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 간파와 믿음
2) 투자의 중독성: 황폐화되는 삶
높다. 이 과정에서 박성호 씨의 말을 빌리자면 ‘주식이라는 게 사람을 현혹하게 만든다.’ 잃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벌 수 있다고 생각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아예 손실만 봤다면 애초에 전업투자에 뛰어들지도 않았을 텐데, 대부분의 거래에서 는 수익을 거둠으로써, 돈을 번 경험을 떠올리며 ‘이렇게 매매하면 되겠구나!’하 는 확신을 얻게 된다. 또한 손실을 경험할 때는 실패의 원인을 성찰하며 ‘이렇 게만 안하면 손실을 줄일 수 있겠다’라는 희망을 불어넣는다. 이와 같은 성찰, 은폐의 언어, 그리고 새로운 희망의 생성이라는 연속된 과정 속에서 개인투자자 는 투자를 지속할 동력을 확보한다.
계속 사고팔고 사고팔고의 무한반복. 거기서 수익이 나오잖아. 10만원 100만 원 막 계좌에 쌓여가잖아요? 그게 얼마나 재밌어요. 게임은 막말로 내가 ‘현질’하는 건데 이거(주식)는 내 실제 돈을 가지고 하면서 돈이 쌓이는 게 보이니까. 재밌지. 시 간가는 줄 모르지. 얼~마나 재밌는데. 안 재밌어요?(웃음) 잃는 거는 잠깐이고, 또 하 면 다시 재밌어. (박성호, 로알매매방 입실자, 40대)
그래서 수익을 보게 되면 황홀한 쾌감을 느끼지만, 반대로 손실을 보게 되면 극도의 우울감에 사로잡힌다. 장중에 느낄 수 있는 몰입의 재미는 일시적 이지만, 끝나고 나면 자괴감이 밀려온다. 우울감과 자괴감으로부터 도피하기 위 한 일환으로 개인투자자는 다음 날 또 다시 매매를 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마 치 마약 중독자가 마약의 쾌락이 사라진 후 또 다시 마약에 빠지는 것과 유사 한 행태다. 회가 거듭할수록 점점 더 많은 양의, 더 높은 강도의 마약에 손을 대게 되듯이, 개인투자자는 시간이 지날수록 투자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입하고, 점점 더 ‘위험한’ 종목을 매매하게 된다.
[사례4-3-9: 폐장 후 빠지는 자괴감]
세시 반이 될 때까지 무아지경에 빠지는 거예요. 끝나고 나서야, 후회를 하고, 반성을 해요. 그러면서 혼자 생각을 해요. ‘아 내가 뭐하는 건가, 미쳤나 내가.’ 화장 실에 있을 때 일인데, 누가 들어왔어요. 소변을 누면서 혼자서 궁시렁 궁시렁해요.
‘아 내가 미쳤어. 아 내가 돌았어.’ 자기도 모르게. 자기가 실수한 걸 자기도 모르게 읊조리는 거예요. 옆에 누가 있건 말건 생각을 안 하고 너무 스스로 자책감이 드니까.
영혼이 빠져나간 거야. (박성호, 로알매매방 입실자, 40대)
주식·파생상품 투자에 중독된다는 것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것은 바로 잃은 돈을 다시 복구하는 ‘본전심리’의 충동이 끊임없이 일어난다는 뜻이다. 손실을 본 순간 마음이 쓰리고 잃은 내 돈이 아까워 잠을 못 이루는 마 음 자체가 자신의 마음의 주도권을 주식에 빼앗겼다는 것이다. 이러한 본전심리 의 충동은 다혈질의 성격의 소유자 혹은 쉽게 흥분하는 사람에게 더욱 강하게 작용한다. 박성호 씨는 과거 이런 성격을 ‘빼다 박은’ 한 입실자의 사례를 소개 하며, 본전을 ‘한 방’에 복구하겠단 욕심을 갖는 것은 일확천금을 노리는 ‘도박 쟁이’의 심리와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사례4-3-10: 너 죽고, 나 죽자]
그 사람은 파생을 했는데 손실 보고 열 받는 순간부터 전쟁이 시작돼. 니가 죽 나 내가 죽나. 밥도 안 먹고, 움직이지도 않아. 이겨야지만 게임(매매)을 끝내. 되게 위험해. 근데 자기는 지는 게임은 죽어도 안 한다는 거야. 근데 결국 망해서 사라졌
어. (박성호, 로알매매방 입실자, 40대)
술, 담배, 도박, 마약과 같은 중독의 대상은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간에 한 대상에 강하게 집착하고 의존하며, 그것 없이는 살 수 없는 지경에 이른 삶 은 얽매여 있고 자유로울 수 없다. 때문에 투자가 주는 재미에 중독된 개미의 삶은 쉽게 황폐화되기 마련이다. 모든 것을 투자와 연계하며 생각하면서 개인투 자자의 삶에서 여유가 사라지는 것이다. 이런 중독에 빠지면 장중 이외에도 하 루 종일 투자 생각밖에 나지 않는다. 투자에 사로잡힌 영혼은 다른 것에 온전히 그리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정신을 몰입하기 힘들어진다. 이러한 심리상태는 화 투도박판을 소재로 다룬 영화 ‘타짜’(2006)에서 ‘고니(조승우)’와 ‘평경장(백윤식)’
의 대화에 드러난 도박사의 심리와 유사하다. 화투에 중독된 도박사의 눈에 아 름다운 봄밤의 벚꽃은 화투짝 3의 그림인 ‘사쿠라’만을 연상시킬 뿐이다.
