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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둔도학적 성격〈무이구곡도(武夷九曲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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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에서 아름다운 자연을 유람하면서 자연의 도를 체득하고자 하는 자 연 완상(玩賞)은 단순히 명승지를 유희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자 연합일을 통한 인격미의 완성을 추구한다.

주자가 은거하며 도학(道學)74)했던 무이산의 절경은 자연의 도리를 체 득하고 나아가 자연합일의 경지에 이룰 수 있는 이상적인 자연으로 동경 받아 왔다. 그래서 무이구곡은 성스러운 곳인 동시에 아름다운 곳으로 문인들이 현실 속에서 동경해 왔던 이상향이었다. 특히 조선의 문인들은 무이산에 직접 가 볼 수가 없기에 무이산을 소재로 한 시문이 수록된

「무이산지(武夷山志)」를 탐독하거나 무이산 그림을 완상하며 시를 읊 었다. 조선시대 지식인들에게 무이구곡의 자연은 도학의 고원한 세계와 동일시되었으며, 도(道)와 문(文)과 자연이 일체가 되고 무한한 즐거움을 가져다주는 지평이었다.75)

73) 안휘준, 앞의 책, p.136-139.

74) 도(道)란 글이나 말을 많이 안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수행의 기반이 된다 는 것으로 ‘도학(道學)’이란 수양을 통해 이치를 깨닫는다는 의미로 사용하였다.

75) 민주식, 「조선시대 지식인의 미적 유토피아 - 무이구곡(武夷九曲)의 예술적 표현을 중심으로」, 『美學』제26권(한국미학회, 1999), pp.23-24.

[도 9] 무이구곡(武夷九曲)의 실경

『주자문집(朱子文集)』의 『무이산지(武夷山志)』를 보면 「구곡정가(九 曲楨歌)」10수를 비롯하여, 일곡(一曲)의 상편에 「추진정(趨眞亭)」1수,

「충우관(沖佑觀)」1수, 「방지(方池)」1수, 「차오공제운(次吳公濟韻)」1 수 등 총 6수, 일곡의 중편에 「천주봉(天柱峰)」1수, 「승진관(升眞 觀)」1수, 「승진동(升眞洞)」1수, 「선학암(仙鶴巖)」1수 등 총 4수, 사 곡(四曲)에 「대소장암(大小藏巖)」1수, 오곡(五曲)의 상편에 「정사잡영 (精舍雜詠)」12수, 「차공제정사운(次公濟精舍韻)」1수, 「행시무이정사 (行視武夷精舍)」1수 등 총 14수, 오곡(五曲)의 하편에 「대은병(大隱 屛)」1수, 「앙고당추회유공부(仰高堂追懷劉共父)」1수 등 총 2수, 구곡 (九曲)에 「영봉(靈峰)」1수, 산북(山北)편에 「곡악경(哭岳卿)」1수,

「도수갱작(倒水坑作)」1수 등 총 2수, 전산(全山)편에 「중기종정(仲機 宗正)·경인태사동유산(景仁太史同遊山), 희문숙무실역지(喜文叔茂實亦至)」

1수, 「용전운별중기(用前韻別仲機)」1수 등 총 2수, 도합 42수가 주자의 시로 수록되어 있다. 위에 열거한 42수 중에서 주목해야 할 시는 「구곡 정가(九曲楨歌)」10수로 무이산의 구곡을 따라 배를 타고 유람하며 지은

시이다. 이 시는 이황(李滉)이나 이이(李珥) 등 조선의 성리학자들에게 전래하면서 누구나 차운(次韻)하여 모작하고 와유를 즐겼을 뿐만 아니라

‘입도차제(入道次第)’76)의 도학시(道學詩)냐 ‘인물기흥(因物起興)’77)의 산 수시(山水詩)냐를 놓고 논쟁을 벌였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유명한 계곡 곳곳마다 구곡으로 지칭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78)

무이구곡은 중국의 복건성(福建省)에 있는 명산 무이산의 36봉(奉)과 37암(巖)의 기암절벽이 빼어나게 솟고 굽이쳐 흐르는 아홉 구비의 계곡 을 일컫는데 주자는 55세 되는 봄에「무이도가(武夷櫂歌)79)를 지었다

주자는 1175년 『운곡기(雲谷記)』80)를 쓰면서 은거의 뜻을 밝혔다. 그 리고 1183년 4월 승안현 서남 20km쯤에 있는 무이산 아래에 무이정사 (武夷精舍)를 짓고 무이산의 산세, 정사의 위치, 주변의 승경, 인간에 끼 치는 자연의 영향, 동호인 제자들과의 생활 등을 기술한 『무이정사잡영 병기(武夷精舍雜詠幷記)』를 기술하였다.

