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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명초 북원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홍무제가 고려를 통제하여 북원과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유사시 고려의 군사 위협 정도를 낮추기 위한 강압책으로 공마를 활용했 다고 보며, 이를 중심으로 당시의 여명관계를 조명해 보았다.

먼저 본고에서는 홍무제의 고려에 대한 공마 강요는 사료가 존재하지는 않지만, 홍 무 5년부터 시작했음을 살펴보았다. 홍무 5년의 “공헌의 기한이 늦어진 것은 본의가 아니다”, 홍무 7년의 “제주의 마필은 오늘 온다, 내일 온다하며 1년을 끌었다” 등의 기 사에서 이를 확인해 볼 수 있었으며, 고려에 대한 최초의 공마 요구는 고려를 압박하 기 위해 활용한 것이 아니라 북원과의 전쟁을 위한 군마 충당이라는 현실적인 요구에 서 비롯되었음을 알아보았다.

처음의 공마 요구와는 달리 여명관계가 극도로 악화되었던 우왕 이후, 홍무제는 본 격적으로 공마를 대고려 압박책으로 활용하기 시작하였다. 먼저 막대한 수의 말을 요 구하면서 응하지 않을 경우 정벌하겠다고 무력 위협을 가하며, 어렵사리 보내온 고려 의 말에도 양과 질을 탓하며 강도 높게 비난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려는 당연히 공 마의 준비에 여념이 없었고, 고려 사회를 피폐하게 만들었다. 또한 홍무제의 고려에 대한 공마 강요는 고려의 군사력을 심각하게 저하시켰다. 이는 명의 철령위 설치와 관 련하여 고려가 傾國의 역량을 다하여 준비한 군대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당시 고려 가 준비했던 마필의 수는 2만 필이 조금 넘는 수로 그간 고려가 명에 진헌한 수와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또한 홍무제는 고려와의 관계가 개선된 시기에는 공마 강요를 중 지하거나 매매의 형식으로 전환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고려에 대한 공마 강요는 홍무 제가 고려를 압박·통제하기 위해 실시했던 정책이었으며 그의 기대대로 고려와 북원 의 내통을 미연에 방지하고 고려의 군사적 위협 정도를 크게 낮출 수 있었다.

공민왕대에 여명관계는 전반적으로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지만, 홍무제는 이 시기에 도 강압책인 공마를 강요하였다. 이는 공민왕 말기, 즉 홍무 5년과 6년에 벌어진 명과 북원의 전쟁에서 명의 대패, 나하추의 우가장 급습 등 악재에 고려가 관련되어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본 연구는 홍무제의 고려에 대한 공마 강요가 고려와 북원의 내통을 미연에 방지하 고 고려의 군사적 위협 정도를 낮추었다는 것을 가정하여 진행하였다. 실제로 홍무제 는 공마 강요를 통해 고려를 강하게 압박하여 말의 준비에 여념이 없게 하였고, 유사 시 고려의 군사 위협 정도를 저하시키는 것에 성공하였음 살펴보았다. 하지만, 아쉽게 도 필자의 역량 부족으로 주로 고려와 명의 사료만을 활용하여 고려와 명 그리고 북 원의 삼각관계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에 보다 입체적으로 살펴보지 못 한 한계가 있 다. 이는 필자가 더욱 노력해야 하는 점으로 생각하며 이어지는 연구에서 보다 상세히 다루어보도록 하겠다.

明初 對高麗 强壓策: 洪武帝의 貢馬 强要 에 대한 토론문

김 경 록 (서울대)

고려말 여명관계를 말 문제로 분석한 본 발표는 한중관계에서 말문제가 가지는 정치, 군사, 경제적 측면을 다시 고려하도록 한 점에서 높이 평가되며, 말 문제에 관련 된 다수의 자료를 정리한 점도 의미가 있다. 발표자의 고민에 찬 연구발표에 대해 연 구의 완성도를 제고하는데 일조하는 목적으로 몇 가지 고려사항을 제기하여 토론의 역을 대신하고자 한다.

1. 말 문제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정립이 필요하다. 이는 본 발표뿐만 아니라 기존의 연구에서 다수 발견되는 문제점이기도 하다. 대상이 되는 말의 성격을 명확하게 구분 해야 한다. 본 발표의 제목과 같이 貢馬는 軍馬와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공마는 명 중심 국제질서에 편입된 고려가 책봉국 명에 대해 진헌으로 보내는 말이며 禮制의 명 분으로 치루어지는 가장 정치성 강한 측면이 있다. 이에 반하여 징발·차출·매매되는 軍馬는 책봉국이 조공국에 행하는 권리로서 토벌 및 징발 등 군사적 성격이 강한 측 면이 있다. 말과 유사하지만 소의 경우는 군사적 성격보다 경제적 성격이 강하다. 정 리하면 공마와 군마를 구분하지 않아 명에서 강요하는 것과 조공국으로서 의례 보내 야 하는 것을 혼동하는 우를 범한다. 명 중심 국제질서에서 징발과 차출은 징벌적 성 격에 한정되어 행해지는 것으로 고려가 요동정벌을 단행하거나 병자호란의 전리품 개 념으로 세폐를 강요한 사례가 있다. 발표자가 본문에서 지속적으로 언급하는 것처럼 명의 북원전쟁이 긴박하여 고려에 군마를 강요할 때는 당연히 매매개념으로 적용되는 것이며, 단지 사료에 구체적인 매매단가가 기재되어 있지 않을 뿐이다. 제목에서 언급 되는 공마는 당연히 남경까지 관압되어 황궁에 진헌되어야 하며 시기를 지체하거나 수량에 어긋남이 있으면 犯禮에 해당되어 불경하다고 인식되는 것이다. 이에 비해 군 마는 다르다. 군마는 오군도독부 가운데 좌군도독부의 정요위(요동도사)에 인계되면 된다. 또한, 명대 고려의 군마를 大同지역 전투, 吐番지역 전투 등에 활용하지는 않았 던 것으로 판단된다. 주로 몽골세력이 여전히 강고하게 존재한 요동지역의 군사력으로 활용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홍무제가 초기부터 馬政에 전력하여 명의 마정체계 는 구진체제를 중심으로 전역을 담당하도록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본 발표와 같은 주

