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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활동을 위한 計劃과 方法

Dalam dokumen 中國 社會와 文化의 歷史的 再照明 (Halaman 100-105)

1913년 여름, 원세개의 전제집권에 대항해 일어난 2차 혁명이 실패하자, 상당수의 혁명파 인사들은 일본 등 해외로 망명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北京의 국회에 는 당시까지 원세개를 지지했던 進步黨을 비롯한 일부 國民黨 인사들만이 남게 되었 다. 그러나 원세개가 국민당의 해산에 이어 국회마저 해산하자, 진보당 인사들도 원세 개와 대립적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더구나 국내의 대다수 언론도 폐기처분되거나 원 세개정부에 장악되어 여론을 대변하던 기능은 상실하였다. 물론 이러한 원세개 정부의 통제와 감시 속에서도 상해의 조계지를 중심으로 일부 지식인들은 미약하나마 反원세 개 여론을 형성하기 위해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한편, 망명지였던 동경을 중심으로 구사연구회가 조직되어 각 정치세력의 연합을 촉 구하자, 국내에 남아있던 진보당과 舊國民黨의 인사들도 여기에 호응하였다. 1914년 말, 동경에서 상해로 돌아온 殷汝驪8)은 동경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국내에 남아있던

7) 蔣永敬,「歐事硏究會的由來和活動」(臺北:『傳記文學』34, 1979-5), pp.64-72.

8) 殷汝驪(1883-1941): 字는 ‘鑄浦’,‘鑄夫’ 등이며 浙江省 출신으로 殷汝耕의 형이다. 와세다 대학 經濟科를 졸업하고 민국 초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구사연구회의 發起人 6人중 한명이며, 東京 大

新文化運動의 基源으로서 歐事硏究會의 國內活動計劃 (이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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計劃 甲 오늘날 뜻있는 인물들에 대해 폭넓게 연락하고 인재를 모아 주장을 일치한다.

乙 오늘날의 政局에 대해서 온건적인 개선책을 마련하여 점차 여론이 同情하도록 만든다.

方法 甲 甲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완급을 조절하여 실패하지 않는 방법을 수립한다. 學校 實業 乙 乙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도 두 가지 방법이 있다. 日報 雜誌

구사연구회 회원들과 함께 국내활동계획을 작성했는데, 이로서 구사연구회의 국내활동 이 시작되었다. 이들은 작성한 활동계획을 곧 동경으로 보내 해외의 회원들로부터 구 사연구회의 국내 운영에 대한 경비 등의 지원을 희망했다. 이 계획에서 구사연구회의 국내 활동 범위가 구체적으로 드러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표1>국내 활동을 위한 계획과 방법의 주요 내용9)

<표1>에서와 같이, 국내활동계획은 구사연구회의 ‘協議條件’10)을 국내에 적용하고자 한 시도였다. 그래서 일본 등 해외에서 추진했던 學校, 實業, 日報, 雜誌 등의 성과를 국내에 적용하기 위해 구체적인 실행 방법을 제시하였다. 예를 들어, 학교의 경우 法 政專門學校를 상해에 설립하는 방법을 제시했는데, “상해 中國公學, 神州法政專門學校 및 復旦學院의 사례를 조사하여 만약 개학할 수 있다면, 5백 명의 학생은 족히 수용할 수 있다”라면서 학생을 수용하여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자고 제안하였다. 실행 방법으 로 학교 설립에 필요한 경비도 상세히 제시했는데, “학교를 설립하는 비용으로 洋 2·3 千元 정도가 필요하며, 매년 보조비로 많아도 1萬元 정도만 지원하면 된다”며 구체적 인 경비지원을 요청하였다.11)

그런데 이렇게 학교를 설립해야 하는 또 다른 목적이 있었다. “개학한 후에 某種의 학과나 학회를 만들면, 학회를 통해 뜻있는 인물들과 연락할 수 있다. 이것은 현재 유 일무이한 방법이다”라고 하였다. 물론 이미 국내에 “谷鍾秀(九峰), 歐陽振聲(駿民), 楊 永泰(暢卿) 등이 일찍이 북경의 丁佛言, 劉松生 등과 학회를 발기했으나, 정부의 정탐 으로 어려움에 처했기 때문에 새로운 방법을 취할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제 시한 새로운 방법은 “학교에서 學會라는 방법을 채택하면, 목적을 쉽게 이룰 수 있으 며 정부의 의심을 피할 수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이렇게 설립한 학교로 “수많은 청 년들을 양성하여 앞으로 정치에 조력하도록 하는 것”이라면서, 실제로 “이 보다 더 나 은 방법은 없다”12)고 하였다.