옥녀봉 대왕봉 대장봉 쇄포암

[표 3] 무이구곡(武夷九曲)의 대표적 봉우리와 암석

1184년에는 「무이도가」10수를 지었는데 서두를 제외하고 나머지 9수

76) ‘입도차제(入道次第)’란 유교 도학의 경지로 진입하는 차례, 순서를 의미한다.

77) ‘인물기흥(因物起興)’이란 사물을 통하여 시적인 흥취를 불러일으키는 것을 의미한다.

78) 심우영, 「『무이산지』의 주자시 내용 연구」, 『중국문학연구』제25집(한국중문학회 2002), pp.46-47.

79) 원래는 「무이도가」인데 훗날 「무이구곡가」로 통칭하였다.

80) 복건성(福建省) 건양현(建陽縣) 서쪽에 있는 산 이름이 노봉(蘆峯)인데, 주자(朱子)가 그곳에 회암초당(晦庵草堂)을 짓고 글을 읽으며 ‘운곡(雲谷)’이라고 고쳤다

는 무이구곡의 실경을 묘사하고 있다. 「무이도가」의 제목은 ‘순회 갑진 년 봄에 정사에서 한가히 지내며 희작으로 무이도가 10수를 제현들과 같 이 즐기며 일소한다.(淳熙甲辰年 仲春精舍閒居 戱作武夷櫂歌十首 呈諸同 遊相與一笑)’이며, 『무이산지(武夷山志)』의 전도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청천에 낚싯배를 타고 승진동(升眞洞), 옥녀봉(玉女峯), 대왕봉(大王峯), 선기암(仙機岩), 금학암(金鶴岩), 쇄포암(曬布巖), 철적정(鐵笛亭), 선당봉 (仙唐峯), 석당사(石唐寺), 고루암(鼓樓岩), 신촌시(新村市) 등을 유람하면 서 감회를 노래하고 있다.81)

「무이구곡가(武夷九曲歌)」를 살펴보면,

무이산 위에는 신선의 세계가 있고 武夷山上有仙靈 산 아래 차가운 물줄기 굽이굽이 맑다. 山下寒流曲曲淸 그 가운데 기이한 절경을 더 잘 알고자 하면 欲識箇中奇絶處 뱃노래 두세 가락을 한가로이 들어보게나. 櫂歌閑聽兩三聲

첫째 굽이 냇가에서 낚싯배에 오르니 一曲溪邊上釣船 만정봉(慢亭峰)82) 그림자는 맑은 물 푸른 하늘에 잠겨있네. 慢亭峰影潛晴川 무지개다리 (虹橋)83) 한 번 끊어진 후 소식이 없는데 虹橋一斷無消息 만학천암(萬壑千巖)은 안개 속에 사라져 가네. 萬壑千巖鎖翠煙 둘째 굽이에 우뚝 솟은 옥녀봉(玉女蜂)84) 二曲停停玉女蜂

81) 崔鐘鉉, 「朱子의 武夷九曲圖」, 『실학사상연구』제14권(역사실학회, 2000), pp.708-709.

82) 일곡 북쪽에는 대왕봉(527m)이 솟아있고 그 왼쪽에 만정봉(512m)이 있다. 만정봉은 도가(道家)의 무이군(武夷君)이 연회를 베풀던 곳이라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진시황 2 년 가을에 무이군이 허공에 무지개다리를 놓고 여러 신선들을 초대하여 잔치를 베풀었 다고 한다. 김봉규 기자, 「[九曲기행. 3] 주자의 무이구곡가」, 『영남일보』2017.09.07.

http://www.yeongnam.com/mnews/newsview.do?mode=newsView&newskey=20170907.

010220742500001(최종검색일: 2018.11.18.)

83) 무지개다리 홍교판(虹橋板)은 가학선관을 고정하기 위한 판이다.

