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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위계승제의 문제 -세선제와 세습제

거란 건국 초기에 있어서 황위계승에 관한 문제는 줄곧 연구자들의 주요 관심사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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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이들 가운데 일찍이 陳述과 姚從吾가 거란족의 보편적인 관습으로 북면관의 世選 에 관한 문제를 분석한 동시에 황위계승과의 관련성도 지적한 바 있다. 이후 대부분의 연구자는 세선제가 권력투쟁을 일으킨 중요한 원인 중에 하나라는 것에 동의하고 있 다. 그렇다면 세선제는 어떤 제도이며, 권력투쟁과는 어떤 연관성을 갖고 있는가?

거란족은 오랫동안 이합집산의 과정을 거치면서 점차 국가조직의 기구를 형성해갔 다. 이러한 과정 속에 각 부의 귀족들은 이른바 세선제를 통해 다양한 직위를 차지하 며 독점적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16) 趙翼은 일찍이 이러한 정황을 다음과 같이 지적 하였다.

요 초에 공신은 세습하였으나 세선의 예가 있었다. 대체로 세습은 그 자손이 저절로 세 습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었고, 세선은 그 자손 들 중에 재능을 헤아려 자리를 주는 것 이다. …… 세선관은 본래 거란의 舊制이며 요 태조 때부터 비롯된 것은 아니다. …… 공 이 큰 자는 대관으로 세선되고, 공이 적은 자는 소관으로 세선되었는데 공을 기리고 재능 을 헤아린 것이다.17)

여기에서 세선은 야율아보기가 건국하기 이전부터 내려온 “舊制”라는 것을 알 수 있 다. 이 제도는 일반적으로 대하씨 연맹시기에 형성되었다고 보는 데 이의가 없다. 왜 냐하면 최초 고팔부 시기에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각 부에서 용맹하고 지략 있는 자를 뽑는” 민주 선거제를 실시했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이후 대하씨 연맹시기 부터 연맹장은 줄곧 동일한 가족에서 세선되었고, 요련씨 연맹시기에 이르러서는 夷離 菫18) 조차 세선되었다.

부족 연맹시기에 거란 사회는 통상 친형제 혹은 종형제 간에 연맹장의 계승이 이루 어졌으며 3년에 한 번씩 선출하였다. 세선제는 민주 선거제에서 세습제로 발전하는 과 도기적인 단계이자 역사적 과정이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세선제는 부족연맹시기부터 건국 초기까지 통용되던 원칙으로 적장자에게 계승되는 세습제와는 달리 세선의 집안 에서 능력 있는 자를 선출하는 방식이었다. 따라서 거란 건국 이전에 연맹장과 각 부 락의 수령은 모두 세선에 의해 선출되었다. 그리고 야율아보기가 요련을 대신해서 국 가를 세운 후에도 예부터 내려오던 세선의 전통은 여전히 거란 사회를 지배했다. 따라 서 이러한 계승방식은 요대 전기에 황위계승을 둘러싼 권력투쟁이 일어난 주된 원인 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요 태조 야율아보기의 통치기간에 형제들이 세 차례에 걸쳐 반란을 일으켰 는데 그 이유는 바로 세선제에서 기인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바로 전통적인 습속의 보 호망 속에서 종종 분에 넘치는 일을 하면서도 책망 받기는커녕 심지어 믿는 데가 있 어 두려워하지도 않았다.19) 왜냐하면 전통에 따라 여러 형제가 모두 연맹장으로 선출

16) 漆俠,『漆俠全集』第8卷, 河北大學出版社 2008, pp. 115~116.

17) 趙翼 著, 王樹民 校證,『卄二史箚記校證』, 中華書局, 2001. pp. 590-591.

18) 요련씨 연맹 시기에 각 부락의 수령을 이리근이라고 불렀고, 漢譯으로는 大人이라고 했다. 그 들은 연맹의 중대한 사무를 결정하는 권한을 가졌으며 연맹의 수령을 임명하고 해임할 수도 있 었다.

