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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嚴昕의 삶 인간됨

2.2. 靑年期

2.2.2. 交友關係

엄흔은 관직에 있을 때 林億齡, 閔齊仁, 趙士秀, 李天啓, 宋純, 權應昌, 沈連源, 李若 海, 鄭彦慤, 李蓂, 申澣, 具壽聃, 權應挺, 李弘幹, 尹豊亨, 鄭萬鐘, 洪愼, 金希說 등 당시 여러 문인들과 교유하였다. 그의 교우관계는 교우가 현지로 부임할 때 이별하면서 지 어준 시, 또는 평소 교우들에게 보여주거나 인편이나 서찰로 보내준 시를 통하여 짐작 할 수밖에 없다.29) 특히 林億齡, 宋純, 崔演과는 매우 각별한 사이로 보이는데, 때로는 선생으로 더러는 친구로 생각하며 교유했던 임억령과의 우정은 다음 작품에서 잘 드러 나 보인다.

그대는 黃庭堅 나는 范廖 君是庭堅我范寥

시를 지어 서로 화답하고 술로 부르네. 得詩相和酒相招 몸은 우환으로 살아 편안하지 않으나 身居憂患非閑逸 자취는 새장을 벗어나 번잡하지 않네. 跡脫樊籠不市朝30)

26) 周易 乾卦 九三 爻辭의 말은 다음과 같다. “君子, 終日乾乾, 夕惕若, 厲无咎.”( 周易 , 乾卦 九三 爻辭.)

27) 周易 乾卦 象傳에서는 “天行健, 君子以自彊不息.”( 周易 , 乾卦 象傳.)라고 하였다.

28) “古之聖賢, 朝乾夕惕, 禹惜寸陰, 文王翼翼, 殷湯十愆, 顏淵四勿.”(華察, <十省堂銘>, 十省堂集 , 부록 15쪽.) 湯王의 ‘十愆’은 “三種惡劣風氣, 所滋生的十種罪愆, 指巫風二 舞․歌, 淫風四 貨․色․

游․畋, 亂風四 侮經言․逆忠直․遠耆德․比頑童, 合而爲十愆.”( 書經 , <伊訓>.)을 말하고, 顔淵 의 ‘四勿’은 “顔淵曰: 請問其目. 子曰: 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 論語 , <顔 淵>.)을 말한다.

29) 엄흔이 당대 문인들과의 교유한 작품의 수는 다음과 같은데, 宋純은 41제 68수, 蘇世讓은 37제 48수, 林億齡은 25제 71수, 崔演은 16제 35수가 十省堂集 에 실려 있다.

30) 엄흔, <呈大樹>, 十省堂集 下, 56쪽.

위의 시는 <呈大樹> 14수 중 제1수이다. 이 시는 임억령이 부정한 현실에서 벗어 나고자 고향 해남에서 은둔생활을 준비할 때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엄흔은 자신과 임 억령의 우정을 黃庭堅과 范寥의 우정에 비견하였다.31) 제5수에서 그는 “어느 때 임금 의 은혜를 대략이나마 갚을까? 밤에는 책을 보고 낮에는 땔나무하러 가네.”32)라고 하 여 임억령의 은둔생활을 내심 부러워하였다. 그러나 제13수에서는 “재주와 힘은 정녕 강하여 아직 늦지 않았는데 / 石川은 왜 물고기를 잡고 땔나무나 하려 하는가?”33)라고 하며 임억령이 다시 서울에서 함께 벼슬생활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보여주었다.

한편 엄흔은 비록 나이는 많으나 평소 벗으로 여기는 송순34)이 해직되어 고향으로 돌아갈 때 헤어지면서 “가을바람에 이별하니 어떻게 마음을 한정하랴? 서로 헤어져 그 리움을 생각하며 슬퍼하네.”35)라고 하며 우정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지방관으로 고향 가까운 남쪽 가려고 一麾南去近鄕關

갑자기 儀曺의 玉笋班 던졌네. 擲却儀曺玉笋班

천리 밖이라 負米를 부지런히 못하겠지만 負米不勤千里外 육 년간은 빠뜨리지 말고 음식을 이바지하라. 供羞無闕六年間36)

위의 시는 엄흔이 송순과 헤어졌다가 다시 만났으나 또다시 멀리 咸平수령으로 나 가는 송순을 전송하며 서운함을 노래하였다. 또한 엄흔은 “천리 밖이라 부미를 부지런 히 못하겠지만 / 육 년간은 빠뜨리지 말고 음식을 이바지하라.〔負米不勤千里外, 供羞 無闕六年間〕”고 하며 객지에서 부모의 효도를 소홀히 하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엄흔 은 강가에서 함평에 있는 송순을 생각하며 “내일 아침 이별하는 곳에서 / 고개를 돌리 면 한번 슬퍼지리라.”37)라고 하면서 이별할 때의 아쉬움을 말하였다. 한편 엄흔은 “강

31) 중국 劉珊의 논문 黃庭堅:生前之樂 身後之名 의 가운데 다음 내용을 근거하면 黃庭堅과 范寥는 친구사이로 보인다. “실재 ‘신중’은 황정견이 의주에 있을 때 붕우 범요의 자이다.”〔其實信中, 乃 是黃庭堅在宜州時的朋友范寥的字.”〕(劉珊, 黃庭堅:生前之樂 身後之名 , 學習時報 , 2015년 참 조.)

