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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初 東아시아의 情勢와 麗明關係

14세기 중엽부터 말까지는 동아시아의 정세가 급변하는 시기로, 이 시기 한중관계에 서도 역시 상당히 복잡다단한 면모를 보인다. 이 시기 한중관계에서 貢馬가 어떤 역할 을 했는지 알아보기 이전에 이 시기 동아시아의 정세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는 선행 작업이 필요하다.6)

선의 입장에서는 경제적 측면에서 그 가치를 인정하기 어려웠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경제 사적인 측면에서 당시의 공마를 살펴보는 것도 매우 의의가 있지만, 당시 공마가 시행된 국제정 세에 대해 논문의 결론 부분에서 소략했던 점이 안타깝다. 또한 명·고려·조선 이 삼자 중에서 공 마의 교역에서 주도권을 쥐고 강제적으로 요구했던 명의 입장보다는 주로 고려와 조선의 입장에 서 살펴보아 명에서 과연 무슨 목적으로, 어떠한 이유에서 고려와 조선에 그러한 무리한 요구를 했는지 알아 볼 수 없는 문제점도 존재한다.

5) 李岭, 「明朝高丽的贡马之争与明丽关系」(『内蒙古大学学报(哲学社会科学版)』44-6, 中国 内蒙 古: 内蒙古大学, 2012), pp.100-106. 논문은 명초 고려와의 외교 관계에서 공마로 일어난 사건들 에 대해 집중적으로 논술하여 당시 여명관계의 잘 알려지지 않은 일면을 공개하였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측면, 즉 명의 고려에 대한 공마가 가지는 정치·군사 등 의 의의에 대하여는 다루지 않은 한계가 있다.

6) 이 시기 국제관계는 대륙에서의 원명교체, 한반도에서의 고려·조선의 교체가 동시대에 출현하고 새로운 국제질서의 수립 등 수많은 문제로 일찍부터 학계의 많은 관심을 받아왔다. 국내에서는 강상운, 「여명(한중) 국제관계연구」(『중앙대 논문집』, 서울: 중앙대학교, 1959), pp.235-268;

고석원, 「여말선초의 대명관계」(『고려대학교 석사학위논문』, 서울: 고려대학교, 1977); 황운 룡, 「고려 공민왕대의 대원명관계 – 관제변개를 중심으로」(『동국사학』14, 서울: 동국대학교, 1980), pp1-14; 김성준, 「고려와 원·명관계」(『한국사』8, 서울: 국사편찬위원회, 1981), pp.

177-203; 황원구, 「여말선초의 대명관계」(『한국사의 재조명』, 서울: 민성사, 1986), pp.

305-311; 김순자, 「여말선초 대원·명관계 연구」(『연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서울: 연세대학 교, 2000); 김경록, 「공민왕대 국제정세와 대외관계의 전개양상」(『역사와 현실』64, 서울: 한국 역사연구회, 2007), pp. 197-231; 「여말선초 국제질서의 변화와 조·중관계」(『세계 속의 한국 사』, 파주: 태학사, 2009), pp. 155-184 등의 훌륭한 연구 성과가 존재한다. 외국의 연구로도 張 士尊, 「高麗與北元關係對明與高麗關係的影響」(『綏化學院學報』1期, 中國 黑龍江: 綏化學院, 1997), pp. 48-50; 薛瑩, 「明洪武年間明朝與高麗朝關係略論」(『社會科學戰線』4期, 中國 吉林, 吉林師範學院, 1997), pp. 165-169; 刁書仁, 「洪武時期高麗李朝與明朝關係探析」(『揚州大學學 報』8卷1期, 中國 江蘇, 揚州大學, 2004), pp. 58-63; 姜龍范劉子敏, 「明太祖在位時大明與高麗 的關係」(『延邊大學學報』2期, 中國 吉林: 延邊大學, 1998), pp. 61-65; 末松保和, 「麗末鮮初に 於ける對明關係」(『青丘史草』1, 日本 東京: 笠井出版印刷社, 1965), pp.295-485; 宮崎市定, 「洪 武から永樂へ - 初期明朝政權の性格-」(『東洋史研究』27-4, 日本 東京: 京都大學, 1969) 등이 있다. 기존의 연구 성과들은 각 학자들마다 자신의 논지에 따라 매우 설득력 있게 이 시기 한반 도와 대륙의 국제관계를 논술하였다. 대체적인 관점은 명초 홍무제의 고려에 대한 감정과 정책 을 크게 두 가지로 보고 있다. 즉, 공민왕대의 전반적으로 우호적인 감정에서 우왕 이후의 적대

