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嚴昕의 삶 인간됨
2.2. 靑年期
2.2.4. 꿈의 挫折
엄흔은 여기서 의기소침하지 않고 서용을 기다리면서 임금의 은혜에 작은 힘이나마 보답하려고 하는 一片丹心을 여러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다.51) 이를테면 <新秋有懷>
에서는 “일편단심을 나라에 허락하였으니 / 떠나고 싶어도 다시 머무네.”52)라고 하였 고, <復示友人>에서는 “한 치 단심은 남아 있으나 / 일천 오라기 흰머리만 듬성하 네.”53)라고 하였다.
1538년 2월 드디어 엄흔은 관직에 서용되어 부수찬이 되었다.54) 하지만 오매불방 임금의 은혜에 보답하려는 그의 희망은 몇 해 지나지 않아 질병으로 물거품이 되고 말 았다. 1541년 3월 弼善으로 있을 때 우연히 병에 걸려 열흘 동안 조정에 나가지 못한 일이 있었다. 이때 동궁전에서는 내관으로 하여금 문병하게 하고 山海珍味를 함께 내 려주자 엄흔은 감격하여 다음과 같은 시로써 그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을 보여주었다.
진수성찬이 궁궐에서 내려와 절하며 받으니 珍羞拜受廚人賜
가난한 집에 內官이 와 놀라보네. 蓬戶驚看內使來
亥生이었는데, 亥는 五行으로 돼지에 속하고 쥐도 역시 돼지와 모양이 비슷한 것이므로 당시 의 논이 동궁을 저주한 것이라고 하였다. 이 사건으로 잘못 경빈 박씨가 연루된 혐의를 받아 아들인 福城君 李嵋와 함께 賜死되었다.( 中宗實錄 , 중종 22년 5월 24일조 참조.)
49) “엄흔은 김안로가 석방되어 돌아올 적에 正言으로 있었는데, 김안로를 석방하는 것이 불가하다고 한 그의 주장은 뒤에 김안로에게 미움을 받은 계기가 되었다.〔嚴昕當安老放還之時, 爲正言, 以爲 安老不可放, 以是見忤於安老.〕”( 中宗實錄 , 중종 33년 1월 29일조 참조.)
50) “安老旣得志, 用前嗛斥之, 公 罷居陽川, 先業者七稔, 杜門掃軌, 日以書史自娛.”(이발, <誌銘>, 十 省堂集 , 부록 10쪽.)
51) 엄흔이 자신의 재주를 부족하다 여기고 부끄러워하면서 君恩에 보답하려고 한 마음은 <至日早 朝>, <次杜少陵秋興八首 呈林注書大樹>, <呈境遇>, <重到讀書堂 示演之>, <次演之深字 韻>, <蒙敍後 示演之>, <送友人歸覲南鄕>, <呈大樹>, <林畔館 次蘇贊成韻>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52) “丹心曾許國, 欲去更淹留.”(엄흔, <新秋有懷>, 十省堂集 上, 35쪽.) 53) “一寸丹心在, 千莖白髮疏.”(엄흔, <復示友人>, 十省堂集 上, 58쪽.) 54) 中宗實錄 , 중종 33년 9월 23일조 참조.
이제 죽을 곳을 모르겠나니 從此未能知死所 어찌 하면 목숨 걸고 보살핌에 보답할까. 何方殞首答栽培55)
엄흔은 끝내 병이 낫지 않아 벼슬을 그만두었다. 당시 자신의 처지를 林億齡에게
“䟽廣처럼 어질지 못하는데 오히려 벼슬을 사직하고 / 逢萌의 자취와 다른데 문득 冠 을 걸어놓았네.”56)라고 하며 병으로 사직하게 된 자신의 모습을 부끄러워하였다. 한편 최연에게는 “죽기 전에 돌아왔으나 병이 이미 깊어졌고 / 더구나 노쇠한 발자취로 한 림원에 몸담았네.”57)라고 서운한 마음을 토로하기도 하였다.
