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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자치와 과외활동

Dalam dokumen 中國 社會와 文化의 歷史的 再照明 (Halaman 125-133)

한인의 중국유학생활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기숙사제도였다. 모든 학생들이 한 곳에 모여 정형화된 단체생활로 社會化와 集體化를 훈련하는 현장교육의 연장선이었 다. 중국의 유학생활은 기숙제도를 근간으로 이루어졌는데 자치활동은 지방자치의 훈 련이자 자주적 인격양성의 효과적인 방식이었다. 한인학생들은 재학 학교의 자치회, 청년회, 체육회 및 한인유학생회 등의 교내외단체를 통해 다양한 조직 활동에 참여할 수 있었다.

한인유학생이 비교적 많았던 滬江大學의 학생자치회는 매년 학급에서 4명의 대의원

中國史學會 第86回 學術發表會: 中國 社會와 文化의 歷史的 再照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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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선출하고 그 가운데 회장, 부회장, 서기, 회계 및 위생․출판․식당․사법․서무 등 학생회 각 부서의 대표를 뽑아 평간부회를 조직하였다. 평간부는 1년에 한 차례씩 각 학급에서 6인 이상의 후보를 추천하여 비례선거로 선출하였다. 자치회는 교내의 위 생․풍기․출판․식사 등에 관한 사항을 교원들과 협력하여 유지, 발전시키고 교외에 서는 학생연합회의 회원자격으로 활동하였으며, 기관지를 발간하여 무료로 배포하는 등 국가의 정치조직과 비슷하였다. 자치회 비용은 학생회비로 충당하는데 한 학기당 1 원씩 거두었다. 이렇게 중국대학의 학생자치회는 가장 민주적인 색채를 띤 단체 활동 으로 문화선전, 사회개조, 현실정치의 비판 등 그 역할과 영향력이 매우 광범위하고 컸다. 일반적으로 중국학생들은 자치회 참여에 적극적이었으며 한인유학생들도 전혀 색다른 경험이자 민주주의체제를 익힐 수 있는 산교육이었다.

청년회도 자치회와 마찬가지로 학생 전체를 회원으로 하였지만 비용은 기부금을 사 용하였다. 대외적으로 청년회는 전국협회의 구성원이 되었으며 교내학생들의 도덕교육 을 위한 강연․오락․출판․야학․전도 등의 과외활동을 주관하였다. 체육회는 1년 단 위로 학생 1인당 10원의 체육비를 거두어 사용하였다. 조직구성은 학생들의 전체투표 로 회장, 부회장, 서기, 회계를 선출하고, 각 운동 팀의 대장과 교련으로 구성된 평의 부가 있었다. 주요사업은 대외적으로 화동체육연합회에서 대표권을 행사하고, 교내에 서는 체육회비의 분배와 각종 시합의 감독, 운동회 개최 등을 주관하였다. 과외활동 중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이 체육활동으로 한인유학생들은 각 대학의 운동종목별 대표 선수로 크게 활약하였다. 이외에도 학술․예술․체육 분야의 다양한 학생자치조직이 있었는데 모두가 자유 입회방식이며 자율적으로 운영되었다.

이렇듯 중국대학은 지나치게 많은 교내외 자치활동으로 인해 학업에 해를 끼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따라서 호강대학이나 복단대학은 성과에 따라 일정 학점을 부여 하는 방식으로 과외활동의 학점제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중국대학은 보편적으로 지식 교육보다 인성훈련을 중시한 까닭에 자치활동 역시 사회화와 집체화의 ‘유익한 훈련’

