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遼 前期 權力鬪爭의 樣相 (나영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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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고 형세가 강합니다. 따라서 반란이 잦습니다”36)라고 피력한 것도 거란 황족 내부에 서 부단히 권력 투쟁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배경을 시사해주고 있다.

결과적으로 요 조정의 통제가 느슨했기 때문에 두하군주는 거의 반독립적인 상태에 있었고, 요조의 중앙집권정책에 큰 장애로 작용했다. 두하군주의 출현은 건국 초기에 거란 제국의 발전과 통치에 유리하게 작용했던 반면 장기적으로 그 제국을 혼란스럽 게 할 가능성이 잠재해 있었다. 따라서 요 조정은 영주가 모반에 가담하거나 혹은 후 사가 끊어질 경우 두하주를 끊임없이 중앙에 몰수하여 남추밀원 관할의 주현으로 재 편하였다. 예를 들어 貴德州는 태종시기에 耶律察割이 포로로 잡은 한인으로 설치하였 으나 후에 반란을 일으켜 죽음을 당하자 몰수되었다.37) 그 외 雙州, 川州, 楡州, 烏州 도 그 영주의 모반으로 관에 몰수되었다. 두하호는 국가의 일반민호 내지는 궁분호로 바뀌어 황제의 속민이 되었다. 마침내 성종 이후에는 두하호의 설립이 거의 눈에 띄지 않았으며 생산력이 증대되면서 통치기구와 전장제도를 완비되어 황권이 공고하게 되 었다. 이는 제도의 정비와 재정 확충을 통한 중앙집권화가 권력투쟁에도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치는지 반증해주고 있다.

中國史學會 第86回 學術發表會: 中國 社會와 文化의 歷史的 再照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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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밖에 간접적인 원인으로 황제의 호위조직, 용인술, 두하제 등을 들 수 있다. 요조 에는 황제가 사시사철 돌아다니는 날발제도가 있어 성곽제도 및 숙위제도가 완벽하게 갖추어지지 못했다. 더욱이 황제를 시위하는 인원은 대부분 귀족 자제였으므로 황제의 안전에 매우 큰 위험이 잠복해 있었다. 그래서 황제를 시해하는 사건이 쉽게 발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황제 자신의 용인술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요조 역사에 서 용인의 실수는 궁중 정변의 중요한 원인을 이룬다. 예컨대 세종시기에 간신 찰할을 호의적으로 대했기 때문에 결국 “察割之變”이라는 재앙을 초래했다. 마지막으로 두하 제는 요대의 특수한 제도로서 종실 및 귀족들의 私城이었고 각각 병사를 보유했다. 두 하군주는 거의 반독립적인 상태에 있었으므로 요조의 중앙집권정책에 큰 장애로 작용 했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원인을 유심히 살펴보면 대체로 유목민족의 고유한 특성에서 유 래되었음을 엿볼 수 있다. 분권화와 중앙집권화, 형제상속제와 부자상속제, 날발제도와 성곽제도, 두하군주와 군현제, 유목문화와 농경문화 등으로 대변할 수 있는 보수와 진 보세력 간의 갈등이 증폭되어 요대 전기에 빈번한 권력투쟁으로 구체화되었던 것이다.

遼 前期 權力鬪爭의 樣相 에 대한 토론문

조 복 현 (경희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