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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정부의 북방정책 평가(평화의 측면)

한국에서 북방정책은 미소 냉전의 종언으로 대표되는 국제정치 환경의 변화에 큰 영향을 받았다. 냉전기 한국의 외교정책은 미국을 비롯한 주변 강대국의 영향으로 자율성에 제약이 있었고 이분법적 외교가 통상적인 시기였다. 그러나 소련의 붕괴로 시작된 국제정세 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시작하면서 지금까지 적대관계를 갖던 사회주의 국가들과 외교관계를 수립하기 시작하였다.

노태우 정부 이전인 1970년대 1980년대 초반의 북방외교 노력은 여타 공산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을 통해 북한을 고립시키고 압박하

는데 초점을 두었을 뿐 아니라 그나마도 산발적이고 체계 없이 추진 하여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다.18)

가. 노태우~김영삼 정부 시기

1987년 취임한 노태우 대통령은 미소냉전의 와해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기 시작하였고, 1980년대 후반부터 1989년 소련과의 국교정 상화, 1992년 중국과의 국교정상화로 이어지는 북방정책은 과거와 는 다른 특징이 있었다. 이전에 북한을 고립시키는 정책과는 달리 남북한 관계 개선에 활용하고 최종적으로는 남북한 통일을 위한 환 경 조성을 목표로 했다는 점이다.

노태우 정부가 추진한 북방정책은 냉전의 붕괴라는 국제적 변수 에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국제환경의 변화에 따라 경제적 및 정치적으로 국제사회에서 급부상한 한국은 경제력을 바 탕으로 사회주의 국가와 발 빠른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는 점에서 시의적절한 정책과 이행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궁극적 목 표였던 남북관계의 진전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 다. 다시 말해 북방정책은 공산권 국가들과의 외교관계 수립이라는 공간적, 양적 외교지평의 확대라는 점에서 성과가 있다고 할 수 있 으나, 경제적 측면에 치중한 면이 있고 따라서 상대적으로 정치적으 로는 관계가 심화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노태우 정부 이후 출범한 김영삼 정부의 북방정책은 북방정책 보 다는 대북정책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잇따른 사회 주의 국가의 몰락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북방정책을 적극적으로 추 진한 결과, 구공산권국가들과 외교관계를 수립하는 등 정치 및 경제 의 지평을 확대한 한편, 북한과도 여러 가지 화해의 결과물을 얻을

18) 정종구, “북방정책의 평가: 외교적 측면,” 국제문제연구, 제15권 1호 (1991), pp. 1~14.

수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북한은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핵을 개발 하기 시작하였고, 북한의 핵은 김영삼 정부의 대북정책에 결정적 변 수로 작용하게 된다. 북한의 핵 보유에 대한 언론 보도가 등장한 것 은 1993년 3월 18일로 김영삼 정부 출범 직후이고, 초기에는 남북관 계 진전에 대한 희망도 있었다. 그러나 1994년 3월 방북한 국제원자 력기구(International Atomic Energy Agency: IAEA) 사찰단의 사찰불허와 이은 3월 19일 ‘서울 불바다’ 발언, 5월의 영변 원자로 연료봉 추출로 이어지는 북한의 핵 개발 행보는 6월 13일 IAEA 탈퇴 와 7월 4일 김일성 사망으로 전개되었다.19) 당시 북한은 대홍수, 식 량난, 에너지난 등 경제 악화가 매우 심각한 상황으로 당시 ‘북한 붕괴론’에 김영삼 정부는 더욱 무게를 둔 듯하다. 이러한 김영삼 대 통령의 대북강경정책은 김영삼 대통령 자신의 정치적 성향 즉 대북 정책의 수립과 운영을 주도적으로 관여했기 때문에 대통령의 정책 의지가 대북정책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1990년 대 여론의 보수적 성향도 보수적 대북정책 추진에 순기능 역할을 했 다고 볼 수 있다.

이렇듯 김영삼 정부 초기에는 남북한 ‘화해와 협력’을 모색하였으 나, 김일성 사망을 기점으로 남북관계는 교착상태에 놓였고 북한을 포함하는 북방정책은 더이상 추진되지 않았다.

나.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기

1998년 출범한 김대중 정부는 김영삼 정부와는 다른 ‘햇볕정책’으 로 명명되는 대북포용정책을 추진하고 역사적인 6‧15 남북공동선 언의 결과를 창출했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한반도 문제는 민족끼 리 해결이라는 점에 더 비중을 두었고, 분단 이후 최초로 평양을 방

19) 조경근, “김영삼 정부의 대북정책-내용과 평가,” 통일전략, 제12권 3호 (2012), p. 165.

문하여 김정일 위원장과 회담을 갖는 등 한반도 평화분위기를 조성 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다만 결과적으로 북한은 남한으로부터 경 제적 지원을 받으면서 결국은 핵개발을 멈추지 않았다는 점에서 한 계로 평가된다.