森의 浩然蘆와 政法學校 의 敎員으로 활동하였다.

9) 蔣永敬,「歐事硏究會的由來和活動」, pp.66-67.

10) 구사연구회는 1914년 8월 13일 동경에서 개최한 발기인 회의를 통해, 네 가지 ‘協議條件’을 기 초하였다. 첫째, 당파를 구분하지 않고 인재의 집중을 도모한다. 둘째, 中山先生에 대해서 존경주 의를 취한다. 셋째, 국내에 대해서는 漸進的으로 침투[浸潤]하는 방법을 주장하며, 각종 방법을 사용해 뜻을 하나로 모을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한다. 넷째, 군사진행에 대해서는 군사담당자들이 비밀로 상의한다. 蔣永敬, 歐事硏究會的由來和活動 , p.64.

11) 蔣永敬, 歐事硏究會的由來和活動 , p.67.

12) 蔣永敬, 歐事硏究會的由來和活動 , p.67.

中國史學會 第86回 學術發表會: 中國 社會와 文化의 歷史的 再照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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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1>에서와 같이, 국내활동계획을 실행하기 위한 방법은 학교 이외에도 실업, 일 보, 잡지 등을 제시하였다. 우선 실업은 “一大圖書公司를 설립하여 실업의 기반을 다 져야 한다”면서, 이러한 大圖書公司는 “인재들을 끌어 모으기에 가장 적합한 방법으 로, (출판 사업을 통해) 근거지를 확보하며, 은거할 수도 있기 때문”이라 하였다.13) 따 라서 실업을 도모하는 것은 국내활동을 실행하는데 필요한 자금 조달과 근거지의 확 보가 목적이었다.

다음으로, 일보에 대해서는 “매우 중요하여 長久의 계획을 시작할 수 있는” 방법이 라고 하였다. 경비문제에 대해서 “50,000元으로 시작할 수 있으며, 매월 1,500元, 매년 18,000元”이면 가능하다고 보았다. 특히 일본에서 설립한 “명명편역사에서 납활자[鉛 字], 구리활자[銅模] 등 필요한 설비들을 이미 구매하여 인쇄에 사용할 수 있으니, 이 또한 기회”라고 하였다. 따라서 日報에 대한 계획은 국내에서 거의 소멸하다시피 한 反袁世凱 여론를 부활하고, (이들에 대해) 동정 여론을 형성하는 방법을 실현하고자 한 것이다. 특히 일본에서의 각종 설비를 국내에서 재활용하려 한 점에서 일본의 성과 를 국내로 이전하는 계획이었음을 알 수 있다.

끝으로, 잡지의 발행계획도 인재를 모으고 여론을 형성하는 목적에서는 같은 것이었 다. “上等 社會人의 지식을 관통하고, 동지들의 주장을 통일시킬 수 있기 때문에 역시 중요하다”고 하였다. 그런데 국내활동계획에서 언급한 잡지의 경우, 실제로는 이미

『正誼雜誌』가 발행되고 있으니 이를 적극 지원하자고 제안하였다. 물론 이러한 방법 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당시 혁명파를 비롯한 정계 및 지식계에 널리 알릴 필요가 있 었다. 따라서 구사연구회의 기관지였던『甲寅雜誌』에『正誼雜誌』, 明明編譯社 등 구 사연구회의 활동과 관련한 광고가 실리게 되었다.

Ⅲ.『正誼雜誌』에 대한 원조계획

『正誼雜誌』는 국내에 남아있던 국민당 온건파 谷鍾秀, 楊永泰 등이 1914년 1월 상 해에서 “사회를 지도하고 정부에게 충고한다”는 목표를 표방하며 창간했다. 戈公振의

『中國報學史』에서도 “원세개 정부에 실망해 발행했다”라고 하였다.14) 또한 李劍農은

『正誼雜誌』에 대해, “국내에 남아있던 국민당의 溫和派는 국회가 해산되기 이전, 이 미 일부가 진보당과 제휴를 하고 있었으며, 帝制問題가 발생하자 兩派의 관계는 더욱 친밀해졌다. 당시 양파가 출판한 언론으로는 國民派의『正誼雜誌』, 進步派의『中華雜 誌』, 歐事硏究會派의『甲寅』이 있었으며, 후에 양파가 공동으로『新中華』를 발행하 여 서로 호응하였고, (정치적 주장이) 점차 일치하는 경향이 있었다”15)고 하였다. 실제

13) 蔣永敬, 歐事硏究會的由來和活動 , p.67.

