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건강권 접근법은 건강에 대한 규범적 사고를 한층 더 확장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고 소개했다. 여기서는 건강권 접근법이 여타 접근법과 구분되는 핵심적 존재의의, 즉 인권 형식으로서 건강 추구에 기여할 수 있는 바로서 인간 존엄성, 권력 재조정, 의무와 책무성(accountability) 기제를 고찰한다. 첫째, 건강에서 권리란 언어를 사용하게 되면 건강의 모든 측면에서 개개인의 존엄성이 핵심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고 집 합적 선보다 개인의 존엄성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Leary, 1994: 37). 왜 냐하면 권리 개념은 인간의 타고난 존엄성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나오고 모든 개별 인간의 존엄성을 옹호하는 인권의 규범적 보편성은 다른 사회 운동에서 찾을 수 없는 설득력과 호소력을 지녔다”(Leary, 1994: 36; 조 효제, 2016: 10). 인간 존엄성은 자존감을 보호하고 자의식과 자아정체성 을 가능하게 한다(Yamin, 1996: 401).
인간 존엄성(human dignity)은 네 가지 차원, 즉 ‘존재론적 존엄 성’(ontological/inherent dignity), ‘의식된 존엄성’(dignity of actual
rational consciousness), ‘획득한 존엄성’(acquired dignity), ‘부여된 존엄 성’(bestowed/attributed dignity)으로 나뉜다(Erk, 2011: 236-284). 첫 번 째 ‘존재론적 존엄성’은 여타 창조물과 구분되는 사람(person) 그 자체이 기 때문에 갖는 존엄성으로서 질병, 성별, 연령, 의식 존재 여부 등과 무 관하다(Erk, 2011: 237). 여기서 사람(person)이란 이성적 본성(rational nature)을 지닌 개별 실체(individual substance)를 말한다(Erk, 2011:
247).8) 두 번째 ‘의식된 존엄성’은 의식되고 있는 와중에서의 개인 잠재 역량(capabilities) 실현에 존재하고, ‘존재론적 존엄성’의 현실화된 상태 를 구성한다(Erk, 2011: 266). ‘의식된 존엄성’은 인간의 현실화된 속성들, 즉 자기인식(self-awareness), 이성(reason), 자유(freedom), 정서 (affectivity), 관계성(relationality), 종교성(religiousness)에 근거한다 (Erk, 2011: 269-272). 세 번째 ‘획득한 존엄성’은 인간의 본성과 그것의 현실화, 즉 존재론적 존엄성과 의식된 존엄성 둘 다에 기반을 둘뿐만 아 니라 그 현실화의 질(quality)에 의존한다(Erk, 2011: 278). ‘획득한 존엄 성’은 그 현실화의 선(善)한 결과에 존재하므로(Erk, 2011: 278), ‘존재론 적 존엄성’이 모든 인간에게 동일한 반면 ‘획득한 존엄성’은 각 사람의 도덕적 탁월(goodness)에 따라 질적 차이가 나타난다(Erk, 2011: 279).
지금까지의 세 가지 존엄성은 인간 그 자신(즉, 사람으로서의 실체적 존 재, 의식, 지성과 자유의 선(善)한 이용)에 근거한 존엄성이지만, 네 번째
‘부여된 존엄성’은 인간의 본성이나 인간의 자유로운 지적․도덕적 행동 에 의존하지 않고 외부에서 수여된 재능(gift)에 존재한다(Erk, 2011:
281). ‘부여된 존엄성’이 근거하는 재능에는 인간(사회, 국가, 권위 있는 직책 등)에 의해 수여된 재능과 비(非)인간(자연, 신 등)에 의해 수여된 재능으로 나뉘고, 전자에는 사회적 역할과 기능, 타인과의 관계, 부모와 같은 자연적 역할 등이 속하고 후자에는 미(美), 지성, 천재성 등과 같은 자연적 재능과 신부, 예언자 등과 같은 신이 수여한 재능이 속한다(Erk, 2011: 281-282).9)
8) 이성적 본성은 사람‘들’, 즉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 종의 본질적 특성이면서 보편적이지만 실 제 주체(actual subject) 없이 존재할 수 없다(Erk, 2011: 245, 267).