1543년 엄흔은 병이 악화되어 그해 9월, 36세의 젊은 나이로 눈을 감으니, 사림의 꿈은 좌절되고 말았다. 그가 죽자 친척과 친구들은 애통하여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 이 없었다. 中宗은 부음을 듣고 인재를 안타까워하며 장례비용 은택을 내려주었다. 그 의 덕은 백성을 보살펴줄 만하였고, 재주는 나라를 다스릴 만하였다. 그러나 요절하여 재주와 덕을 베풀지 못하자 사림을 울리고 임금마음을 측은케 하는 말미를 주고 말았 다.58)
이상 엄흔의 十省堂集 의 시세계와 홍춘경의 <嚴公碣文>과 이발의 <誌銘> 등 을 통하여 그 삶을 조명하여 볼 때, 엄흔이 敬의 學問에 기초하여 十省의 생활을 일관 하며 사림으로서 인간적 삶을 이루려고 노력한 모습은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의 삶의 자세를 反求하는데 示唆하는 바가 크다고 본다.
55) 엄흔, <辛丑三月, 待罪弼善, 偶縈疾病, 旬休不仕, 東宮遣內官問病, 又賜膳餘珍味, 兢惶罔措. 吟成 一律, 以寓鏤骨之意>, 十省堂集 下, 28쪽.
56) “賢非疏廣猶辭位. 跡異逢萌便掛冠”(엄흔, <病遞弼善杜門調治 吟呈大樹>, 十省堂集 下, 28쪽.) 57) “未死歸來病已深. 又將衰跡厠詞林.”(엄흔, <次演之深字韻>, 十省堂集 下, 41쪽.)
58) “及其病卒, 親戚朋友聞之, 無不痛傷而流涕者. 上聞而惜之, 賜賻有加. 德宜覆民, 才宜器國, 而竟夭不 施, 泣士林而惻上情, 其有由矣.”(홍춘경, <嚴公碣文>, 十省堂集 , 부록 7쪽.) 지금까지 國器 詩人 靑年 嚴昕에 대한 생애를 洪春卿의 <碣文> 및 李潑의 <誌銘>과 그의 시를 중심으로 간략하게 나마 살펴보았다.
3. 十省堂集 刊行經緯와 編次 3.1. 刊行經緯
엄흔의 문집 十省堂集 은 1585년 그의 아들 嚴仁述59)이 定山(충남 청양군) 縣監으 로 재직할 때 처음 목판본으로 간행하였다. 이후 萬頃(전북 김제지역) 縣監으로 이임하 여 다시 刊行하였는데, 그 간행본이 일본으로 유입되어 현재 國立國會圖書館(청구기 호:820-20)에 소장되어 있다.
본고의 저본은 일본 국립국회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목판본이다. 현재 이 책은 서 울 국립중앙도서관에서 그 본을 마이크로필름(필름번호:M古3-2001-5)으로 소장하고 있는 자료이다. 이 책은 卷尾에 “萬曆乙酉秋七月定山縣開刊”이라는 刊記가 있고, “圓完 寺 常住”라는 後識가 있다. 이 刊記와 後識로 보아 十省堂集 은 1585년 7월에 처음 간행되었는데, 그 중 하나를 圓完寺 사찰에서 소장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 하나의 異本이 일본 內閣文庫에 소장되어 있다. 이 책 또한 서울 국립중앙도서 관에서 그 본을 마이크로필름(필름번호:古M3644-45)으로 소장하고 있는 자료이다. 그 런데 이 책은 刊本이 아닌 日人에 의한 傳寫本으로 卷上에는 友野瑍, 細井謨, 福知瀏 가, 卷下와 附錄에는 福知瀏, 細井謨, 江目圻 등이 교정하였다는 기록과 함께 “萬曆乙 酉秋七月定山縣開刊”이라는 刊記가 적혀 있으며, 卷上과 卷下의 首題 아래에는 각각
‘淺草文庫’라는 所藏印이 찍혀 있다.60)
한편 李好閔의 五峯集 에는 <書十省堂集跋>과 七言律詩 <題十省堂詩集後 - 時 十省胤嚴尹爲漢城判官>61) 1수가 실려 있다. <書十省堂集跋>에서 이호민은 저자 엄흔 과 부친의 친분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엄인술이 만경에서 재임할 때 선고의 유고를 한 부 가져왔다는 사실과 함께 만경에서 간행한 본이 전쟁으로 대부분 없어져 버린 사 실 등이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588년~1589년 즈음에 萬頃 縣監이 된 저자의 아들 旌善이 先君의 유고와 板刻을 가져와 印刊
59) 엄인술(1540~1606). 자는 述之, 호는 旌善이다. 通訓大夫 淮陽都護府使 鎭兵馬僉節制使를 지냈다.
