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對高麗 强壓策, 洪武帝의 貢馬 强要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홍무제의 고려에 대한 최초의 공마 요구는 군마의 충당이 라는 현실적인 이유에서 출발하였지만, 최초의 것을 제외하고는 점차로 고려를 통제하 여 북원과의 내통을 막고, 군사력을 저하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변질되어 갔다. 위의 표에서 볼 수 있듯이 홍무제가 고려에 공마를 강요한 때는 주로 고려와의 관계가 극 히 악화되었던 시기로, 홍무제는 고려에게 한 번에 보통 수천, 수만 필의 말을 준비하 고, 운송하게 하였고, 고려는 이로 인해 말의 준비와 운송에 여념이 없었다. 또한 홍무 제는 고려의 관리·부자와 같은 지배계층을 특정 대상으로 하여 말 1만 필을 징발하여 관리와 부자들의 자제를 시켜 요동에 보내라고도 명령하기까지 하는 등43) 고려로 하 여금 수많은 人力과 財貨를 동원하게 하였고, 이는 의심할 여지없이 고려 사회에 극심 한 폐단을 끼쳤다.44)

또한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엄청난 수의 공마 강요는 고려의 말 사정을 급속도로 악 화시켰다. 처음 공민왕대 명에 대한 공마가 막 실시되었을 때만 하더라도 징마의 어려 움에 대한 기록이 등장하지 않는 걸로 보아 말의 결핍 현상은 그렇게 까지 심각하지 않았던 듯하다. 하지만, 우왕대에 이르러 공민왕의 諡號와 우왕의 承襲을 위해 수시로 진헌해야 했던 말들, 해마다 명에 진공해야 하는 歲馬와 몇 년에 한 번씩 수천 필씩의 강요, 明使를 죽인 죄로 부과한 막대한 조공 등은 고려에서 말 부족 현상을 초래하였 다. 이에 고려는 수차례 명에 “말은 두 종류로 胡馬는 북방에서 온 것이고, 鄕馬는 나 라에서 나는 國馬로서 당나귀와 같아서 좋은 것을 얻을 수 없음”45) 등을 강조하며 말 의 減貢을 주청하였다. 하지만 이는 5년치 조공품을 완납하기 전까지는 받아들여지지 않아46), 이에 고려는 盤纏色을 설치하여 大小 문무관리에게서 말을 상납 받거나47), 부 족한 말들은 고관들의 良馬로 충당하고48), 관직과 품위에 따라 말을 헌납하게 하는49) 등 비상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홍무제는 또 한편으로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무력 으로 정벌하겠다는 위협을 가해 고려에서는 말의 질을 가리지 않고 양만을 맞추기에 43) 『高麗史』卷46, 『恭讓王世家』2, 공양왕 3년 4월 壬午條.

44) 수천 필의 말을 준비하고 운송하는 과정에서 소모되는 인력과 馬草, 도적의 위협 등은 쉽게 상 상할 수 있을 것이다. 명의 고려에 대한 공마 요구로 고려 사회가 입었던 폐해에 관해서는 조선 초기 공마로 인한 폐해를 다룬 남도영의 논문에서 상세하게 다룬 바가 있어 참고할 만하다.(남 도영, 「여말 선초 마정상으로 본 대명관계」(『동국사학』6, 서울: 동국대학교, 1960), pp.

26-74)

45) 『高麗史』卷134, 『辛祐列傳』2, 禑王 5년 10월.

46) 고려가 힘겹게 밀린 5년치 조공을 완납하자(『高麗史』卷135, 『辛祐列傳』3, 禑王 10년 10월) 곧바로 공민왕의 시호를 내리고 우왕의 승습을 인정하였다.(『高麗史』卷135, 『辛祐列傳』3, 禑 王 11년 9월) 이 이후 양국의 관계가 약간 정상화되어 막대한 세공도 줄여주고, 말도 진헌이 아 닌 구매의 형식으로 고려에게서 구입했다.(『高麗史』卷136, 『辛祐列傳』4, 禑王 12년 7월) 47) 『高麗史』卷134, 『辛祐列傳』2, 禑王 8년 2월.