9) 존재론적 존엄성은 사람의 존재에 근거하므로 보편적이고 양도할 수 없고, 의식된 존엄성은 비
네 가지 차원의 존엄성은 서로 별개가 아니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 고, 이 가운데 ‘존재론적 존엄성’은 나머지 세 가지 존엄성의 토대 (foundation)이다(Erk, 2011: 284). 모든 사람은 동일한 양의 ‘존재론적 존엄성’을 지니고 인생을 시작하지만, 생애를 통해 나머지 세 가지 존엄 성에 따라 전반적인 존엄성의 수준에 차이가 생긴다(Erk, 2011:
286-287). 이에 따라 Erk는 인권의 개념을 협의의 인권과 광의의 인권으 로 나누고 그중 전자를 모든 인간이 항상 평등하고 양도불가능하며 보편 적으로 소유하는 도덕적 권리로 정의하면서 보편적이고 양도할 수 없는
‘존재론적 존엄성’을 근거로 주장한다(Erk, 2011: 296).
하지만 인간 존엄성은 직접적으로 인권을 생성하지 않고, 존중
Erk(respect)10)이라는 매개 요인을 통해 인간 존엄성과 인권이 연결된다 (Erk, 2011: 288-289). 여기서 존중Erk은 감정(feeling)을 넘어서 의미 있 는 행위(behaviour)를 위한 동기를 부여하고 행위를 필요로 하며 그 행 위는 활동(action) 속에서 그리고 활동에 의해서 나타난다(Erk, 2011:
290).11) 인간 존엄성이라는 가치는 우리에게 숭고한 요구(demand)와 의 무를 부여하고 이는 곧 인간 존엄성 때문에 존엄성 보유자에게 도덕적 인정(moral recognition)의 중요한 형태인 존중Erk을 제공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Erk, 2011: 288). 인간 존엄성을 존중Erk하는 것은 인간 존엄성 에 주목하고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것(to behave), 즉 행위에 대해 숙고 함으로써 인간 존엄성을 적절하게 고려하고 인정하는 것을 필요로 하며, 행위 방법을 숙고할 때 개별 인간의 가치를 적절하게 고려하고 그에 따 라 행위를 할 의무를 포함한다(Erk, 2011: 291). 인간이 타인에 의해 존
가역적인 혼수상태 등에서 상실할 수 있지만 의식 있는 삶을 사는 사람이면 양도할 수 없으며, 획득한 존엄성은 악을 통해 상실할 수 있고, 획득된 존엄성은 양도할 수 있고 재능, 역할, 기 능 등에 따라 다양한 정도가 존재한다(Erk, 2011: 264-283). 최악의 살인자조차도 그의 모든 존엄성을 잃어버리는 것은 아니고, 존재론적 존엄성과 의식된 존엄성에 근거하는 인권은 박탈 할 수 없다(Erk, 2011: 280).
10) 여기서의 ‘존중’ 개념은 사회권위원회의 일반논평 14호에 언급된 국가 의무 유형에서 존중 (respect)과는 다르기 ‘존중Erk’라고 표기한다.
11) Erk는 이렇게 행위를 강조하는 존중을 특별히 ‘준수(observance)하는 존 중’(observantia-respect)이라 명했지만, 이 논문에서 필자는 존중이라고 통칭하고자 한다(Erk, 2011: 290).
엄성을 존중Erk받을 자격을 지니고 그 타인이 존엄성을 존중Erk할 의무를 짐으로써 도덕적 권리를 보유하게 되고 이러한 도덕적 권리들은 인권이 된다(Erk, 2011: 289). 결국 인권은 기본적(basic) 인권인 인간 존엄성을 존중 받을 권리에서 파생된다(Erk, 2011: 289)(<그림 1>).
그림 1. Christian Erk의 논의에 근거한 인간 존엄성, 존중 그리고 인권의 관계 앞서 인간 존엄성의 네 가지 차원을 살펴보았지만, 인간 존엄성의 의 미는 획일적 인권 기준을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철학적․
윤리적 숙의를 거쳐 잠정적 합의를 찾아야 할 문제라는 시각이 필요하다 (조효제, 2016: 15). 또한 인간 존엄성이 보장되는 삶이란 객관적으로 인 정되는 ‘좋은 삶’을 의미한다(조효제, 2016: 39). 이러한 관점에서 인간 존 엄성과 인권의 관계를 살펴보면, 건강권을 포함한 인권은 인간 존엄성의 기초적 요소, 즉 “인류가 좋은 삶을 누리기 위해 필요하다고 동의한, 최 소한의 어떤 기준을 충족하기 위해 사용하는 규범적․도덕적․법적․제
도적 수단이다”(조효제, 2016: 39; Yamin, 1996: 401).
