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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遠)의 토대

Dalam dokumen 비영리 - S-Space - 서울대학교 (Halaman 133-139)

표준국어대사전에 나타나는 ‘지평(地平)’의 사전적 의미는 첫째는 ‘대지 의 편평한 면’, 둘째는 ‘지평선과 같은 말로 편평한 대지의 끝과 하늘이 맞닿은 경계의 의미’, 셋째는 ‘사물의 전망이나 가능성 따위를 비유적으 로 이르는 말’로 정의되어 있다.206)

영어에서 지평(Horizon)의 어원은 ‘경계(한계) 짓다’, ‘분리하다’의 의미 를 가진 그리스어 ‘호리제인(Horizein)’에서 유래한 말이다. 이는 흔히 지 각의 관점에서 인간이 시각적으로 볼 수 있는 영역의 한계를 규정한다는 뜻이다.207) 따라서 지평선 또는 수평선과 같이 눈에 보이는 가시권으로 서의 경계를 한정하는 사전적 의미와 연관된다.

[도 22] 나형민, 〈지평(地平)〉, 2013, 한지에 채색, 135×390㎝

연구자의 작품에서 지평은 소재적으로 형식·내용적으로 매우 중요한 상 징성을 가지고 있다. 형상적으로 지평은 하늘과 맞닿아 있는 경계를 의 미한다. 그리고 하늘과 대치되는 공간으로서 지평 속 도시 또는 전원은

206)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https://stdict.korean.go.kr/main/main.do(최종검색일: 20 18.11.04.)

207) 이진복, 「가다머의 철학적 해석학의 교육적 의의」(전북대학교 대학원 교육학과 박 사논문, 2016), p.35.

우리 삶의 터전이 되는 일상의 공간이자 이상향에 대한 노스탤지어가 담 긴 회화의 대상이다. 색채로서는 황토색 또는 녹색의 지평과 청색의 하 늘로 분명하게 경계 지워진다. 그 경계로서의 지평의 의미는 작품〈지평 (地平)〉[도 22]와 같이 시선의 끝이자 하늘의 시작이기도 하지만, 내용 적으로는 현실, 현세, 현재를 상징하면서 이상향으로서의 하늘과 대위를 이룬다.

일반적으로 서양화에서 지평은 관찰자의 시점에 따른 전망의 창출과 연 결된다. 그리고 지평을 바라보는 과학적인 원근법은 정해진 위치로부터 하나의 시점을 수반하며 그 단일한 시점에서 볼 수 있는 것만을 포함한 다. 그래서 서양화에서 지평선은 시점의 끝으로 관찰자의 시각적 한계를 나타낸다. 그러나 동양화가들은 왜 우리 스스로 시점을 제한해야 하는가 에 반문한다. 그리고 왜 한 시점에서 볼 수 있는 것만을 그려야 하는가 되물을 것이다. 일례로 송대 비평가 심괄(沈括)은 화가 이성(李成)이 “밑 에서 올려다본 처마를 그린 그림”을 평가하면서 부분을 볼 수 있는 전체 의 각도를 간과했음을 비판하였다. 이는 동양화의 지평구조는 서양화와 달리 물리적 시각법과 기하학적 법칙에 바탕을 두지 않음을 의미한다.

동양화 속에 지평 공간은 관찰자의 시각이 축소되거나 한정되는 것이 아 니라 무한히 확장됨을 추구한다. 그리고 한 번의 시각적 대면이 아니라 자연의 아름다움 앞에서 어느 순간 고양감에 의해 유발된 경험의 축적을 반영한다.208) 예를 들면 겸재 정선의 〈하경산수도(夏景山水圖)〉[도 23]

는 시점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 유동적이며 지평선은 모호하게 표현되어 있다. 그리고 감상자 또는 관조자가 그림 바깥에서 전경에 질서를 부여 하는 서양 풍경화와 달리, 이인문의 〈단발령망금강(斷髮嶺望金剛)〉[도 24]은 감상자가 풍경의 한 요소로서 지평 속에 잠기어 동화된 듯이 그려 져 있다.209) 일반적으로 원근은 대상이 되는 사물과 그림을 그리는 작가 와의 간격 또는 거리를 의미한다. 따라서 원근은 작가와 대상 간의 거리 에 대한 지각이며 대상을 파악하는 인식의 간극이다.

208) 마이클 설리번, 앞의 책, p.155 참조.