84) 이곡에는 아름답고 수려한 옥녀봉이 있다. 옥녀봉 정상은 수풀이 자라고 절벽은 광 택이 있어서 옥석으로 조각된 모습이며, 예쁜 소녀가 맑은 물가에서 먼 곳을 응시하 는 것 같은 형상을 하였다. 전설에 따르면 옥녀(玉女)는 옥황상제의 딸이라 한다. 천 상의 옥녀는 옥황상제 몰래 인간 세상으로 내려왔다가 무이구곡의 풍광에 매혹되어 돌아가지 않았다. 그리고 대왕(大王)과 사랑하는 사이가 되어 자식을 낳고 인간계에 서 살게 되었다. 이를 본 철판도인(鐵板道人)이 옥황상제에게 이 사실을 고하자 매우

꽃을 꽂고 물가에 있음은 누구를 위한 단장인가. 揷花臨水爲誰容 도인은 양대몽(陽臺夢)을 다시 꾸지 않는데85) 道人不復陽臺夢 흥겨워 앞산에 들어가니 푸르름이 첩첩이다. 興入前山翠幾重

셋째 굽이 돌아드니 그대는 가학선(袈壑船)86)을 보았는가. 三曲君看袈壑船 노 젖기를 멈춘 지 몇 해인지 모르겠다. 不知停櫂幾何年 뽕밭이 바다가 된 세월의 무상함이 지금 이와 같으니 桑田海水今如許 물거품과 바람 앞 등불 같은 우리 인생의 허무함이 가련하다. 泡沫風燈敢自憐

넷째 굽이 들어서니 동서(東西)에 두 바위산이 있다. 四曲東西兩石巖 바위에 핀 꽃에 이슬 맺혀 푸르름을 더하고 岩花垂露碧氈渗 금계(金鷄)가 울었는데도 사람은 보이지 않고 金鷄叫罷無人見 달은 빈산에 가득하고 물은 못에 가득하네.87) 月滿空山水滿潭

다섯 굽이는 산이 높고 구름이 짙어 五曲山高雲氣深 오랜 시간 안개비로 젖어 평림(平林)은 어둑하네. 長時煙雨暗平林 숲 속에 나그네를 알아보는 이 하나 없어 林間有客無人識 사공의 노랫소리 가운데 만고의 수심이 깊어진다.88) 欲乃聲中萬古心 노하여 철판도인에게 옥녀를 잡아 오도록 했다. 그러나 옥녀는 대왕과 같이 인간세계 에 머물고 싶었다. 그러자 철판도인은 마법으로 옥녀와 대왕을 바위로 만들고 계곡의 양편에 두어 서로 만날 수 없게 하였다. 옥녀봉과 대왕봉 사이에는 병풍과 같이 철판 장(鐵板障)이라는 바위(障)가 있는데, 이는 철판도인이 옥녀봉과 대왕봉을 막고 있는 것이라 한다. 이를 안타까워한 관세음보살이 옥녀와 대왕을 가엾게 여겨 옥녀봉 맞은 편에 면경대(面鏡臺)를 두어 얼굴을 서로 비춰 볼 수 있게 하였다고 한다.

85) “도인은 더 이상 양대(陽臺)의 운우(雲雨)를 꿈꾸지 않으리.”로도 해석할 수 있다.

‘양대몽(陽臺夢)’이란 「고당몽(高唐夢)」고사를 의미하는데 초회왕(楚懷王)이 고당(高 唐)이란 곳에서 꿈에 신녀(神女)를 만나 운우(雲雨)의 즐거움을 나누었다는 고사로 남 녀 간의 정사를 의미한다. 강신애, 「朝鮮時代 武夷九曲圖의 淵源과 特徵」, 『미술사 학연구』제254권(한국미술사학회, 2007). p.36.

86) 삼곡에는 높고 험준한 암벽의 소장봉(小藏峯)이 있다. 소장봉에는 아득한 절벽 위 틈 사이에 배 모양의 목제관이 있다. 가학선관은 골짜기에 설치한 배라는 의미로 배 형 태의 관(棺)을 말하고, 유래는 명확하지 않으나 풍장(風葬)을 하던 고대 민월족(閩越 族)의 선관장(船棺葬)이었다고 한다. 강신애, 앞에 글, p.36.

87) 사곡에는 동서로 거대한 암산인 대장봉과 선조대가 마주 보고 있다. 선조대는 신선 이 낚싯대를 드리우던 곳이라고 한다. 대장봉 암벽 중간의 금계(金鷄)동굴에는 새벽 을 알리는 금닭이 있었다고 한다. 그 아래는 무이구곡에서 가장 깊은 계곡인 와룡담 (臥龍潭)이 있다.

88) 오곡은 무이구곡의 중심이며, 북쪽에는 은병봉(隱屛峰)이 우뚝 솟아있고 그 아래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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