遼 前期 權力鬪爭의 樣相 (나영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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될 자격이 있었고, 스스로 그 자격을 잃었다고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반복해서 반란 을 일으킨 것이다. 더욱이 야율아보기조차 반란을 진압한 후에도 전통적인 번시제를 거행해서 합법적인 연임의 신분을 표명했을 뿐 형제들에게 극형을 처해서 반란의 싹 을 완전히 제거하지 않은 것도 이러한 전통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날갈, 할저 등이 일 으킨 형제들의 반란은 바로 이런 세선제의 전통에 입각하여 황위를 쟁탈하려던 권력 투쟁이었던 것이다.

다음은 동란왕 야율배가 태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차자인 천하병마대원수 야율덕광이 즉위하였는데 이는 적장자 계승제와 세선제의 충돌이라고 볼 수 있다. 요 태조는 일찍 이 중원의 영향을 받아 적장자 계승제를 확립하고자 했으나 갑자기 죽는 바람에 보수 적인 순흠황후가 이변을 연출하여 야율덕광을 즉위시켰다. 『契丹国志』「太宗纪」에 따르면

두 아들을 말에 태워 장막 앞에 세우고 여러 추장들에게 이르러 말하기를 “나는 나의 두 아들을 모두 사랑한다. 그러므로 내가 어느 아들을 황제로 세워야 할지 모르겠으니 자 네들이 황제의 대통을 이을 수 있다고 생각되는 자를 선택하여 그 앞으로 나가서 말고삐 를 잡도록 해라.” 추장들은 그 뜻을 알아채고 앞 다투어 황제(야율덕광)의 고삐를 잡았다.

20)

라고 한다. 대부분의 신료들은 순흠황후의 뜻을 거스를 수 없었고, 결국 그녀의 각본 대로 차자가 황제에 올랐다. 그러나 일부 거란 귀족은 야율배가 즉위해야 한다고 주장 했는데 그 이유는 적장자가 제위에 우선해야한다는 것이었다. 예컨대 『요사』「耶律 安搏传」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태조가 붕서하고 순흠황후가 칭제하며 대원수로 대통을 잇게 하려고 하자, 야율질리가

“황제의 자리는 응당 적장자가 우선입니다. 지금 동란왕이 조정으로 오고 있으니 당연히 황제로 세워야 할 것입니다”라고 건의하였다. 이 일로 태후의 뜻을 거슬렀다. 동란왕을 따 랐다는 죄목으로 조서를 내려 감옥에 가두고 고문을 가해 신문하다가 불로 지지는 형벌이 가해졌으나 자복하지 않자 죽이고 그 집안을 籍沒시켰다.21)

여기에서 야율질리의 죽음은 신구세력 간에 권력투쟁이 격렬했다는 것을 설명할 뿐만 아니라 漢制가 거란 귀족들에게 일정한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는 것도 나타낸다. 그러 나 순흠황후는 수구세력의 이익과 권력을 위해 전통적인 세선제에 의지해서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고자 했다. 따라서 이번 사건은 신구제도의 혼란 때문에 빚어진 권력투 쟁이었다고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요대 전기에는 황위계승에 있어서 세선제의 영향이 매우 컸다. 황제 본 인도 세선제의 수혜자였기 때문에 이 전통을 어느 정도 허락될 수밖에 없었고, 그 결 과 적장자 계승제가 일찍이 정착되지 못했다.22) 세선제는 비록 품성이 좋고 능력이 19) 尹承琳,「論遼初統治階級內部鬪爭的特點和性質」(『遼寧大學學報』1983年 2期)

20)『契丹国志』권2,「太宗嗣盛皇帝 上」, p. 13 21)『遼史』卷77,「耶律安摶傳」p. 1260.

22) 李敬武·董劍虹,「遼代前期統治階級內部鬪爭問題新探」(『社會科學輯刊』 1996年 1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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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난 사람을 선발할 수 있다는 장점은 있으나 종종 종실 諸王들이 분수에 넘치는 야심으로 기회를 노렸기 때문에 안정된 통치 질서를 확립하기 어려웠다. 이런 종류의 계승제도는 상당히 복잡했으므로 황위계승 과정에서 분규가 발생했던 것이다. 결국 이 러한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서 적장자 계승제가 당연히 생길 수밖에 없었고, 경종 이후 에 비로소 그 제도가 확립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