48) “命宗親宰樞代言以上,各出馬一匹,以補進獻”(『高麗史』卷44, 『恭愍王世家』7, 공민왕 23 년 8월 壬子條)

49) 『高麗史』卷135, 『辛祐列傳』3, 禑王 11년 11월.

明初 對高麗 强壓策: 洪武帝의 貢馬 强要 (林常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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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급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고려에서 명의 京師 應天府(현 南京)까지 엄청난 거리를 걸어야했던 말의 운송 과정 중에서 말이 죽거나 병에 걸리는 일이 허다했다.50) 이는 홍무제에게 고려를 비난할 수 있는 좋은 빌미였고, 수차례 고려에서 進貢한 말의 질과 수를 가지고 고려를 압박하였다.51)

이처럼 홍무제의 고려에 대한 공마 강요는 고려 사회 전반에 걸쳐 큰 혼란을 일으 켰지만, 이보다 더 큰 폐단은 고려의 군사력에서 나타났다. 홍무제는 고려에 대한 공 마 강요를 통해 고려의 전력을 감소시키고, 이를 통해 유사시 고려가 명에 대해 행할 수 있는 위협의 정도를 상당 수준 저하시키려고 의도했고, 결국 그 효과를 제대로 거 둘 수 있었다. 실제로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우왕 말기, 명의 鐵嶺衛 설치와 관련하여 고려는 명과 심각하게 마찰을 겪기 시작하였고, 결국 홍무 21년(우왕 14년, 1388년)에 명과의 決戰을 다짐하고 요동 정벌에 나섰다. 이때 징발된 병사들의 수는 左右軍을 합하여 38,830명이었고, 말이 21,682필이었다.52) 당시 이 전쟁은 고려의 명운 을 건 一戰이었고, 여기에서 고려는 八道의 정병을 징발하며 당시 자신이 가진 모든 전력을 쏟아 전쟁을 준비하였음은 당연할 것이다.53) 하지만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고 려가 온나라의 힘을 다해 명과의 결전을 위해 준비한 말의 수가 21,682필에 불과했다 는 것이다. 이는 명에 진헌한 공마의 수와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만약 홍무제가 고 려에 공마를 강요하지 않았다면 고려의 말 사정은 더욱 나아졌을 것이지만, 그 동안의 수탈로 인해 고려가 준비할 수 있었던 말은 2만 필을 조금 넘는 수밖에 되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홍무제의 고려에 대한 공마는 그의 계획대로 고려의 군사력을 약화시켜 그 위협 정도를 낮추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홍무제는 고려와의 관계가 개선되면 공마를 중지하거나 賣買하는 형식으로 바 뀌는 데에서도 홍무제가 공마를 정치적 목적으로 활용했음을 엿볼 수 있다.

安翊, 柳和 등이 경사에서 돌아와 聖旨를 宣諭하며 말하길 “나는 말 5천필을 사려고 한다. 너는 고려에 돌아가서 먼저 재상들에게 말해 상의하고 결정한 후 국왕에게 말하여 라”54)

50) 홍무 6년 말 50필을 명에 운송했던 大護軍 金甲雨는 길에서 죽은 2마리를 자신의 말로 채웠다 가 홍무제의 힐책을 들었고, 후에 이 일이 고려에 알려지자 고려는 김갑우를 살해하였다.(『明太 祖實錄』卷85, 洪武 6년 10월 辛巳條; 『高麗史』卷44, 『恭愍王世家』7, 공민왕 23년 7월 辛卯 條.)

51) “내가 탈만한 것이 어디 있는가?”(『高麗史』卷135, 『辛祐列傳』3, 禑王 11년 12월)라며 고려 의 事大至誠을 의심하기도 하고, 말이 부실하다는 이유로 고려 사신을 錦衣衛에 가두기도 하였 다.(『高麗史』卷136, 『辛祐列傳』4, 禑王 13년 6월) 홍무제가 이렇게 한 원인으로는 이를 빌미 로 고려를 압박했던 것이 가장 크지만, “고려는 예부터 名馬가 나는 곳”이라고 여겼던 것도 적 지 않게 작용했던 듯하다.(『高麗史』卷136, 『辛祐列傳』4, 禑王 13년 5월)

52) 『高麗史』卷137, 『辛祐列傳』5, 禑王 14년 4월 丁未條.

