에 많은 외교 자산을 투입했다. 노무현 정부 시기 한국의 대외정책 관심이 동북아와 한반도로 돌아오면서 지역협력과 아세안 에 대한 강조는 약화되었다. 무엇보다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아세안 의 전략적, 경제적 잠재력에 대한 긍정적 평가는 사라지고, 단순히 아세안을 주변에 있는 개발도상국의 집합 정도로 가볍게 취급하는 인식이 팽배했다. 이런 노무현 정부의 아세안, 지역협력에 대한 인 식은 노무현 정부 초기 아세안이 중심이 된 아세안+3 회의에 한국 의 정상이 참석을 해야 하는가를 놓고 정부 내 이견이 노출될 정도 까지 낮아졌다.
노무현 정부의 뒤를 이은 이명박 정부의 대외정책, 지역정책 관심 도 아세안을 경시했고, 한-아세안 관계의 중요한 모멘텀을 만들어 내기에는 매우 부족했다. 이명박 정부의 대외 정책 슬로건은 글로벌 코리아로 이는 한국이 중견국가로 글로벌 무대에서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한다는 방향을 지향했다. 반면 지역에서는 신아시아외교라 는 정책 기조 아래 아시아 국가와 전방위적 관계를 펼쳐 나간다는 구상을 했다. 슬로건과 전체적인 기조 자체로는 바람직한 방향이었 으나 그 실행과정에서는 많은 문제점을 내포했다. 글로벌 코리아는 글로벌 차원의 중견국을 지향하고 한국의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지
향한다고 했으나, 실상은 글로벌 공동체에 대한 한국의 공헌보다 한 국이 중견국임을 다른 국가들에 과시하려는 행태로 나타났다. 또한 큰 규모의 정상회의를 한국에 유치하는 것을 통해 한국의 위상을 과 시하는 정책과 다르지 않았다.
반면 신아시아 외교는 한국의 아시아에 대한 관심을 다시 긍정적 인 방향으로 끌고 올 수 있는 잠재력이 있었으나 실제 정책의 실행 에서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무엇보다 한국의 대아세안 정책이라는 측면에서 보았을 때 아세안을 넘어 모든 아시아 국가를 대상으로 하는 신아시아정책은 초점을 너무 넓게 형성한 데 문제가 있다. 중동으로부터 동북아에 이르는 모든 아시아 국가를 대상으로 하는 문제가 그것이다. 대상의 문제보다 더 심각한 것은 신아시아 외교가 다자적 요소는 철저히 배제하고 양자 관계에만 치중을 했다 는 점이며, 나아가 이 양자관계를 통해 한국이 아시아의 많은 개발 도상국에서 어떤 경제적인 이익을 얻을 수 있을까에 관심을 둔 중상 주의 정책이었다는 점이다. 즉, 글로벌 코리아에서 강조하는 한국의 국제적인 역할과 공헌이 신아시아 외교에서 말하는 개도국에 대한 중상주의적 접근과 철저하게 모순을 이루는 형상이었다.
이 정책의 일면으로, 처음으로 동남아에 대한 정책이 구체적으로 펼쳐졌다. 그러나 이런 김대중 정부의 외교적 지평 확대는 그리 오 래가지 않았다.
노무현 정부는 당시 한반도 상황의 반영 그리고 김대중 정부에서 만들어 놓은 남북교류 협력의 분위기로 인해 김대중 정부에서 동남 아를 포함하는 동아시아로 확대된 한국의 지역 외교정책을 다시 동 북아로 축소했다. 동북아 허브국가, 동북아 중심 국가 논의가 그런 대표적인 정책들이다. 이명박 정부는 신아시아 외교를 통해 아시아 국가로 외연을 확대하는 듯했다. 그러나 신아시아 외교는 개발도상
국을 대상으로 한 중상주의적 정책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또한 김대중 정부 시기 발달한 다자지역협력에서 철저한 양자주의로 다 시 선회했다. 박근혜 정부의 동북아평화협력구상은 아세안을 옵저 버로 참여시키기는 했지만, 아세안을 동북아 문제 해결의 도구화하 는 방향으로 진행한 한계를 가졌다. 이렇게 아세안을 부차적으로 취 급하는 정책은 아세안으로부터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다.
이명박 정부의 대아시아 외교는 내용상 문제가 있었지만, 범위상 으로는 지리적 폭을 넓게 잡은 외교 구상이었다. 반면 박근혜 정부 의 지역 외교는 다시 동북아와 한반도로 좁아지는 축소 지향의 외교 정책을 보였다. 박근혜 정부는 아시아 패러독스라는 문제의식하에 동북아 3국이 경제적으로 서로 깊이 연관되어 있고 상호 의존적인 데 반해, 정치적 갈등을 겪는 상황을 타개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지 역적 목표로 삼았다. 이런 문제 해결을 위해 제시된 외교 구상이 동 북아평화협력구상이었다. 연성협력으로부터 출발하여 동북아 국가 간 신뢰를 구축하고 이를 정치안보 협력 등 경성협력으로 연결시키 겠다는 구상이었다. 그리고 예외 없이 이런 동북아평화협력구상은 한반도 문제 해결을 위한 한반도신뢰프로세스라는 정책 구상과 맞 물린다.
이런 동북아 중심적인 구상하에서 이미 한국과 경제적, 사회문화 적으로 엄청난 실질 협력 관계를 맺고 있던 아세안에 대한 관심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미 박근혜 정부 시기에는 과거부터 이어져 오던 외교적 관성에 의해서 한-아세안 관계가 전략적 동반자 관계(이명 박 정부 시기)였고, 아세안은 무역, 투자에서 한국의 제2위 상대국 으로 올라섰다. 사회문화, 인적교류도 지속 증가해 주변 4강에 못지 않은 사회문화적 상호작용도 있었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의 아세안 에 대한 관심, 아세안 잠재력에 대한 인식은 낮은 수준에 머물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