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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약한 황제 권력의 문제

요초 통치계급 내부에서의 일어난 권력투쟁은 다른 계층, 다른 집단, 다른 계파 간 29)『遼史』卷8,「景宗本紀」p. 89.

遼 前期 權力鬪爭의 樣相 (나영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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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전개되지 않았고, 주로 거란 귀족의 최고계급, 즉 황족 내부에서 일어났는데 구체 적으로 말하면 야율아보기 가족 내부에서 전개된 것이다. 왜냐하면 황족 세력이 워낙 강대했기 때문에 황족 이외에 어떤 세력도 감히 경솔하게 覬覦하는 마음을 갖지 못했 을 뿐만 아니라 확실히 이런 종류의 권력투쟁도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나 요조 통치 집단에는 황족 외에도 후족이라는 다른 갈래의 강대하고도 안정된 정치 세력이 구성되어 있었다. 이것은 요조 정치에서의 두드러진 특징이었고, 요대 권력투쟁이 빈 번하게 일어나게 된 주요한 원인이기도 했다.30) 『요사』 「외척표」에 따르면

한나라의 외척은 新室이 우환이 되었고, 진나라의 종실에는 八王의 반란이 있었다. 요사 를 보면 야율과 소씨가 10분지 8, 9를 차지한다. 종실과 외척이 세력을 나누어 힘으로 상 대하면서 서로 脣齒의 형세를 이루어 국가를 보호하도록 한 것도 하나의 방도가 되기는 하였다. 그러나 이것 때문에 흥기하기도 하고 역시 이것 때문에 망하기도 하였으니 그 또 한 법의 폐단이라 하겠다.31)

라고 기록되어 있다. 요대 중요한 정치군사적 사건에서 후족의 성원이 참여하지 않은 적이 거의 없다. 비록 전반적으로 후족은 황권에 대한 지지 세력이었으나 때로는 그들 의 역할이 황권을 위협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후족의 범위와 영향력은 어떠했는가?

거란의 외척은 그 선대부터 두 심밀씨가 있었는데 拔里와 乙室已였다. 그리고 요 태 조가 회골 糯思의 후손인 술률씨에게 장가들었으므로 그들도 외척이 되었다. 대동 원 년(947)에 태종이 변경으로부터 돌아오기 전에 외척인 小漢을 汴州節度使로 삼아 머물 게 하였는데 蕭翰이란 성명을 주어 중국의 풍습을 따르게 했다. 이 때문에 발리·을실 이·술률 3족은 모두 蕭姓을 갖게 되었다. 이들 國舅族은 태종 천현 원년에 술률과 발 리가 합쳐져 하나로 되었고, 성종 개태 3년(1014)에 다시 을실이와 합쳐져 하나의 國 舅帳을 형성하였다. 그리고 세종시기에도 그의 어머니가 속한 가족을 국구로 존숭했는 데 이것이 곧 國舅別部였으며 바로 국구장과 국구별부가 요대 후족이었다. 요대 법령 에 따르면 “왕족은 오직 후족만이 통혼 대상으로 규정하고 있으며”32) 이는 요조가 끝 날 때까지 상례가 되었다.

이와 같이 대대로 인척관계를 맺어온 관계로 거란 사회에는 두개의 강대한 정치세 력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요조 북면관에서 북부재상은 대부분 후족 출신이었고, 남부 재상은 대부분 황족 출신이었다. 그리고 거란의 가장 중요한 관제인 북면관에는 다시 황족과 후족이라는 두 축의 권력이 형성되었다. 따라서 두 세력 간의 협조와 갈등은 요조의 흥망성쇠에 주요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요사』에서도 “반역이 반발하고 나 라가 어지러워지며 망하게 된 것 역시 그들(종실과 외척)에 의해서라고 논하고 있다 .”33) 봉건시대에 군주 외에 권세를 가진 가족 혹은 개인의 실력이 군주와 맞먹거나 혹 은 군주 바로 밑에 있을 때 권력의 쟁탈은 불가피할 수밖에 없었다.

30) 盟紹品, 「試論遼朝宮廷政變頻繁的原因」(『昭烏達蒙族師專學報』 1985年 2期) 31)『遼史』卷67,「外戚表」p. 1027.

32)『契丹国志』卷23,「族姓原始」p. 128.

33)『遼史』卷114,「逆臣傳」p. 1517.

中國史學會 第86回 學術發表會: 中國 社會와 文化의 歷史的 再照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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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컨대 태조 사후에 군국대사를 잡은 순흠황후가 반대세력을 모아 살해하면서 자신 이 원하는 계승자을 세우는 투쟁을 벌였다. 그리고 세종 즉위 때도 순흠황후는 이호와 함께 무장하여 세종과 맞서기도 했다. 세종·목종·경종 시대에는 후족인 蕭瀚, 蕭眉古, 蕭达干, 蕭思温 등이 여러 차례 모반 사건에 참여했다. 이와 같이 요대 전기뿐만 아니 라 후기에도 도종시기의 重元의 난에서 蕭革과 蕭胡睹 등이 주요 모반인이었다. 야율 을신 전권시대에 간신이었던 蕭十三도 그의 “腹心” 인물이었다. 천조제 시기 晋·秦 두 왕의 투쟁은 후족이 궁정투쟁에 참여하여 궁정의 동란을 조성한 전형적인 사례이다.