(평경장) “꽃 좋다. 너 저거이 뭘로 보이니?”
(고니) “화투짝 3이요. 사쿠라?”
(평경장) “너도 이제 슬슬 미쳐가는구나 야.”
(영화 ‘타짜’ 中)
이러한 상태를 박성호 씨는 ‘주식의 노예’가 된 상태라고 부르며, 절대 그렇게 되지 않도록 경계할 것을 강조한다. 주식의 노예가 된 삶이란, 자신이 주식을 수단으로써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주식에 내가 ‘이끌려 다니는’ 삶이기 때문이다. 개인 전업투자자들에게 경제적 자유란 ‘내가 주인이 되는 삶’을 위한 수단으로써 추구하는 것이라는 점을 3장에서 살펴본 바 있다. ‘주식의 노예’가 된 삶은 바로 이 목적과 수단이 전도된 불행한 삶의 형태다.
[사례4-3-11: 주식의 노예]
돈 벌어서 행복하게 살려고 하는 건데 자기가 여기서 주식의 노예가 되면 안 되는 거지. 주식의 노예가 되는 순간 폐인이 돼 사람이. (주식의 노예란?) 손실 나던 수익 나던 하루 종일 주식 생각만 하는 사람. 장이 끝나면, 여기서 나가면 주식생각 안하는 게 좋아요. 근데 집에 가서도 주식생각. 뭘 해도 주식생각이 막 떠올라. 자기 가 뭘 하는지 몰라. 완전히 주식에 내가 묶여있는 거야. 예를 들어서 아! 내가 그 때 왜 손절을 못했을까. 이거 어떡하지? 덜덜 두려움. 두려움에 갇혀 있는 거지. 막 암흑 의, 어두운 그림자가 온 몸을 감싸고 있는 거. 그러면 사람이 생각을 해도 누가 뭐라 고 하던 못 들어. 누구랑 대화를 해도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몰라. (박성 호, 로알매매방 입실자, 40대)
차명근 씨도 주식은 지인들에게 절대 하지 말라고 늘 말리는 이유로 삶이 피폐해지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파생상품 투자야말로 도박 중의 최 고의 중독성이 강한 도박이라고 말한다. 그는 2013년 옵션 투자로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빚을 지게 되어 개인파산 신청을 하고 노가다 현장을 전전하며 돈을 벌었다. 고된 육체노동과 개인파산자가 된 현실보다 훨씬 슬펐던 점은 놀랍게도
‘다시 투자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라고 고백한다.
[사례4-3-12: 중독자의 슬픈 자화상]
내가 실패해서 노가다 갔었다고 얘기했잖아. 그때 노가다 가서 하는데, 제일 슬픈 게 뭐냐면, 이거(매매)를 다시 못할 것 같다는, 다시 할 수 있는 기회가 없을 것 같다는. 이게 제일 슬퍼. (옵션투자를요?) 응. (왜 다시 못할 것 같으셨어요?) 기회가 있겠어 이제? 노가다 뛰러가서, 먹고살라고 최저시급 받고 일하는데. 다시 이걸 할 수 있는 기회가 오겠나 하는 생각이 드는 거지. 그니까 중독인거지. (차명근, 개인 전업 투자자, 50대)
투자에 중독된 개미의 일상이란 어떤 것일까? 개인투자자가 꼽는 개인 전업투자의 장점 중 하나는 공휴일과 휴식시간이 보장된 것이다. 그러나 중독으 로 황폐화된 개미는 그 시간에 온전히 휴식할 수도 없다. ‘내가 왜’ 손실을 봐야 했으며, 무엇을 잘못했으며, 내일은 어떻게 해야 할지 두려움에 사로잡힌 채 생 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계속 떠올라 쉬어도 쉰 것 같지 않다. 박성호 씨는 특 히 금요일 장을 손실로 마무리한 경우, ‘찝찝한 감정’이 뇌리에 남아, 주말동안 편히 쉴 수 없다고 말한다.