中國史學會 第86回 學術發表會: 中國 社會와 文化의 歷史的 再照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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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의 연구에 있어 기본 개념의 정립이 중요하다고 판단된다.

2. 홍무제의 공마 강요라는 제목과 본문의 논지전개에 있어 홍무제의 국제질서에 대한 인식을 먼저 분석해야 한다. 홍무제는 원말 사회질서의 붕괴를 처절하게 경험한 인물이다. 이런 인물이 최고 권력자에 오르고 자신의 제국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 해 명확한 국제질서관념을 가졌다. 즉, 명 중심 국제질서의 유지는 전쟁과 확장을 지 양하고 예제에 기반한 안정을 추구했다. 이는 명 태조의 祖訓에 명시적으로 밝혀져 있 다. 홍무제는 명 건국이후 북원을 정벌하는 격문에 원의 정통성을 인정하고 천심이 떠 났기에 자신이 대신한다는 취지를 밝혔다. 이후 홍무 20년을 전후하여 명 중심 국제질 서가 정립되자 안정을 위협하는 세력과 요소에 대해 단호한 대응을 한다. 여명관계를 살펴보면, 명 중심 국제질서에 대한 고려의 편입정도를 명시적으로 확립하고자 하였으 며, 당시 몽골이 부재한 요동의 주 세력이었던 여진족에 대한 지배관계를 정리하고자 했다. 이 과정에 발생하는 것이 철령위 설치와 고려의 요동정벌 시도였다. 실제 명의 요동경략을 살펴보면, 요동보다 요서에 집중하여 여진족이 거주하는 한반도 북부는 주 요 경략대상도 아니었다. 물론 당시 명의 능력에 감당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 다. 이렇다고 한다면, 고려는 국가안보를 위해 기존에 한반도 북부 여진족에 대한 영 향력을 유지하려 하였으며, 명은 안정적인 요서·요동에 대한 지배력을 위해 그 동쪽의 여진족에 대한 관할 내지 복속을 강요하면서 양국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것이다. 실 제 북원의 존재에 대해 홍무제는 일정 정도 북쪽으로 퇴패시키는 수준에서 정리하고, 중원을 중심으로 명 중심 국제질서를 확고히 하고자 했다. 물론 고려, 북원의 관계 때 문에 일정시기 홍무제의 고려에 대한 경계심이 존재했지만, 홍무제의 고려에 대한 부 정적 인식의 핵심은 명 중심 국제질서에 고려가 모범적으로 편입되지 않았던 점에 기 인한다. 본질적으로 홍무제가 고려에 대해 강압적인 외교정책을 수행한 이유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있다.

3. 제도와 절차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특히 본 발표와 같이 말 문제를 정 치, 군사측면과 연관시켜 분석하기 위해서는 정치상황, 정치제도, 군사상황, 군사제도 에 대한 사전접근이 필요하다. 단적인 사례로 정치적으로 홍무 5년부터 공마를 강요했 다는 것과 군사적으로 요동정벌에 군사숫자에 비해 말의 숫자가 적은 것이 홍무제의 공마강요 결과라는 논지가 본문의 많은 분량에서 언급되고 있다. 홍무 원년에 대도를 함락한 이후 명과 고려는 실질적인 조공관계를 형성한다. 당연히 조공에 공헌이 따르 는 것이며, 공헌품목에 말이 존재하는 것이다. 조공은 朝覲과 貢獻의 조합이기에 이는 명의 강요가 아니라 조공국이 책봉국에 의례 보내는 것이며, 공헌품목의 품질과 수량 을 제도에 의해 검수하고 이를 준행하는 것이다. 군사적으로 요동정벌시 말 숫자도 군 사문제에 대한 재분석이 필요하다. 즉, 병력 수가 3만8천여 명이면, 말 숫자가 2만 필 이면 적정하다. 아니 오히려 좀 많은 말을 동원한 것으로 판단된다. 3만8천여 명 가운 데, 전투병력은 기본적으로 기병, 보병으로 구성되며, 기병이 고려군제에서 별도의 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