53) 조선건국에서 중요한 威化島回軍과 관련된 『고려사』의 기록을 전부 신용할 수는 없지만, 실 제로 당시는 농번기였고, 전라도와 경상도는 왜적이 들끓었으며, 경기도 등은 성 수축으로 매우 피로한 상태였지만, 강대국 명과 맞서기 위해 싸울 수 있는 사람들을 모두 징집했음은 쉽게 상 상할 수 있다.(『高麗史』卷137, 『辛祐列傳』5, 禑王 14년 4월 庚子條.)

54) 『高麗史』卷136, 『辛祐列傳』4, 禑王 12년 11월.

中國史學會 第86回 學術發表會: 中國 社會와 文化의 歷史的 再照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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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왕은 홍무 17년(우왕 10년, 1384년)에서야 홍무제가 강요했던 밀린 5년치 조공을 완납하였다. 이 이후로 홍무제는 우왕 초기부터 지속적으로 요구해왔던 공민왕의 시호 와 우왕의 승습을 인정하며 고려와 관계가 정상화되었다. 또한 고려에 대한 공마 강요 에서 역시 기존의 고압적인 어투와 무력 위협에서 벗어나 위와 같이 매매의 형식으로 전환되었다.55) 위의 말 매매에 관한 기사를 통해 볼 때 홍무제가 고려에 공마를 강요 했던 주요 원인은 물론 ‘중징계’와 같은 형태로 고려를 압박하는 데에 있었지만, 현실 적으로 북원과의 대치 상황에서 시급했던 군마 부족 문제를 약간이나마 고려로부터 해결하려 했던 점도 적지 않아 보인다.

이처럼 홍무제의 공마 강요는 고려에 대한 통제를 통한 고려·북원의 단교, 고려의 군사적 위협 정도 저하에 초점을 맞추어 진행되었고, 여명관계가 극도로 악화되었던 禑王·昌王·恭讓王代에 들어서 더욱 심해졌다.

그림 1. 高麗末 王朝別 對明 貢馬 數56)

위의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공 민왕대 공마 수량이 92필에 불과했 던 것에 반해 우왕대 14,218필, 공 양왕대 2050필로 상당한 차이를 나 타내며, 이는 이 시기 대략적인 여 명관계를 투영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 비교적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던 공민왕대에도 비록 적은 수량이지만 고려를 압박하기 위해 공마를 요구했던 점은 특기할만하 다. 이는 공민왕 말기에 들어서 여명관계가 급속도로 냉각된 것과 큰 관련이 있다.

홍무제는 홍무 5년에 벌어진 북원과의 전쟁 嶺北之戰에서 대패한 이후 고려를 심하 게 의심하는 모습을 보이며, 고려에 사사건건 불만을 표하였다. 실제로 이 사건이 벌 어지기 이전, 홍무제는 처음 고려에 공마를 요구하고 말을 진공 받았을 때 말에 대한 별다른 의견을 피력하지 않았다. 그러나 홍무 6년부터는 본격적으로 진헌한 말의 수가 부족함, 질 낮음 등을 이유로 고려를 강력하게 힐책하는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57) 홍 무제의 이러한 행동은 마치 고의로 고려를 압박하기 위한 모습으로 보이며, 특히 홍무 6년 7월, 찬성사 강인유 등이 명에서 돌아오며 전한 홍무제의 宣諭 내용에서 그의 고 려에 대한 강한 분노를 살펴볼 수 있다.58) 먼저 홍무 5년에 明使 孫內侍가 고려에서 자살한 것부터, 고려 사신의 정탐 의심, 3年 1使, 공마가 너무 늦다는 등 다방면에서

55) 그해 12월에 명은 1필당 大緜布 8匹, 段子 2匹의 가격으로 고려의 말 3000필을 사갔다.( 『高麗 史』卷136, 『辛祐列傳』4, 禑王 12년 12월.)

56) 『高麗史』와 『明太祖實錄』 사료 정리.

57) 『明太祖實錄』卷85, 洪武 6년 10월 辛巳條.

58) 『高麗史』卷44, 『恭愍王世家』7, 공민왕 22년 7월 壬子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