[사례4-3-13: 찝찝한 주말]
특히 금요일 날 손실을 안고 장을 끝마치면 주말이 토요일 일요일이 있잖아.
그러면 굉장히 안 좋은 게 그 이틀 동안을 마음속에 이게 찝찝함으로 남아. 편안히 못 쉬는 거지. (박성호, 로알매매방 입실자, 40대)
개인투자자들이 무엇을 보든 매매 생각이 나게 하고, 중독 현상을 가중 시키는 중요한 이유는, 실제로 우리의 삶에 주식과 파생상품과 연관되지 않은 것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영화 ‘타짜’ 속 ‘정마담’의 말마따나 화투짝에는 인생 의 희로애락이 다 담겨 있다면, 주식에도 21세기 지구촌이 모두 담겨있다. 돈으 로 살 수 없는 것이 없는 세상이 도래한 와중에 주식은 형태만 다른 돈의 또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식·파생상품 투자를 하게 되면, 이 사회와 세상의 모든 것을 총망라해서 관심을 가져야 한다. 개인투자자는 정치와 경제, 문화, 예술, 통신, 의료, 국제 등 사회의 모든 영역을 이해하고 분석할 줄 알아
야 한다. 심지어 연예뉴스도 보아야 한다. 연예소속사도 상장된 주식회사이기 때문이다.
주식투자자는 이웃나라 정치인의 신변, 특히나 그것이 강대국 정치인일 수록 의미 있게 귀담아 들어야 한다. 한 대통령의 친기업주의적 정책이 그의 신 변 변화로 인해 ‘물거품’이 되어버리면, 그 기업들이 상장되어 있는 주식시장에 미칠 부정적 파장은 머릿속에서 상상되어지는 것 이상으로 실로 엄청나다. 또한 주식은 ‘물거품’이 되지 않고, ‘물거품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제기된 것’ 만으로 도 불확실성에 기인한 위험이 주가에 음의 형태로 반영되기 마련이다. 일례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2018년 8월 탄핵론이 제기되자, (기업 규제를 완 화하고 감세를 이뤄 종합지수 고공행진을 이끌어내는 등 대통령직을 이렇게나 잘 수행한) “내가 탄핵된다면, 미국 주식시장이 붕괴하고, 모두가 매우 가난해질 것”104)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금융투자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고, 직장에서 받는 월급을 통해 생계를 유지할 수만 있다면, 이러한 지구촌 구석구석에서 일 어나는 변화는 한 인간에게 직접적 영향을 주지 않지만, 금융투자를 업으로 삼 는 개인 전업투자의 경우는 다르다.
[사례4-3-14: 세상 모든 일이 중요한 주식투자자]
일반 사람들한테 트럼프가 탄핵이 되건 말건 무슨 상관이 있어, 없잖아. 남들 은 이런 거 상관없이 살지만 우리한테는 굉장히 중요한 거거든. 트럼프가 탄핵이 되 면 우리한테 손실이 엄청 커, 주식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주식은) 풋(put)이 아니니 까. 그러니까 굉장히 노심초사할 수 있는 거고. 남들한텐 아무 문제없는 이야기를 우 리는 굉장히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되고. 늘 걱정거리가 많아져. (박성호, 로알매매방 입실자, 40대)
때문에 박성호 씨는 주식투자자들은 대체로 ‘평화주의자’라고 말한다.
평화롭고, 아름다우며, 세상이 행복해야 주가도 오르고, 예상치 못한 악재가 발 생할 불안으로부터 조금이나마 자유로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사례4-3-15: 평화주의자가 되는 주식쟁이]
그래서 주식하는 사람은 평화주의자가 돼. 아름다운 것만 좋아해. 항상 행복했 으면 좋겠어, 모든 게. 전쟁도 없고, 경제도 좋아지고, 그럼 다 잘살게 되니까. 나도 잘사는 거고. (박성호, 로알매매방 입실자, 40대)
104) 한국경제, 2018.08.24., “트럼프, 내가 탄핵되면 美 주식시장 붕괴될 것”
<www.hankyung.com/international/article/2018082320931> (2019.04.21 접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