김대중 정부 시절에 추진된 대북포용정책은 두 차례의 서해교전 등 북한의 도발에도 불구하고 미국 정부와의 정책 공조 속에 일정 정도의 성과를 거둔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특히, 김대중 정부 초반 의 2~3년간은 남북 정상회담 개최 및 활발한 남북 교류와 경제 협 력을 통해 한반도에서의 긴장 완화라는 가시적 성과를 낳았다. 물론 이 당시에도 대북포용정책의 추진으로 인한 많은 부정적인 효과가 논란이 되어 ‘남남갈등 심화, 군사안보의 약화, 한미동맹 약화’ 등이 지적되기도 하였다.20)

노무현 정부의 대북정책은 김대중 정부의 대북포용정책을 유지하 는 것을 기조로 삼았다. 노무현 정부의 ‘평화번영정책’은 김대중 정 부의 햇볕정책을 계승했지만, 부시 행정부의 일방주의 노선과 북한 핵개발이라는 새로운 환경에서 추진하는 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 다. 무엇보다 햇볕정책의 상대적인 성공은 노무현 정부가 평화번영 정책을 추진하는 데 있어 김대중 정부 시절에 채택하였던 원칙에 집 착하는 교조주의적 경향을 갖게 만들었다. 이러한 교조주의적 태도의 대표적인 사례는 북한주민의 인권을 외면하거나 대북 인도적 지원을 하면서 투명성과 접근성을 요구하지 않은 것을 들 수 있다. 이것은 햇볕정책의 도입 당시 경직되어 있던 북한을 테이블로 끌어내기 위한 과도기적 조치로서 대북포용정책의 기조에도 맞지 않는 것이었다.

종합해 보면, 노무현 정부의 대북정책도 한반도 평화나 대륙지향 의 비전이 녹아 있는 부분은 없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20) 허태회윤황, “민주화이후 한국정부의 대북정책 성향 및 전략 비교: 김대중-노무현 정부와 이명박 정부를 중심으로,” 국제정치연구, 제13집 2호 (2010), pp. 5~6.

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기

이명박 정부 출범 직후부터 남북관계는 대북강경기조와 북한의 대남압박으로 경색국면을 맞이했고, 2010년도는 금강산 자산동결, 천안함 침몰사건, 연평도 도발 등으로 이어지면서 최악의 상황을 맞았다.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은 기본적으로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대 북 포용정책이 비효율적이고 실패했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북핵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채 남북경협을 병행했기 때문에 핵개발을 저 지하지 못했다는 것이고, 대북지원을 하면서도 분배투명도도 확보 하지 못했고, 국민적 합의 없이 무리하게 대북정책을 추진함으로써 남남갈등을 증폭시켰다는 평가를 했다. 이러한 배경하에 이명박 정 부의 대북정책은 ‘비핵‧개방‧3000’구상으로 북한이 핵을 포기하고 개방의 길을 선택한다면 남북협력에 새 지평이 열릴 것이고, 한국 정부가 국제사회와 협력하여 10년 안에 북한주민 소득이 3천 달러 에 이르도록 돕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북한은 이명박 정부의 요구에 대해 순응적이라기보다는 더 위협적이고 강도 높은 군사적 맞대응 전략으로 일관했고 한반도 의 긴장은 그 어느 때보다 심각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북한을 포함 한 경제구상이나 대륙정책은 추진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북한의 핵무기 개발이 이슈가 된 1990년대 중반 이후 미국의 대북 강경정책, 김영삼 정부의 대북강경정책에 따라 남북관계 개선의 목 표는 빛을 발하지 못하는 상태가 지속되었다. 남북관계의 악화는 러 시아나 중국까지 시야에 넣은 정책을 제안하기에 큰 장애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이후 20년 만에 대륙 관련 정책이 재등장한 것은 박근혜 대통령이 2013년 10월 18일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주최 회의에서 언급한 내용

에서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날 개최된 ‘유라시아 시대의 국제협력 컨퍼런스’에서 ①하나의 대륙, ②창조의 대륙, ③평화의 대륙 등 세 개의 개념을 중심으로 하는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를 발표한 것이다.

이 자리에서 박대통령은 부산에서 출발해서 북한‧중국‧러시아‧중 앙아시아와 유럽을 철도‧도로‧공항 등을 포함하는 복합물류 시스템 으로 연결하는 ‘실크로드 익스프레스(SRX)’를 제시하면서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를 대한민국의 새로운 대륙지향의 외교정책 비전으로 선 언했다.21)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이 과거 공산권 국가들과 경제협 력을 양적으로 확대하였다고 한다면, 유라시아 이니셔티브의 비전은 북방정책의 한계로 지적된 질적 역량 강화에 역점을 둔 정책으로 평 가할 수 있다. 또한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는 북한과의 협력을 통한

‘통일준비’를 착실히 해나감으로써 통일 기반을 닦고, 더 나아가 통 일한국의 국가전략으로 이어질 수 있는 원대한 정책비전의 성격을 지닌다. 즉,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를 잘 발전시켜 나갈 경우, 중견국 (middle power) 외교의 새로운 롤 모델이 될 가능성도 내포한다.22)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한국의 외교정책의 성공 여부는 국제적 변수에 의해 큰 영향을 받는다.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또한 한국 정 부가 외교 역량의 확대와 북방 지역에 위치한 국가들과의 질적 외교 의 추구라는 점에서 미국을 비롯한 중국, 러시아 등의 대외정책과 맞물려 있다.

박근혜 정부가 추진한 유라시아 이니셔티브의 제약으로 작용한 가장 큰 요인은 북한의 핵실험과 이에 대한 제재조치라 할 수 있다.

또한 2014년 3월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 이후 서방국가들의 대러 제재도 한계요인으로 작용하였다.

21) 박근혜 대통령의 유라시아 컨퍼런스 기조연설에서.

22) 장덕준, “‘북방정책 재고(再考)-유라시아 이니셔티브’의 재검토 및 새로운 대륙지향 정책을 위한 원형 모색,” 슬라브학보, 제32권 1호 (2017), p. 3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