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허구(虛構)와 실재(實在)의 경계
234) 曺街京, 「Husserl의 현상학의 “地平” 개념과 경험의 直接性」, 『성곡논총』제2권 (성곡언론문화재단, 1971), p.9 참조.
235) 개별적인 사물을 지각할 때 지평에 의해 우리는 직접 경험에 주어진 것 이상의 것 을 지각한다. 다시 말해서 그때그때 실지로 시야에 들어와서 파악된 것 이상의 것을 더불어 지각할 수 있다는 것은 대상에 대한 다양하고 직간접적인 경험지평이 있기 때 문이다. 우리는 한 대상의 경험에서 지금 경험된 여러 규정들을 넘어서 지금은 경험 되고 있지 않은 여러 가지로 기대되고 예측되는 규정들까지도 더불어 지각하고 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책상을 지각할 경우 나에게 직접 주어진 곳은 시선이 맞닿은 책상 의 앞면뿐이다. 그래서 그 책상의 뒷면과 옆면 등 시선이 닿을 수 없는 부분은 직접 적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책상의 뒷면이나 옆면을 돌아보지 않고 서도 전체로서 인식한다. 이것이 지각대상으로서의 책상의 경험지평 구조이다. 김준 연, 「후설의 지각세계와 지평」, 『동서철학연구』제18권(한국동서철학회, 1999), p.80 참 조.
이상향이란 ‘세상에 없는 곳’이라는 점에 초점을 두면 허황된 일장춘몽 (一場春夢)에 불과하며, 주로 신화나 동화 속에서나 존재하는 환상의 세 계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상향을 동경하는 것은 실현 불가능한 허 구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좋은 곳’이라는 점에서 보게 될 때 이상 향은 역사 이래 부단히 찾아 헤매온 또는 직접 실현하고자 노력한 이상 세계 건설의 의미가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이상향은 허구로서 현재 여기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이지 비실재라고 할 수 없다. 에른 스트 블로흐(Ernst Bloch, 1885-1977)는 이상향은 ‘아직 없는 것, 즉 아 직 실현되지 않은 미완성의 현실태(現實態)’라고 하였다. 그래서 이상향 의 추구는 미래에 대한 종합적 비전과 청사진을 제시하는 일종의 사회공 학이 되기도 한다.
[도 30] 나형민,〈Where do I live?〉와 실재 소재가 된 상도동 풍경 비교
연구자 작품 속에 이상향의 노스탤지어가 담긴 지평 풍경은 대부분 실 재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현존하는 지평이지만 작가의 재해석을 통해 허구적 지평으로 재탄생하였다. 예를 들면 작품〈Where do I live?〉[도 30]도 동작구 상도동 언덕에서 여의도 쪽을 바라본 실재 풍광을 소재로 작품을 제작하였지만, 실재 거주지에 대한 재현이 아니라 제목에 명시된 바와 같이 새로운 지평으로 재포장됨으로써 실재성이 사라져 가는 도시 의 익명성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작가적 시각으로 재구성한 지평의 화면은 낯익은 일상의 경물들을 자유
롭게 해방해 실재와는 간극을 가지는 허상의 지평으로 재구성된다. 그리 고 뭉게구름 가득한 하늘은 손이 닿을 듯한 실재감을 가지면서도 궁극적 으로는 닿을 수 없는 미지의 공간으로서의 이상향을 표상한다. 파란 하 늘은 감상자의 시선을 지평 너머의 다른 세상으로 유도하지만 결국 지평 에 반영된 실재성은 현대인이 마주한 현세로서 리얼리티를 자각하게 한 다. 따라서 연구자의 작품은 일상적이고 낯익은 주변의 풍경으로서의 사 실적 실재성(實在性)과 이상향의 노스탤지어라고 하는 비가시태의 허구 적인 환영성(幻影性)이 맞닿아 있다.
