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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성대적 성격〈태평성시도(太平城市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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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릉도원도〉와 〈무이구곡도〉가 자연을 이상향으로 하는 그림이라 면 〈태평성시도〉는 일종의 번영한 도시를 이상향으로 하는 회화작품으 로 구별된다.

도원도에도 전쟁이 없는 태평성대의 삶에 대한 동경이 반영되어 있지만 결국, 전쟁과 혼란으로 인한 백성들의 고통, 권력 부패에 따른 회의, 인 간세계의 불평등 등으로 도시를 외면하고 자연으로 도피한 은신처의 모 습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태평성시도〉의 태평성대는 도시를 근간으로 한 이상향으로 ‘태평성대(太平聖代)’란 요순시대와 같이 어질고 훌륭한 군주가 다스리는 평화로운 세상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태평성대의 ‘태평’이라는 개념은 『춘추(春秋)』, 「공양전(公羊傳)」의 삼세설(三世說)의 사상에서 유래하였다. 원래 삼세설은 공자의 시대를 중심으로 세 시기의 역사를 다룬 방식으로 어지러운 시대인 ‘거란세(據 亂世)’, 평화로 상승하는 시기인 ‘승평세(升平世)’, 이상적인 시대인 ‘태평 세(太平世)’로 세 단계의 상향적인 역사로 발전한다는 것이다.46)

태평경47)의 태평론에 의하면 ‘태평’이란

태(太)란 큰 것이다. 그 쌓인 크기가 하늘과 같은 것을 말한다. 아무것도 하 늘보다 더 큰 것은 없다, 평(平)이란 평등하게 다스려진 것을 말한다. 모든 일 이 잘 다스려지면 공평치 못한 일은 더 이상 없다.48)

46) 陳正炎 외, 앞의 책, pp.168-179.

47) 중국의 도교 경전의 일종, 『도장(道藏)』에는 결권(缺卷)을 포함한 57권 본과 당말의 도사 여구방원(閭丘方遠)이 초출했다는 『태평경초(太平經鈔』10권이 수록되어 있다.

하늘의 사자로서 내려온 ‘신인’이 유덕의 군주에게 전달하고자, 지상세계의 구제 방법 을 제자인 ‘진인(眞人)’에게 알리는 부분이 중심을 이룬다. 특히 ‘태양·태음·중화’의 3 기(三氣) 및 3기에 대응하는 ‘천·지·인’, ‘일·월·성’, ‘부·모·자’, ‘군·신·민’, ‘도·덕·인’ 등, 자연이나 인륜의 조화에 의해 태평이 실현된다고 주장하였다. 편집부 저, 『종교학대 사전』(한국사전연구사,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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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王明 編, 『太平經合校』, “太者 大也 言其積大如天 無有大于天者 平者 言治太平均 凡事悉治 無復不平” 정재서, 「『태평경』의 成立 및 思想에 관한 試論」, 『韓國文化 硏究院 論叢』제59집 제1권(이화여자대학교 한국문화연구원, 1991), p.139.

여기서 태평이란 공평한 정치, 평등한 사회가 구현된 이상향을 의미한 다. 태평의 정의가 담긴 태평경의 사상을 보면 백성의 고난에 대한 동정 심, 조정의 부패에 대한 비판, 이상세계에 대한 동경 등의 표현을 통해 당대 불평등한 사회에 대한 해결의 의지가 반영되어 있다. 그러나 도교 의 『태평경(太平經)』에서 사용된 공평, 평등한 사회라는 태평의 의미는

『태평경(太平經)』에서부터 시작된 개념은 아니고, 큰 도가 행해지고 모 두 하나 되는 ‘대동사회(大同社會)’49)에서 유래하다. 만민의 신분적 평등, 재화의 공평한 분배, 인륜의 구현 등으로 특징지어지는 대동사회는 유가 에서 말하는 대표적 이상세계인데, 태평경의 경우 삼합상보설(三合相補 設)에 입각하여 군[太陽], 신[太陰], 민[中和]이 공동운명체임을 강조하면 서 유교적 서열체계와는 다른 평등을 강조한 차별점이 있다.50)

이러한 태평성대를 그린 대표적인 작품이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태평 성시도(太平城市圖)〉[도 1]이다. 여기서 ‘성시(城市)’의 의미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성읍, 시장의 의미로 오늘날의 도시를 의미한다.51)

일반적으로 동양에서 도시란 성읍(都邑), 도성(都城)이라 지칭하며 통치 자가 거주하는 치소(治所)로서의 기능이 강한 행정체제이자 성곽을 갖춘

49) 유학은 다른 사상이나 종교에 비해 현실의 인간사회 안에서 이상향을 추구하였다.