으로 인식하였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유학생활을 보낸 한인학생들은 교내외 자치활동 을 통해 단체를 조직하고, 선거, 변론, 탄핵, 강연, 교제 등 민주정치의 근간이 되는 집 단규율과 준법의식, 자유로운 토론과 다수결의 원칙, 상부상조의 습관 등을 자연스럽 게 배우고 경험하게 되었다. 한인학생들은 교내외 자치활동에 참여함으로써 교제의 폭 을 넓혔고 장기유학에 따른 무미건조함을 덜 수 있었다. 그러므로 한인학생들은 단체 생활의 폐단보다 자치활동의 이로움을 중시하였고, 이런 경험은 그들의 인적 교류와 지적 성장 및 사회적 성숙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상해지역의 한인학생조직은 1912년 7월 4일 조직된 同濟社가 처음으로, 1915년 학우 간 친목을 목적으로 上海韓人留學生會가 설립되었으며, 1920년 여름 南京學友會와 함 께 全中國高麗留學生會의 결성을 준비하고, 1년 뒤인 1921년 7월 지방조직의 형식으로 高麗華東留學生聯合會를 조직하였다. 같은 해 가을 華東韓國留學生會로 다시 명칭을 바꾸고 교육 및 선전활동에 진력했는데 전체 회원 105명 중 상해거주자가 50여 명이 었다. 1926년 국민당군의 북벌이 시작된 후, 10월 23일 상해한인유학생의 세 단체 간

식민지시기 在中 韓人留學生의 실태와 지적교류 -上海地域을 중심으로- (이재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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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들이 그동안 쪼개져있던 조직을 해체하고 하나로 통일된 上海韓人學友會를 창립하 였다. 이렇게 조직된 한인유학생단체의 일상 활동은 새로 도착한 한인학생의 현지 적 응과 정착생활을 지원하고, 중국학생조직과 연대를 강화하여 사회운동에 나서는 것이 었다. 이를 위해 한인유학생회는 1925년 말 사교부를 신설하여 중국학생단체와 서로 연락을 취하였고, 기관지

華東學友

를 발행하였다.

상해의 한인유학생조직은 서로 우의를 돈독히 하고, 현지 거류한인 및 중국인과의 친목도모에 특별히 힘썼다. 이들의 교외활동은 친목모임이나 학문교류, 항일연대의 형 태로 이루어졌다. 친목모임은 새로운 한인유학생의 환영회나 각종 문화 및 체육활동을 정기적으로 개최하는 형식이었다. 상해거류 한인운동회가 가장 빈번히 열렸는데 매년 춘계․추계 두 차례씩 유학생과 거류한인의 친목을 도모하였다. 부정기적으로는 한인 유학생축구팀을 구성하여 고국방문 순회경기를 가졌다. 학문교류는 한인유학생회 주최 의 강연회, 웅변대회, 연설회 등의 계몽운동이나 기관지 혹은 신문․잡지를 통한 언론 출판활동, 그리고 전문 학술단체를 조직하여 직접 연구 활동에 참여하였다. 프랑스조 계에서 주로 열린 강연회와 연설회의 주요 연사는 한인유학생이나 거류한인의 지도자 로, 국내외 정세 인식과 식민지 지식인의 책임의식을 고취시키는 내용이었다.

상해 한인유학생들의 항일운동은 처음에 임정을 비롯한 중국내 한국독립운동조직과 연계되었고, 점차 중국학생들의 항일운동세력과 연대하면서 정치적․군사적으로 활동 폭이 넓어졌다. 1925년 5․30운동이나 1932년 上海事變에서 한인유학생들은 중국학생 단체와 공동연대로 항일운동에 적극 나섰다. 이처럼 식민지시기 상해 한인유학생들은 개별 혹은 집단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하거나 중국과 연대방식으로 항일투쟁 및 반제 운동에 적극 가담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일제의 핍박을 받아 체포, 투옥되거나 저항을 반복하였고, 끝내 학업을 포기하는 일이 많았다.

Ⅵ. 맺음말

식민지시기 한인청년들은 생존조차 힘겨웠던 위기국면 속에서 중국 상해로 건너가 새로운 미래를 준비하였다. 적게는 1, 2년 많게는 십여 년의 상해 유학생활은 궁핍한 생활고와 낯선 언어의 장벽을 이겨내고 근대 학문과 과학기술을 습득한 신지식의 형 성과정이었다. 또한 다양한 자치활동과 집단운동 및 연대활동에 직접 참여함으로써 中 國化된 민주주의사회를 체험하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이들은 ‘亡國奴’에 대한 온갖 차 별과 멸시를 견디면서 특유의 근면성과 열정으로 중국인들에게 인정받았고, 현지 지식 인들과 적극적인 교류를 가졌다. ‘눈물과 한숨의 디아스포라’로 표현되었던 식민지시대 가 한편으로 새로운 세계를 향한 선구자적 발걸음이 있었던 것이다.