그래서 평론가 김최은영236)은 연구자의 작품에 나타나는 허구와 실재의 경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風景-자연의 모습 또는 어떠한 정황이나 상황을 그린 모습을 일컫는 말이다.
나형민 회화는 일종의 풍경화다. 그러나 분명 자연의 하늘로 보이는 모습이 화면의 대부분을 구성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종의’라는 수식어를 붙일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사실의 하늘과 닮은 자연과 사실의 인물, 그럴만한 건물들이 구성요소로 들어앉은 회화나 나형민의 작품은 사실과는 다르다. 있 을 수 없는 현실, 하지만 가능할지도 모를 상황들이 일련의 환상이라는 구조 와 맞물리면서 환상과 현실의 교집합을 이루며 행간을 잡아내고 있기 때문이 다.237)
[표 7] ‘작품과 소재가 된 실재 풍경의 비교’표를 보게 되면 연구자의 대부분 작품들의 소재는 실지(實地) 지역, 공간 등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 을 알 수 있다. 마치 일상 속에서 흔히 보이는 경관들을 채집하듯이 선 별하여 작품 제작의 모티브로 사용하였다.
예를 들면, 작품〈Somewhere only I know〉[표 7]은 경기도 남양주시 평내동 152-34번지의 모습으로 연구자 거주지 근처 평내동의 아담한 커 피숍건물이 모델이다.
236) 미술평론가, 미술과 담론 편집위원, 2010년 경기문화재단 우수예술창작발표활동지원 시각예술분야 선정사업으로서 제6회 연구자의 개인전 ‘노스탤지어(Nostalgia)’(포월스 갤러리)에 대한 지원사업 비평문을 작성하였다.
237) 김최은영, 「실존의 하늘 위로 노장적 현실을 담다 - 나형민展」, 경기문화재단 문예 진흥기금 지원사업 비평문, 2010.
〈Somewhere only I know〉(2007) 경기도 남양주시 평내동 152-34238)
〈Exit from somewhere〉(2008) 강원 고성군 토성면 봉포리 1-5239)
〈the Middle of NowhereⅡ〉(2009) 경기도 남양주시 평내동 59-2240)
〈the Middle of NowhereⅠ〉(2009)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 30-1241)
작품〈Exit from somewhere〉[표 7]의 박스형 건물은 무더운 여름철 피서지로 자주 갔던 강원도 고성군 봉포항의 활어회센터 건물이다.
그러나 구현된 작품과 소재가 된 실재 풍경과의 비교에서 알 수 있듯이 그림 소재가 된 지역은 예전의 소재로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지 않다.
작품〈Somewhere only I know〉의 건물은 예전에는 빈 건물이었으나 지금은 예쁜 커피숍이 되었으며, 실재 지역의 지평은 수목의 풍성함으로 가려져 옛 지평의 모습을 찾을 수 없다. 더욱이 연구자는 커피숍의 배경 으로 실재와는 다른 수평선(水平線)을 화면에 배치하여 ‘남양주시 평내동 152-34번지’라는 실지적 지번(地番)의 의미를 상실한 가공의 장소로 재 구성하였다. 그래서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풍경이며, 커피숍 건물은 허구의 지평과 실재의 경계에 위치하게 된다. 그래서 작가만이 인지할 수 있는 어떤 장소(Somewhere only I know)이면서도 낯설지 않은 실재 성도 화면 가운데 투사되어 있다.
후설은 주제화된 대상을 둘러싸고서 암시적으로 주어지는 주변의 모든 사물들과 그 사물들이 포진하고 있는 터를 ‘지평’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주제화된 대상과 지평 사이에 암암리에 상호 규정 작용이 일어난다고 말 했다. 지평의 변화에 의해 대상의 의미가 바뀐다는 것이다.242) 따라서 실 재 풍경으로서의 주된 대상에 새로운 지평을 부여한다는 것은 단순한 병 렬의 관계가 아니라 상호보완, 침투적인 관계로서 실재에서 허구로 연결 되는 가상의 의미연장체가 될 수 있다.