明初 對高麗 强壓策: 洪武帝의 貢馬 强要 (林常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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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8년 正月, 朱元璋은 明玉珍, 陳友諒, 張士誠 등의 群雄을 물리치고, 應天府에서 稱帝하며 明을 건국하였다. 아직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던 元은 같은 해 8월, 명 의 장수 徐達, 常遇春 등에 의해 수도인 大都가 攻破되며 漠北으로 도주하였다. 이로 서 명에 의해 中原은 宋代 이래로 흔들리다가 붕궤된 漢族 위주의 中華秩序가 재건되 었다. 하지만, 원의 수도가 함락되었다고 해서 곧바로 명의 안정된 통치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원의 황실은 다시 본거지인 몽골 고원으로 물러갔을 뿐, 北元이라는 이름으로 虎視耽耽 중원으로의 捲土重來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고, 納哈出와 같은 원의 遺將 등 원의 잔존 세력이 여전히 신생국 명에 강력한 위협을 가하고 있었다.

중국 대륙에 이와 같은 큰 변화가 발생하자, 한반도의 고려에서 역시 많은 변화가 나타났다. 당시 고려에는 忠烈王 이래로 많은 親元派들이 존재했다. 하지만, 고려 국왕 이었던 恭愍王은 원 황궁에서 質子로 있을 시기부터 원의 부패를 몸소 경험하여 장차 그의 몰락을 예감하였다. 또한 왕권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奇氏 세력과 친원파들의 제 거는 안정된 통치를 위해서도 시급한 문제였다. 이렇듯 반원의 뜻을 품고 있으며, 왕 권 강화를 위해 친원파의 일소를 계획하고 있던 공민왕은 元末 漢族들의 봉기로 원의 세력이 약해진 틈을 타 그 속박에서 벗어나고자 많은 노력을 하였다.7) 洪武 元年(공 민왕 17년, 1368년) 명의 사신 偰斯가 고려에 도착해 명의 건국을 알린 후, 공민왕은 본격적으로 親明反元 정책을 실시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공민왕의 노력은 한족 중심 국제질서의 재편을 희망하던 홍무제의 의도에 부합하여, 홍무제는 초기에 고려에게 많 은 호감을 보이며 여러 우호적인 정책을 사용하였다.8) 공민왕 말기 고려를 강력하게 힐책한 것을 제외하고는 전반적으로 우호적인 관계였지만, 우왕대에 이르러 고려와 북 원의 내통을 의심한 홍무제의 고려에 대한 시의심은 극에 달해 각종 악의적인 정책을 활용하기 시작하였다.

아래 『明太祖實錄』의 기사들은 홍무제가 고려를 비난하는 내용들로 아래의 내용 을 통해 대체 그가 고려에 대해 어떤 불만을 가졌는지 엿볼 수 있다. 또한 이는 홍무 제의 언행을 직접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詔書 등의 형식으로 한번 여과된 『高麗史』

의 기록과는 또 다른 면을 보인다. 시간 순서에 따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9)

적인 감정이라는 것이다. 본문에서는 홍무제의 대고려 압박책인 공마를 설명하기 위한 기초 작 업으로 시대적 배경을 간단히 언급한 것으로 대략적인 내용만 살필 뿐, 상세한 내용에 관해서는 생략토록 한다. 이 시기의 연구에 관해서는 상술한 연구자들의 논문을 참고한다.

7) 공민왕은 원의 속박에서 벗어나고자 朱元璋, 張士誠, 陳友諒 등 漢人 群雄들이 할거할 때부터 이미 이들과 관계를 맺으려고 노력하였다.(김혜원, 「고려 공민왕대 대외정책과 한인군웅」(『백 산학보』, 서울: 백산학회, 1998), pp. 61-120)

8) 예외적으로 명에서 먼저 사신을 보내 명의 건국을 알렸던 것(『明 太祖實錄』卷34,洪武 元年 12月 壬辰條), 수많은 하사품을 보내며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다정하게 권유하는 듯한 어투(『高 麗史』卷42, 『恭愍王世家』5, 공민왕 19년 5월 甲寅條) 등은 공민왕 死後 여명관계가 급속히 냉 각되어 고려를 다방면에서 압박하던 것 등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9) 『高麗史』의 기록은 홍무제의 말을 기록관이 詔書나 勅書의 文語體로 변환하는 과정에서 순화 되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비교적 1차 사료에 가까운 『明太祖實錄』의 내용을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한다.

中國史學會 第86回 學術發表會: 中國 社會와 文化의 歷史的 再照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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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에서 京師에 사신을 보내왔는데, 그 죽은 故王 王顓(恭愍王의 諱)의 시호를 청하기 위함이었다. 上께서 顓이 그 신하에게 弑害된 것으로 중서성 신하에게 勅書를 내리셨다.