소봉선은 그의 외종질 진왕을 제위에 즉위시키기 위해 무고의 수단으로 문비와 그녀 의 소생 진왕을 죽게 하였다. 이때 문비의 弟夫였던 야율여도가 군사를 이끌고 여진에 투항했고, 여진이 요를 공격할 때에 그가 선도 역할을 맡아 요조의 멸망을 가속화시켰 다.

이런 투쟁의 목적은 각 세력의 정치경제적 이익을 유지보호하기 위한 것이며 또한 당시“制度未講”의 상황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난 결과였다. 거란은 장기적으로 씨족사회 의 부족연맹 단계에 있었으나 국가로 신속하게 전환되었기 때문에 거란 초기에 정황 은 다음과 같았다.

이때 제도가 갖추어지지 않았고(制度未講) 국력이 충부하지 못해서(國力未充) 임금을 호 위하는 일 조차도 확립되지 않아 아우들 중에 야율날갈 등이 종종 분수에 넘게 황제의 자 리를 넘보았다. 太祖宮과 行營에 처음으로 腹心部를 두고 여러 부족 중에서 뛰어나고 건장 한 2천여 명을 선발해 耶律葛魯와 蕭敵魯를 시켜 총괄하게 하였다. 34)

이러한 내용은 기본적으로 실제와 부합된다. 구체적으로 당시 야율아보기는 부락연맹 의 수령에서 국왕으로 전환한 뒤에 개혁을 진행했으나 국가는 옛 규정을 따랐고, 법률 이 없어 구속하지 못했기 때문에 전통적인 구제도와 구습속이 필연적으로 거란 사회 에 공인되어 계속 효력을 발생하였다. 그리고 통치자는 전국의 토지와 인구를 장악하 지 못했기 때문에 실재로 “國力未充”이었다. 바로 경제적 기초가 확립되지 않은 상태 에서 그 국왕의 권력은 강대할 수 없었고, 호위 조직조차도 제대로 구축하지 못한 상 황이었다.35)

예를 들면 요대에는 귀족의 私領地였던 頭下軍州가 다수 존재했다. 이것은 제왕·외 척·공신 및 제부의 수장들이 각지의 정벌에 종군하여 잡은 生口로 설립하거나 혹은 거란정부가 諸王·國舅·公主에게 賞賜한 俘戶로 설립한 것이다. 야율아보기와 마찬가지 로 거란 각부의 추장 및 기타 씨족의 귀족들도 대량의 노예와 목축을 더욱 약탈하여 역량이 아주 풍부해졌고, 그들은 자기가 약탈해온 인구와 토지를 결합하여 각각 자신 의 두하군주를 건립한 것이다. 이로 인해 귀족과 야율아보기 사이에 엄격한 신속관계 가 성립되지 못했다. 게다가 그들은 토지와 인구는 물론이고 무장병을 거느리고 있었 기 때문에 황권을 위협할 수 있었다. 야율할저가 처형당하기 직전에 “迭剌部는 백성이 34)『遼史』卷73,「耶律曷魯傳」p. 1221.

35) 尹承琳, 「論遼初統治階級內部鬪爭的特點和性質」(『遼寧大學學報』1983年 2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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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고 형세가 강합니다. 따라서 반란이 잦습니다”36)라고 피력한 것도 거란 황족 내부에 서 부단히 권력 투쟁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배경을 시사해주고 있다.

결과적으로 요 조정의 통제가 느슨했기 때문에 두하군주는 거의 반독립적인 상태에 있었고, 요조의 중앙집권정책에 큰 장애로 작용했다. 두하군주의 출현은 건국 초기에 거란 제국의 발전과 통치에 유리하게 작용했던 반면 장기적으로 그 제국을 혼란스럽 게 할 가능성이 잠재해 있었다. 따라서 요 조정은 영주가 모반에 가담하거나 혹은 후 사가 끊어질 경우 두하주를 끊임없이 중앙에 몰수하여 남추밀원 관할의 주현으로 재 편하였다. 예를 들어 貴德州는 태종시기에 耶律察割이 포로로 잡은 한인으로 설치하였 으나 후에 반란을 일으켜 죽음을 당하자 몰수되었다.37) 그 외 雙州, 川州, 楡州, 烏州 도 그 영주의 모반으로 관에 몰수되었다. 두하호는 국가의 일반민호 내지는 궁분호로 바뀌어 황제의 속민이 되었다. 마침내 성종 이후에는 두하호의 설립이 거의 눈에 띄지 않았으며 생산력이 증대되면서 통치기구와 전장제도를 완비되어 황권이 공고하게 되 었다. 이는 제도의 정비와 재정 확충을 통한 중앙집권화가 권력투쟁에도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치는지 반증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