작품〈the Middle of NowhereⅠ〉[표 7] 은 상명대학교 방향으로 자하 문 터널을 지나기 전의 풍경이다. ‘집쟁이’라는 독특한 필기체의 간판이 시선을 사로잡아서 작품의 소재로 취하였다. 왼쪽 언덕은 과감하게 여백 으로 공간을 비워 두었으며, 건물 면과 하늘 면의 이격(離隔)을 두어 뭉 게구름 가득한 하늘의 깊이감과 아득함으로 이상적인 정서를 강조하였
238) 신주소로는 ‘경기도 남양주시 의안로 240번길 1’ 이다.
239) 신주소로는 ‘강원 고성군 토성면 토성로 44-12’ 이다.
240) 신주소로는 ‘경기도 남양주시 의안로 240번길 15’ 이다.
241) 신주소로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자하문로 35길 6’ 이다.
242) 고연숙, 『전봉건 시의 지평 구조 연구』(한양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1), p.10.
다. 비가시태로서의 여백과 하늘, 가시태로서의 건물은 상호 융합과 침투 를 통해 실재에는 존재하지 않는 또 다른 풍경으로 만들고자 하였다. 더 욱이 2018년에 다시금 확인한 ‘집쟁이’ 간판 건물은 사진과 같이 하얀색 모던한 건물로 리모델링되어 본래의 건물을 과거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이미 그림 속 장소에 익숙해져 버린 연구자에게는 실재의 하얀색 새 건 물은 아이러니하게도 너무 낯설게 느껴졌다. 허상으로서의 작품은 그대 로이지만 도리어 실재로서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 30-1 지번의 건 물이 되돌릴 수 없는 과거의 시간 속으로 사라진 허상(Nowhere)이 된 것이다. 따라서 연구자 작품 속에서 허구와 실재의 경계로서의 지평표현 은 고정태가 아닌 허구와 실재의 상호규정 작용을 통한 가변적 지평이 된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지평의 표현은 스쳐 지나며 보았을 법한 일상적 인 풍경을 담고 있지만 사실 이것은 특정한 장소의 재현이 아니다. 연구 자가 표현하고자 하는 경계로서의 지평은 실재라고 하는 소재로부터 실 체를 분리하고, 그것들을 화면에 재구성해 나가면서 실재와 허구가 병존 하는 가상의 이미지를 만들어 간다. 그리고 그 가상성은 현실의 것이 될 수 없는 환영으로서의 지평으로 재탄생시킨다. 이처럼 실지(實地)를 바 탕으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지평은 작가 또는 감상자의 상상력에 의해 가 공의 공간으로 재해석되면서 허구와 실재의 경계가 된다. 이런 허구와 실재의 절묘한 조화를 구현한 대표적인 작가는 르네 마그리트(René Magritte, 1898-1967)이다. 예를 들어 그의 작품 〈The Empire Of Lights〉의 지평에는 밤과 낮의 풍경이 경계를 중심으로 공존한다.
마그리트 그림 속에서 일상적인 사물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본래의 자 리에 있지 않다. 구름은 유리잔에 아이스크림처럼 담겨 있고, 육중한 바 위는 마치 구름처럼 중력을 거부하며 하늘에 떠 있으며, 기차는 벽난로 를 뚫고 나온다. 이처럼 본래의 용도에서 일탈시켜 사물을 낯설게 하는 표현법을 ‘데페이즈망(depaysement)’243)이라고 한다. 이처럼 마그리트의
243) 본래는 ‘나라나 정든 고장을 떠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초현실주의에서는 어떤 물체를 본래 있던 곳에서 떼어내는 것을 가리킨다. 즉, 낯익은 물체라도 그것이 놓여 있는 본래의 일상적인 질서에서 떼내어 뜻하지 않은 장소에 놓이게 되면 보는 사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