“……즉위 초에 四夷 酋長에게 보내 중국에 君主가 생겼음을 알게 하였다. 고려 국왕 왕전 은 명을 듣자마자 稱臣하고 入貢하였는데, 이는 힘을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기뻐 서 한 것이다. ……(공민왕이) 신하에게 시해되고 또 몇 년인가? 이제야 시호를 청함은 우 리나라의 명을 빌려 그 백성을 鎭撫하고, 시해의 흔적을 덮으려는 것으로, 청하는 것이 정 성스럽지 않다. 주어서는 안 된다.10)

고려국에서 사신을 보내와 내년의 正旦을 하례하였다. ……상께서 중서성 신하에게 말 씀하시길 “……지금 왕전이 시해되고, 간신들이 왕권을 빼앗았다. 春秋의 義에 따르면 亂 臣賊子들은 모두가 그들을 죽여야 하는데 또 무슨 말을 하겠는가?……내년에 금 백근, 은 만냥, 良馬 백필, 세포 일만을 조공하고, 가두어둔 遼東의 백성을 모두 돌려보내 왕의 진심 을 보이고, 政令을 행한다면 朕은 의심하지 않겠다. 그렇지 않으면 임금을 시해한 도적들 의 행위가 장래에 내 변경을 간사하게 속인다면, 고려의 백성에게 큰 화를 일으키게 될 것 이다.”11)

고려의 사신을 돌려보내며, 그에게 勅諭하셨다. “너는 간신의 꾀임에 넘어가 어쩔 수 없 이 와서 나를 속였다. 지금 너를 돌려보내니, 마땅히 짐의 뜻을 元兇에게 말하여라. ‘너는 중국의 죄 없는 사신을 죽였으니, 그 죄는 깊다. 너희 나라 執政大臣이 오지 않고, 歲功을 약속대로 바치지 않으면 죄를 물으러가는 군대를 면할 수 없을 것이다.’”12)

상께서 (遼東邊將 潘)敬, (葉)旺에게 璽書를 내리셨다. “……上奏한 고려의 行禮는 공손 하게 존경을 나타낸 것이 아니라 間諜의 싹이다. 더욱이 고려는 옛날에 東夷라 불렸다. 聖 人의 말씀에 夷狄은 禽獸이므로, 가볍게 사귀는 것은 반드시 멀리하고, 무겁게 사귀는 것 은 반드시 끊어야 한다고 하였다.”13)

고려가 약속대로 조공을 바치지 않자 詔書를 내려 물었다. “……짐은 원을 대신해 천하 를 다스린지 13년이 되었다. 四夷가 入貢하는데 오직 세 곳만이 예전과 같고, 오로지 너희 동이만이 滄海를 믿고 안에서는 그 왕을 시해하고 밖으로는 백성의 禍를 만들고 있다.”14)

상께서 (요동변장 반)경 등에게 말씀하시길 “……지금은 그 역적이 그 임금을 시해하고 또 조정의 사신을 살해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사신을 보내와 거짓을 꾸며 믿을 수 있다고 하였다.”15)

요동도지휘사 반경 등에게 勅諭하시길 “고려의 간신 李仁(李仁任)이 그 임금을 시해하였 으나, 신하와 백성들이 그 당이 많음을 두려워하여 굴복하여 따르길 지금까지 몇 년이 되 었다.……지금 이인이 비록 다스림을 따르겠다고 하나 길어지면 어떻게 될지 모르니, 卿과 여러 장군들은 그것에 신중해라. 고려의 공헌이 한 가지 물건이라도 약속과 같지 않다면 국경 밖에서 거절하고, 변경을 잘 지키며, 그 속임에 넘어가지 마라”16)

요동도지위사 반경, 엽왕에게 칙유하시길 “卿 등은 고려 賀正使를 12월 중순에 입경 금지하였다. 그 사신이 요동에 이제 왔는데, 어찌 기한 내에 경사에 도착하겠는가? 그 계 10) 『明太祖實錄』卷111, 洪武 10년 정월 丁未條.

11) 『明太祖實錄』卷117, 洪武 10년 12월.

12) 『明太祖實錄』卷121, 洪武 11년 12월.

13) 『明太祖實錄』卷124, 洪武 12년 4월 庚申條.

14) 『明太祖實錄』卷129, 洪武 13년 정월 癸巳條.

15) 『明太祖實錄』卷132, 洪武 12년 7월 甲午條.

16) 『明太祖實錄』卷132, 洪武 14년 12월 乙丑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