14) 方漢奇,『中國近代報刊史』(太原: 山西敎育出版社,1981), p.712.

15) 李劍農,『最近三十年中國政治史』(臺北: 臺灣學生書局, 1976), p.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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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正誼雜誌』는 谷鍾秀, 楊永泰 등 국민당 온건파를 주체로 하여 張東蓀, 丁佛言, 孫 洪伊 등 진보당 인사들이 참여해,『正誼雜誌』를 통해 양당의 융화와 통일을 실현한 것으로 평가받는다.16)

『甲寅雜誌』에 실린『正誼雜誌』광고는 1915년『甲寅雜誌』가 상해로 이전하여 발 행한 제6호(6월 10일 발행)부터 제8호(8월 10일 발행)까지 세 차례에 걸쳐 동일한 내 용으로 실려 있다. 다시 말해,『甲寅雜誌』는 구사연구회의 국내활동계획에 근거하여

『正誼雜誌』의 광고를 실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시기『甲寅雜誌』와『正 誼雜誌』는 동시에 상해에서 발행하게 되었고, 정치적 입장에서 유사했다는 의미가 된 다. 따라서 우선『甲寅雜誌』에 실린『正誼雜誌』의 광고를 분석하여 양자의 공통점과 차이점에 대해서 알아볼 필요가 있겠다.『甲寅雜誌』에 실린『正誼雜誌』의 광고는 다 음과 같다.

『正誼』편집자 谷鍾秀

- 본 잡지가 출판한 이래 국내외 각계의 환영을 받아 널리 판매된 점에 감사드립니다.

- 독자들의 바람을 반영하여 제 7호부터 크게 쇄신하였으니 구매자들은 주의하기 바랍 니다.

1. 본 잡지의 저자들은 모두 在野의 이름 있는 政客이며 날카로운 안목으로 사회를 지 도하고 정부에 충고하는 책임을 갖고 있다.

2. 본 잡지는 論說, 時評, 譯述, 記載, 通信, 文藝, 雜纂 등 일곱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으 며, 앞의 다섯 부분은 모두 政局에 대한 거시적 안목과 관심으로 서술하여 정치에 필요한 문장이라 할 수 있다.

3. 본 잡지는 공평한 주장과 온건한 언론을 발표하며, 一黨의 거짓된 사견을 따르지 않 고 정론의 모범이라 할 만하다.

4. 본 잡지는 매 期 마다 약 15만자로 그 내용이 풍부하여 近來의 잡지들 중 특별한 점 이라 할만하다.17)

이상,『甲寅雜誌』에 실린『正誼雜誌』의 광고에서도 “사회를 지도하고 정부에 충고 하는 책임”이라는 목적을 분명히 밝혔다. 위의 광고에서 보듯 논설, 시평, 역술, 기재, 통신, 문예, 잡찬 등 7가지 전문 분야로 구성되었으며, 그 가운데 5가지가 현실 정치에 반드시 필요한 문장으로 구성되었다고 하였다. 즉 同人들의 政論文을 중심으로 발행한 종합성 출판물을 표방하였다.

이 가운데 통신 부분은 당시 여론을 반영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으로 볼 수 있 다. 원세개 정부의 언론 통제를 의식하여 “공평한 주장과 온건한 언론”이라는 緩曲한 표현을 사용하면서도, “특정 정당의 사견을 따르지 않겠다”는 강한 어조로 언론기관으 로서의 중립적 입장을 표명하였다. 이 점은 구사연구회의 활동 목표인 “정치계파를 초 월한 연합”18) 및『甲寅雜誌』의 발행목적과도 相通한다.『甲寅雜誌』는 창간호의「本

16) 李正東,『正誼雜誌硏究』,河北師範大學碩士學位論文,2011, pp.5-6.

17) 「正誼」,『甲寅雜誌』1-6(1915.6.10),『甲寅雜誌』影印本2, p.681.

18) 구사연구회는 ‘협의조건’에서 “당파를 구분하지 않고”라고 명시했을 뿐만 아니라, 이후 ‘행동방 침’에서도 “평상시 다른 목표를 가진 당파와도 합작한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다. 구사연구회의 행동방침은 程潛,「護國之役前後」『護國討袁親歷記』(北京: 文史資料出版社, 1985), 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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