그것은 내세가 아닌 현세의 이상사회를 건설하고자 한 것이다. 국가와 인류 전체를 의미하는 ‘天下’를 국가다운 국가와 인간다운 사람들이 사는 천하로 만들고자 하였다.

특히 유학은 국가단위 만이 아니라, 천하라는 개념을 통해서 인류전체가 인간답고 평 화롭게 사는 세상에 대한 꿈을 끊임없이 추구해왔다. 『논어』의 ‘天下有道’, 『대학』

의 ‘平天下’, 『맹자』의 ‘王天下’의 이상사회가 그러하며 대동사회는 큰 도가 행해지 고 모두 하나 되는 사회로서 유가의 이상향을 의미한다. ‘大同’이란 너와 나의 분별을 넘어 상호 간의 신뢰와 화목으로 하나 됨을 뜻한다. 즉 대동사회는 인류가 추구해온 평등이라는 가치를 통해 인류적 평화와 통합을 이룬 이상사회이다. 권정안 외, 앞의 글, pp.359-360.

50) 정재서, 「『태평경』의 成立 및 思想에 관한 試論」, 앞의 글, p.140.

51) 이수민, 「국립중앙박물관 『태평성시도』 병풍 연구」에 의하면 성시(城市)의 사전 적 정의는 다음과 같다. 城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성읍, 市는 사람들이 모여서 물품을 교환하는 곳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보이는 성시의 용례를 보면 1) 촌락(村落), 촌 야(村野)와 대칭되는 개념(광해군 14년(1622), 현종 13년((1672)), 2) 사람들이 많이 모 이는 번화한 곳(세종 28년(1446), 명종 7년(1552))이라는 뜻이 있다. 또한 ‘시장(市場)’

이라는 협의의 의미로도 쓰여서 “한양(漢陽)에 도읍을 정하고 경영한 지 두어 해 만 에 종사(宗社), 궁궐(宮闕), 성시(城市), 여염(閭閻)이 성하게 이루어졌사온데.”(태종 1 년1월14일)라 하였다. 그래서 성시(城市)는 이런 관습적인 개념을 토대로 ‘성곽과 시 장을 갖춘 도시’라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이수민, 「국립중앙박물관 〈태평성시도〉 병 풍 연구」(서울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04), p.9 각주 참조.

방어구조로서의 공간 성격이 강하다. 한양과 같이 왕과 종친, 고위 관료 등이 거주하는 왕도(王都)이자 정치, 행정, 군사의 중심지로 건설된 도시 공간이라 할 수 있다.52)

[도 1]〈태평성시도(太平城市圖)〉, 조선 18세기, 비단에 채색, 8폭 각 113.6×49.1cm

태평성시도의 대상이 되었던 성시가 수려한 자연경관인 승경지(勝景地) 를 토대로 그린 특수한 예도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정치적 중심지인 수 도, 역사적인 도시, 혹은 특정한 도시공간이 주를 이룬다. 그래서 조선시 대 성시도는 한양, 평양, 개성, 전주, 진주 등과 같은 성곽도시의 전체, 또는 일부 공간이 주된 소재였다.53)

일반적으로 조선시대 후기 성시도(城市圖)는 정사에 활용하기 위한 지 도와 같은 성격이 강한데, 〈태평성시도〉와 같이 도시라는 공간에 다양 한 인간의 삶의 모습이 등장하는 경우는 특이한 예라 할 수 있다. 또한 뒤에 기술한 〈무릉도원도〉나 〈무이구곡도〉와 같은 자연을 제재로 이 상향을 표현한 작품과도 확연히 구별된다.

성시도에 지리적 정보 외에 인간생활의 사실성이 더해지기 시작한 확실 한 기록은 정조 14년 4월에 제작된 〈성시전도(城市全圖)〉라고 할 수 있다. 화원화가를 시켜 〈성시전도〉를 그리게 하고 여러 신하들로 하여 금 시를 짓게 한 『성시전도시(城市全圖詩)』를 보면, 한양을 둘러싼 성 곽과 주위의 산들, 궁궐과 건축물들이 세워진 시장이라는 공간의 사농공 상(士農工商)의 생활상을 현장감 있게 표현하였다. 시의 내용을 통해

52) 국립중앙박물관, 『미술 속 도시 도시 속 미술』(그라픽네트, 2016), p.13.

53) 이수민, 앞의 글, p.9.