32) “何時粗報君恩畢, 夜卽看書晝卽樵.”(엄흔, <呈大樹>, 十省堂集 下, 56쪽.) 33) “才力政強時未晩, 石川那得作漁樵”(엄흔, <呈大樹>, 앞의 책.)

34) 十省堂集 의 시제 아래 각주는 엄흔이 직접 주석을 단 것으로 추정되어진다. 따라서 <送友人 歸覲南鄕>의 제목 아래 ‘友人卽宋純’이라는 주석으로 보아 송순을 친구로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엄흔, <送友人歸覲南鄕>, 十省堂集 下, 46쪽.)

35) “秋風離別情何限, 渭水江雲一望悲.”(엄흔, <送宋司成守初罷官歸鄕>, 十省堂集 下, 10쪽.) 36) 엄흔, <送友人出宰咸平>, 十省堂集 下, 51쪽.

37) “明朝分手處, 回首一悽然.”(엄흔, <江上 次友人別友韻>, 十省堂集 上, 65쪽.)

수와 회수의 헛된 눈물만 부치고 / 기러기에게는 부질없이 서신을 전하네.38)”라고 하 고, “지금부터 뒤로 서로 만남이 / 다시 몇 번이나 돌아오려나.”39)라고 하면서 그에 대 한 한결같은 우정을 보여주었다.

최연은 엄흔과 함께 원접사 蘇世讓의 종사관으로 임무를 수행하였는데40), 그가 최 연에 대하여서는 전체 11수로 된 연시 <次演之深字韻>에 자신의 마음을 가까이서 전 하고 있다. 그 중 제8수에서는 최연과 임억령을 “빙설 같은 마음의 百年知己”라고 직 설적으로 말하였다.

빙설 같은 마음으로 깊은 우정 맺었으니 氷雪情懷托契深

백년지기는 崔演之와 林大樹라네. 百年知己有崔林

도중에 이별하여 함께 눈물 뿌렸지만 中間離別同揮涕 늘그막에 고생하며 둘이서 마음 알았네. 末路艱難兩識心41)

위의 시 <次演之深字韻> 제1수에서 “슬픈 뜻과 기쁜 마음 누가 깊고 얕은가 / 옛 동산에서 다시 노닐며 기뻐하네.”42)라고 한 말을 보면, 엄흔과 최연이 같은 언관의 벼 슬에 있으면서 바른 언관의 자세를 겸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제9수 “한번 그 대의 시를 읊어보니 하나같이 맛이 깊어 / 옥 같은 가을달이 구슬 숲에 비치는 듯.”43) 에서는 최연의 시를 가을 달에 비친 瓊林에 비유하여 극찬하기도 하였다.

엄흔은 이처럼 당대 교우들과 교유하며 주고받은 시에서 평소 친구를 생각하고 그 리워하는 마음을 진솔하게 보여주려고 노력하였다.

38) “江淮空寄淚, 鴻雁浪傳書.”(엄흔, <復示友人>, 十省堂集 上, 58쪽.)

39) “從今相見後, 復作幾時廻.”(엄흔, <咏書堂樹木友人韻>, 十省堂集 上, 59쪽.)

40) 엄흔이 종사관으로서 활약한 사실은 다음 蘇世讓의 復命에 잘 나타나 있다. “ 황화집 이 5권인데 모두 해정하게 베껴왔습니다. 그러나 틀린 곳이 아직도 많으니 보고 나서 다시 내려주시면 종사 관들(崔演ㆍ嚴昕ㆍ林亨秀)에게 校書館으로 출사하면서 교정하게 하여 인출하는 것이 어떠하겠습 니까?”( 中宗實錄 , 중종 34년 5월 28일조 참조.) 한편 바른 언관으로서의 바른 자세를 보여준 두 사람의 구체적인 사례는 시기가 서로 다른 다음의 두 기사에서 알 수 있다. 최연은 김안로의 전 횡을 고변하였다.( 中宗實錄 중종 26년 10월 23일조 참조.) 및 엄흔은 언론의 개방과 탄압 중지 등을 건의하였다.( 中宗實錄 , 중종 36년 6월 25일조 참조.)

41) 엄흔, <次演之深字韻>, 十省堂集 下, 41쪽.

42) “悲意歡情孰淺深, 重遊欣得舊園林.”(엄흔, <次演之深字韻>, 앞의 책.)

43) “一詠君詩一味深, 琅如秋月映瓊林”(엄흔, <次演之深字韻>, 十省堂集 下, 4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