중국에서 대학과정까지 완전히 마친 졸업생은 비록 소수였지만 대학 예과와 부중, 전문학교, 보습학교 등에서 신학문을 체험한 한인유학생은 다수였다. 이들은 일본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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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유학처럼 최신 학문경향과 정교한 과학기술, 풍부한 교학활동을 경험하지 못하여 당대 최고의 지성이라 자부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들은 辛亥革命이후 서구화의 길을 걷던 중국의 근대교육제도와 고등교육기관에서 重譯된 서양학문과 과학기술을 배울 수 있었다. 특히 근대 중국문명의 배양지요 동서 문화의 역동적 만남이 이루어진 국제 도시 상해에서 유학생활을 보낸 한인학생들은 항일독립운동에 직접 참여하면서 학업 과 애국을 함께 고민하는 중견지식인으로 성장하며 필요한 소양과 자질을 갖추었다.

이런 한인유학생의 눈물겨운 노력과 열정으로 식민지 상황이란 한계를 뛰어넘어 서양 문명의 과학기술은 물론 자유․평등․민주․과학 등 근대담론을 일상 속으로 받아들 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배우고 익힌 새로운 학술사상과 과학지식은 미몽과 절망 속에 빠져 있는 조국과 민족을 되살리는 밑거름이 되었다.(2015.9.3)

식민지시기 在中 韓人留學生의 실태와 지적교류 -上海 地域을 중심으로 에 대한 토론문

최 은 진 (국민대)

본 논문은 식민지 시기 연구의 공백이 있는 상하이 지역의 한인유학생에 대한 연구 를 통해 전체적인 한인유학생의 실태를 보완하고 나아가 항일운동과 관련되어 부수적 으로 언급된 유학생들의 지적인 교류의 실제를 살펴보고자 한 것이다. 이를 통해 크게 는 한국으로 들어온 근대학문의 뿌리와 특색을 밝혀 계보를 그려내 보고자 하였다.

이러한 논문의 목적은 독립운동사의 측면에서만 근대 한중관계를 집중하던 기존 연구 를 확장하여 한국 지성사, 문화사의 측면에서 또한 지적교류의 실체를 파악한다는 측 면에서 의의를 지닐 수 있다고 본다. 그런 면에서 일차자료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기초 적인 사실을 밝혀내고 기초적 작업, 선결작업을 하였다는 점에서 본 논문의 의의가 있 고 또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라고 본다.

본 논문은 크게 상해지역을 연구한 이유이자 상해지역이 유학의 대상지로 중시된 이유를 상해지역의 문화적 혼종성, 조계 등을 통해 서구의 학문과 문화가 수용된 특 징, 그 일환으로 서구의 근대학교가 설립되어 체계를 갖추었다는 점 등을 들었다. 그 리고 이러한 상해지역을 유학한 학생들을 조사하여 정리했고 이들이 어떠한 배경과 경로로 유학하게 되었으며 그들이 활동하고 체득한 것들을 서술하였다. 그리고 이를 통해 1920년대와 1930년대의 상하이 지역의 유학양상이 바뀌었음을 드러내어 1910-20 년대는 항일운동과의 관련성이 30년대는 입신양명을 위한 만주지역으로 향하는 유학 생이 많아지며 상하이 유학생의 수는 줄어들게 된 상황을 중국의 유학환경과 관련지 어 그 특징으로 밝혀 내었다.

그리고 상하이 지역의 유학생은 특히

同濟

,

滬江

, 復旦 세 대학에 주로 집중되어 있었 고 이들 대학은 독일계, 미국계 대학, 중국의 민간대학이었다는 점을 들어 이를 통해 서구의 학문을 수용하는 계기가 되었고 학생들의 활동을 분석해서 중국의 대학의 기 숙활동과 커리큘럼 등을 통해 자치활동과 민주주의를 체득한 점을 중요한 경험이었다 고 보았다.

그러므로 본 논문을 통해 식민지시기 상하이 지역의 유학생들의 실태나 상황을 이해 할 수 있었으며 특히 신문과 잡지 등을 재구성하여 잘 정리되었다고 생각된다.

다만 이 분야에 대해 구체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토론을 할 수 없는 관계로 구체적인 부분에 대해서보다는 몇 가지 궁금한 점과 제안을 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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