209) 미셀 콜로, 「동서양의 지평과 지평구조」, 『유럽사회문화』제7권(연세대학교 유럽 사회문화연구소, 2011), pp.28-29.

[도 23] 정선,〈하경산수도 (夏景山水圖)〉, 1713, 비단 에 수묵담채, 179.7×97.3㎝

[도 24] 이인문, 〈단발령망금강(斷髮嶺望金剛)〉, 조선, 종이에 수묵담채, 23×45㎝

곽희의 「산수훈」을 보게 되면 대상에 따른 거리의 지각에 대해 다음 과 같이 말하였다.

산수는 커다란 사물이므로 이것을 감상하는 사람은 모름지기 멀리서 이를 바라보아야 한다. 또 그렇게 보아야만 하나로 펼쳐진 산천의 형세와 기상을 볼 수 있는 것이다.210)

이는 사물을 온전히 분별하려면 일정한 거리, 간격을 놓고 관찰해야 객 관적으로 대상을 파악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실제 산수의 시내와 계곡은 멀리서 바라보아 그 세(勢)를 취하며, 가까이 봄으로써 질 (質)을 취한다.”211)고 하였으며 원근에 따른 이동법(山形面面看)도 제시

210) 郭熙, 『林泉高致』, 「山水訓」, “山水大物也 人之看者須遠而觀之 方見得一障 山川 之形勢氣象”

211) 郭熙, 『林泉高致』, 「山水訓」, “眞山水之川谷 遠望之以取其勢 近看之以取其質”

하였다. 즉, 심괄의 ‘부분을 볼 수 있는 전체의 각도’로서의 시각법을 설 명한 것이다. 이것은 일정한 거리를 놓고 대상을 분별한 후에 객관적이 고 분명한 형상표현으로 형세를 취하고 아울러 질(본질)을 취함으로써 기세와 질감의 완전한 조화를 추구한 것이다.212) 특히, 곽희의 중요한 공 헌은 자연을 관찰하는 데 있어서 정(情)과 경(景)을 융합하는 태도이다.

산수를 관찰하는 것은 지형을 측량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가가 자연경물 의 특징을 자신의 감정에 연계시키는 것으로서 지도의 객관성과는 구별 된다.213) 그리고 화가의 역할은 상상력을 자유롭게 하고 그것이 우주의 무한한 공간 속에서 자유롭게 유희할 수 있도록 한다. 따라서 회화는 최 종적인 결론이 아니라 시작점이며, 끝이 아니라 상상 지평의 문을 여는 것이다.214) 따라서 동양화에서 지평까지의 ‘원(遠)’이란 단순한 거리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의경(意境)이라 하여 시간과 공간의 의미를 모 두 포함한 자신만의 독특한 경계를 취한다. 특히, 선인들은 이러한 경계 를 통해 세속적인 욕망의 속박에서 벗어나 고상하고 이상적인 선경(仙 境)으로 들어가길 원하였다.215) 이러한 ‘원’에 대한 시원은 장자의 사상과 연관성이 깊다. 장자의 「소요유(逍遙遊)」의 비유적 설법을 보면, “구름 을 타고 용과 함께 날며 사해(四海) 밖을 즐긴다.”216)는 소요이며, “아무 것도 없는 곳(無何有之鄕) 끝없이 넓은 들판(廣莫之野)”의 텅 빈 상태를 그리워하는 것은 세속을 초월한 무한한 자유(無爲)의 추구를 말한다. 상 기 세속적 초월에서 얻어지는 자유해탈의 상태를 위진현학시대에는 ‘원’

의 개념으로 설명하였다. 그래서 ‘원’이란 ‘근(近)’의 반대말로 가까운 세 속에 구애받지 말고 텅 빈 공허에서 자유로이 통달하는 ‘유심어허광방달 지장(遊心於虛曠放達之場)’을 의미하는 말로 위진시대의 ‘현(玄)’과 상통 한다. 이것은 사대부들이 추구했던 이상적 지평으로서의 생활의경(生活 意境)이었다. 현원(玄遠), 청원(淸遠), 심원(深遠), 고원(高遠), 평원(平遠)

212) 지순임, 『산수화의 이해』(일지사, 1991), pp.167-168 참조.

213) 葛路, 앞의 책, pp.266-267.

214) 마이클 설리번, 앞의 책, p.156 참조.

215) 하영준, 「郭熙의 林泉高致 에 나타난 ‘遠’의 意境에 관한 硏究」, 『한국사상과 문 화』68권(한국사상문화학회, 2013), pp. 352-353.