〈성시전도〉를 유추해보면

〈수선전도(首善全圖)〉[도 2]

와 같은 지도식 회화가 아니라 그 안의 각종 생활의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보이며 기존의 지리적, 기록적 성격의 성시도 와의 차이를 보인다.54) 이러한 태도는 실사구시(實事求是) 사 상의 반영으로 이상적인 도시 를 지향하면서 당대 태평성대 적 리얼리티가 적극적으로 반 영된 것으로 보인다.

국립중앙박물관의 〈태평성시 도〉는 각 폭의 장면이 연결된 8폭 병풍이다. 화가와 제작시기 는 정확하게 알려진 것이 없다.

화면 속 인물이나 복식은 중국 식이지만 풍속과 기물에 나타난 조선적인 요소를 통해 조선 후기의 작품 임을 알 수 있다. 이 작품은 4미터에 이르는 대형작품으로 상당히 많은 인물과 건물이 등장하는데, 그림 속에서 패루(牌樓)[도 3]가 중요한 기준 의 역할을 한다. 제1, 2, 3, 4, 6폭과 제7폭에 건설 중인 패루를 합쳐 모 두 6개가 등장하는데 패루는 역사적 사건을 기리거나 중요 건축물로 통 하는 도로의 기점임을 알리는 중국식 건물이다.

패루와 성문은 크고 작은 도로와 연결되는데, 도로가 근경에서 원경으 로 이어지면서 공간을 구분하고, 제4폭 위에서부터 시작하는 하천은 번 화가와 주변 지역을 나눈다. 그래서 패루, 성문, 도로, 하천을 기준으로 화면은 ① 화면 중심부의 번화가, ② 오른쪽의 언덕 주변, ③ 다리 건너 성문 주변, ④ 원경의 주택가로 구분할 수 있다. 화면의 중심을 차지하고

54) 앞의 글, p.12.

[도 2]〈수선전도(首善全圖)〉, 조선 19세기, 목판, 93.5×65.7cm

있는 번화가는 태평성대를 나타내는 주 요 공간이다.55)

제3, 4폭의 패루를 기준으로 행인과 수레가 가득한 상업 활동의 시장풍경이 펼쳐져 있고 언덕 주변의 선비와 여인 들의 모습이 번화가와 대조되는 한가로 운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그리고 다 리 건너 성문주변에는 훈련하는 군사들 과 농경풍경이 있다. 〈태평성시도〉에 는 약 2,120명 정도의 사람들 모습이 보인다. 이들은 집 안에서 생활하거나 행렬이나 무리를 지어 구경하기도 하고 상업을 비롯한 수공업, 건설, 농 경, 군사 등 각종 직업에 종사하고 있는 다양한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각 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여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생생하게 묘사되었다.

이 중에서 특히 상업 공간, 즉 다양한 상점과 그곳에서 일하는 상인과 손님들의 모습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데 상업을 기반으로 한 풍요로 운 사회상을 보여주고 있다.56) 조선 회화사에서 〈태평성시도〉처럼 다 양한 도시 상업활동에 주목한 작품은 없었다. 그러나 18세기경 대동법의 시행, 금속화폐의 통용으로 신분제가 완화되고 자신의 노력으로 처지와 생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시장경제의 발달로 민중의 삶에는 활기가 넘쳤 다. 그래서 기존의 폐쇄적인 성읍으로서의 수도가 아니라 물자교류와 상 품매매의 중심지로 성장하면서 도시에 대한 인식도 변화하였다.57) 즉,

55) 이수민, 앞의 글, p.28.

56) 국립중앙박물관, 『미술 속 도시 도시 속 미술』, 앞의 책, p.78.

57) 조선 후기 상품화폐경제가 발달하면서 지방의 유랑민이 서울에 정착하게 된다. 그래 서 인구가 급격하게 증가하게 되며 한성부의 도시공간에 모두를 수용할 수 없게 되었 다. 그래서 도성 외곽 지역인 성저십리(城底十里)까지 주거공간으로 개발되었으며, 상 업 중심지로 변모한 경강변(京江邊)에 수만 명의 인구도 대부분 상업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조선 후기 서울에는 다양한 계층과 직업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 리고 신분적 한계를 넘어선 상인, 수공업자, 노동자층이 출현하고 서울 주민의 상당수 를 차지하게 된다. 18세기 한양 인구를 30만 명 내외로 추정한다면 당시 런던과 파리 의 인구는 50~60만 정도로 한양은 세계도시 20위권 정도의 규모였다고 한다. 국립중 앙박물관, 『미술 속 도시 도시 속 미술』, 앞의 책, pp.13-14; 고동환, 『조선시대 서 [도 3] 패루(牌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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