따라서 건강권 접근법은 건강 영역에서 인간 존엄성을 강조하는 내재 적 가치와 인간 존엄성 보장을 위한 전체 인권의 한 요소로서의 도구적 가치를 모두 지닌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인간 존엄성 보장 을 위한 도구적 인권, 즉 여러 개별 권리들을 법과 제도의 형태로 보장 하려는 흐름이 강조되면서 “보편적 인간 존엄성을 민주정치의 궁극적 목표로 승인하는 데 목표를 둔” 내재적 인권은 무시되거나 경시되기도 했다(조효제, 2016: 10-13). 또한 인간 존엄성은 개별 권리의 총합이 아 니라 그 보다 더 큰 어떤 것으로서 전체론적․종합적 체계를 필요로 하 지만 지금까지는 개별 권리들을 중심으로 인간 존엄성을 이해하는 경향 이 존재했다(조효제, 2016: 15, 64). 따라서 건강권 접근법은 법과 제도의 형태로 보장하려는 노력뿐만 아니라 건강 정치에서 보편적 인간 존엄성 을 궁극적 목표로 승인하면서 전체론적․종합적 체계 속에서 사고해야 한다.
둘째, “인권은 궁극적으로 권력의 문제다”(조효제, 2007: 35). 권력 쟁 점은 생리학적 질환의 극복․억제를 넘어 질병의 생성․분포와 질병의 사회적 상태 규정을 하는 권력 구조와 그 권력의 사회적 관계․조합․배 열을 인식하는 데 주목하게 만든다(Yamin, 1996: 400). 권력 쟁점과 관 련해서 국가를 중심으로 한 ‘권력 관계의 재조정’과 주체를 중심으로 한
‘자력화(empowerment)'로 나눌 수 있다. ‘권력 관계의 재조정’ 측면에서 인권은 인도주의와 달리 권력과 사회적 지위(status)의 분포에 관심을 두고 권력 관계를 재조정하려고 노력한다(Wolff, 2012a: 15-16). 인도적 원조가 기존 권력 구조의 유지 하에 일시적으로 긴급한 필요를 다루는 반면 권리는 최소한의 특정 영역 내에만 기존 권력 구조에 권한을 양도 하면서 자유(liberties)와 기회의 더 광범위한 구조에 관심을 둔다(Wolff, 2012a: 15, 27). 또한 ‘자력화’ 측면에서 “사람들이 주체적으로 자기주장 을 하도록 자력화하는 잠재력”은 인권의 결정적 장점이다(조효제, 2007:
129). 이로 인해 건강권 접근법의 초점은 보건의료로부터 건강 상태의 통제로 전환되고 환자에 대한 인식은 질병의 피해자이자 보건의료 수혜
자에서 자신의 건강과 관련해 적극적인 의사결정 참여자로 변화된다 (Yamin, 1996: 418).
셋째, 인권은 인류에 대한 최소한의 도덕적 의무 내역을 제공하고 국 민국가를 초월하는 책무성 기제(a mechanism of accountability)를 생성 한다(Wolff, 2012a: 16). 세계인권선언과 사회권규약에서 적절한 의무 할 당이 이루어지지 않은 점은 한계지만 건강권 의무 설정은 계속 진행 중 이며 인권 접근법이 의무 할당 이슈와 관련해 상당한 주목과 열린 조사 를 받았기 때문에 여타 정치 철학보다는 매우 안정적으로 보인다(Wolff, 2012b: 224; Goodman, 2005: 644). 여기서 책무성이란 정부가 건강권에 대한 의무를 어떻게 수행하였는지를 보여주고 설명하고 확인시키는 과 정으로서, 시정해야 할 것을 설명․제시해야 하는 법적 강제를 포함한다 (Potts, 2008: 13-14). 국제 공동체에 의한 책무성 기제의 예로 유엔 인권 메카니즘을 들 수 있고, 여기에는 국가별 인권상황 정기검토(Universal Periodic Review), 국제인권조약 비준 국가의 조약 이행․준수 심의, 특 정 주제나 특정 국가를 담당하는 특별절차(Special Procedures of the Human Rights Council)가 포함된다. 특정 주제의 하나로 건강권이 포함 되어 있다. 일국적 차원에서도 국가인권위원회, 인권단체를 비롯한 시민 사회단체, 지역사회 풀뿌리 조직에 의해 정부의 책무성 기제가 적극적으 로 생성․작동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