또한 1581년부터 1586년까지는 定山縣監으로 재임하였다.( 定山邑誌 참조.) 60) 金圻彬, 十省堂集 해제, 한국문집총간 제32집, 고전번역원, 1998 참조.
61) 李好閔의 칠언율시 <題十省堂集後>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先友桐江一德星, 妙齡摛藻滿天庭.
洛中舊輩全淪沒, 京兆吾君是典刑. 遺稿茂陵金玉在, 微言江表茝蘭馨. 元眞所有餘殘馥, 雨露今年草又 靑.”(李好閔, <七言律>, 五峯集 卷4 한국문집총간 제59집, 376쪽.)
국립국회도서관본 내각문고장본 비고
重曰 重田 상권 2쪽 8열 4항 ‘曰’과 ‘田’
(이하 상권에서는 ‘상권’을 생략한다.)
力穡之榮 力穡之策 7쪽 7열 2항 ‘榮’과 ‘策’
秋省歛 秋省斂 7쪽 8열 15항 ‘歛’과 ‘斂’
躬自重穀 躬目重穀 8쪽 6열 1항 ‘自’과 ‘目’
하여 한 본을 보내주었다. 내가 공경히 받들고 삼가 읽어보니, 문집 말미에 洪石壁(名, 春卿)이 지은 碣文이 있었다. (中略) 萬頃에서 찍은 간행본이 전쟁으로 대부분 없어져 버렸으니, 다행이 두 집안의 자제들이 힘을 모아 다시 간행하여 영원히 전하여지는 것이 지극한 소원이다. 정선 은 이 말로써 반드시 마음이 유쾌할 것이며, 나도 이 말로써 선친을 우러러 존경할 것이다.62)
엄흔의 십성당집 은 간기와 李好閔의 <書十省堂集跋>의 여러 사실들을 유추해 볼 때, 그의 아들 엄인술이 定山 縣監 재직 당시에 유고를 정리하여 목판으로 初刊하 였고, 다시 萬頃으로 이임한 뒤 간행하여 유포하였는데, 이호민이 발문을 쓴 1601년경 에는 그 간행본이 상당 수 유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십성당집 은 일본 국립국회도서관본과 내각문고장본 두 본이 존재하고 있다.
하나는 2001년 국립중앙도서관에서 古典籍을 조사․영인할 때 국회국립도서관 소장 목 판본을 촬영한 마이크로필름(필름번호:M古3-2001-5)이다. 본고에서는 이를 가지고 저 본으로 삼았다. 다른 하나 역시 국립중앙도서관에서 내각문고장본인 필사본을 촬영한 마이크로필름(필름번호:古M3644-45)이다. 한국고전번역원에서는 이를 가지고 한국문집 총간 제32집 십성당집 저본으로 삼았다.
따라서 본고는 두 본을 면밀히 검토하여 보았다. 그 결과 내각문고장본은 국립국회 도서관 소장의 목판본을 후대에 와서 일본인이 필사하였으며, 그 필사하는 과정에서 잘못된 기록을 허다하게 남기었다. 따라서 본고의 아래 <표1>을 통하여 알 수 있는 바 본고의 저본이 한국문집총간 제32집 十省堂集 의 저본 내각문고장본보다 先本이자 善本임을 전체 五十六字의 異字를 근거하여 밝혔다. 아울러 두 저본 간의 異字는 본고 저본의 원문 순서에 따라 제시하고, 각각 비고를 통하여 의미를 비교하여 보도록 하였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