216) 莊子, 「逍遙遊」, “乘雲氣 御飛龍 而遊乎 四海之外”

등이 모두 사대부들이 추구했던 생활의경의 표현이다. 그리고 후대에는 인생의 의경을 예술적 원을 통해 실현하고자 하였는데, 곽희의 〈수색평 원도(樹色平遠圖)〉[도 25]와 같은 평담하고 아득한 공간의 평원 산수화 가 주를 이루게 된다.217)

[도 25] 곽희, 〈수색평원도(樹色平遠圖)〉, 북송, 비단에 수묵, 32.4×104.8㎝, 미국 메트로폴리탄미술관

그래서 송대 유도순도 『성조명화평(聖朝名畵評)』에서 “산수를 보는 자는 평원의 아득하고 넓은 모습을 높게 평가한다.(觀山水者尙平遠曠蕩)”

고 하였다.218) 따라서 동양화에서 평원의 지평은 감상자의 시선과 감정 을 담아 원경을 거쳐 구름 혹은 하늘과 이어진 지평까지 인도해주어 현 세의 번민과 고뇌를 맑게 해주는 청정(淸靜), 청담(淸淡)의 가치를 갖는 다. 이러한 청정과 청담의 가치는 연구자 작품의 청명한 하늘과 담담한 지평 표현과도 상통한다. 그리고 원을 따라 무한 경계로 나아가면 조금 의 티끌도 물들지 않은 담(淡), 무(無), 허(虛)의 경계에 이르게 되는데 이것이 연구자가 편평(平)한 지평 너머 비가시태를 통해 추구한 이상향 의 모습이며 맑은(淸) 하늘을 통해 추구하는 지향점이다.

문인들에게는 입세(入世)와 출세(出世)라고 하는 갈등이 있었다. 입세한 사인들은 늘 출세의 청고함을 동경하여 산수화를 통해 이상과 현실 간의

217) 지순임, 『산수화의 이해』(일지사, 1991), pp.167-170 참조.

218) 정혜린, 「『임천고치』(林泉高致)가 유가를 구현하는 방식」, 『美學』제83권 1호 (한국미학회, 2017), pp.23 각주참조.

모순을 조절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문인들은 산수화를 특별히 애호하게 되었으며, 인생의 ‘의경(意境)’을 예술적 지평으로서의 ‘원(遠)’을 통해서 실현하고자 하였다. 만약 ‘원’에 대한 자각과 추구가 없었다면 산수화는 한낱 산수 속의 경물들을 옮겨놓은 풍경화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 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감상자의 시각과 정신이 제한된 지평 안에서 한정 되기 때문에 세속이라는 경계를 넘어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219)의 지평 너머로 뻗어 나아갈 수 없게 된다. 인생의 경계도 삼원의 경계와 다르지 않다. 정직하고 청렴했던 선비들은 청년시기에 속세의 높은 곳을 동경한 다[高遠]. 오늘날에도 청년들은 항상 도시로 도시로 부와 명예를 좇아 이 주한다. 하지만 정작 그곳에 올라가서 모순된 현실 또는 도시의 실상을 목격하게 되면 귀향의 대상으로서 자연을 그리워하기 시작한다. 그리하 여 그들은 높은 곳에서 내려와[深遠] 사회에서 멀리 떨어진 지평을 향해 떠나갔는데[平遠], 더 먼 곳일수록 혼탁한 속세로부터 자신을 철저히 분 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지평으로서의 ‘원(遠)’을 추구한다.220) 왜냐하면 영원히 존재하는 산수자연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인간세계의 부귀영화보 다 낫고, 자연에 순응하는 것이 인위적인 조작보다 뛰어나며, 구원(丘園) 과 천석(泉石)이 원락생가(院落笙歌:생황반주에 맞추어 부르는 노래)보다 유구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221) 따라서 원으로서의 지평이란 자연과 일체가 됨을 추구하며, 자연으로부터 깨달음과 성찰을 얻고 인간사의 굴 레에서 벗어나 마음의 해방을 얻기를 희망하는 토대가 된다.

[도 26] 〈Where do I live?〉와〈Lentiscape-지평〉에서의 시점의 변화

219) 장자가 이야기한 어떠한 인위도 없는 자연 그대로의 낙원을 의미함.

220) 천촨시, 『중국산수화사1』, 앞의 책, pp.399-402 참조.

221) 리쩌허우, 이유진 역, 『미의 역정』(글항아리, 2012), pp.3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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