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다)』32)를 보게 되면 소박하지만 행복했던 라다크 마을이 근대화, 산 업화로 붕괴하는 과정이 잘 나타나 있다. ‘작은 티베트’라고 불리는 히말 라야의 라다크 지방은 척박하지만 아름다운 마을이었다. 혹독한 기후와 빈약한 자원에도 불구하고 라다크 사람들은 검소하고 서로 협업하며 천 년 넘게 평화롭고 건강한 공동체를 유지해왔다. 그러나 서구식의 산업화 로 개발이 시작되면서 환경은 파괴되고 빈부의 격차, 인플레이션, 실업 등의 문제로 마을공동체는 갈등과 욕망으로 분열하게 된다. 소위 문명화 는 라다크의 평화롭고 안정된 욕망절제의 순수 사회를 붕괴시키고 서구 사회의 물질주의를 동경하게끔 인간의 욕망을 부추긴다. 물질적으로 풍 족하지는 않았지만 긴밀한 공동체적 삶 속에서 누구도 빈곤하다고 느끼 지 않았던 순박함과 자연과 함께하는 생태적 균형이 오래된 미래의 가르 침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오래된 미래의 지혜는 소국과민, 무릉도원을 통해 언급되었던 무욕(無慾), 무위(無爲)의 친자연적 이상향 과 상통한다. 산업화 도시화는 편리와 편의의 욕망을 충족시켜 주었지만 욕망절제로 인해 유지되었던 자연 생태계와 인간 공동체의 조화를 붕괴 시켰다. 그래서 『오래된 미래』에서는 이상향의 욕망 충족과 절제라는 상반된 가치의 갈림길에서 과연 올바른 지혜는 무엇일까 하는 문제를 제 기한다.
(2) 공간적 유형: 실지(實地) 또는 비실지(非實地)
‘실지적(實地的) 이상향’은 실제 문화경관에 구축된 구체적 이상향으로
32) 『오래된 미래』의 전반부는 1975년 헬레나가 처음 라다크에 갔을 때의 행복하고 평 등한 마을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이 당시에 라다크 여성들은 높은 사회적 지위를 유지했으며 가족과 지역사회의 유대가 친밀한 공동체 사회였다. 후반부는 서구화, 산 업화의 ‘개발’ 이후 라다크가 사회적, 생태학적, 경제적으로 변모된 과정을 보여준다.
라다크인들은 근대화의 편의성을 향유하게 되지만 실업, 인플레이션, 환경오염 등등이 유발되고 오랜 기간 유지되었던 생태학적 균형과 공동체의 조화는 위협받게 된다.
『오래된 미래』는 근대화, 문명화에 따른 진보의 개념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며, 아울 러 전통적인 지혜에 대한 가치를 환기한다.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 김종철 외 역, 『오 래된 미래』(녹색평론사, 1996) 참조.
시간성과 공간성에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고 시대와 공간 조건에 따른 장소 정체성의 변화, 쇄신이 발생한다. 서양에서는 ‘아르카디아’가 대표적 이며 우리나라에서는 경주의 ‘불국토’, 지리산의 ‘청학동’, ‘십승지’ 등이 다. 반면에 ‘비실지적(非實地的) 이상향’이란 실제적인 문화경관의 형성을 수반하지 않는 상상의 이상향이다. 상대적으로 과거 또는 미래의 시간성 에 얽매이는 경향이 강하고 장소정체성이 통시적으로 변화 쇄신되지 않 는 특성이 있다. 주로 종교적 이상향이 많은데, 실례로 기독교의 ‘에덴동 산’, ‘천년왕국’, 불교의 ‘미타정토(彌陀淨土)’, 동학의 ‘후천개벽 세상’ 등 이 대표적이다.33)
실지와 비실지는 지형과 공간이 실재적이냐, 비실재적이냐에 따른 분류 이기도 하지만 이상향의 토대가 되는 구조가 실질적이고 구체적이냐 또 는 관념적이고 허구적이냐에 따라 분류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유토피아는 허구의 이상향이지만 정원도시라는 구체적인 형 태, 노동과 생활의 문제와 문화의 향유까지 실질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무릉도원은 아침에 닭이 울고 복숭아꽃이 만발한 상상의 세계 속 에서 평화를 누리며 살고 있는 낙원으로 모호한 묘사가 이루어진다. 전 자가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서양인의 낙원의식을 반영하고 있다면, 후자 는 신선이나 선민(選民)만이 안식할 수 있는 관념적인 낙원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유토피아는 실현 가능성을 내포하는 데 반해 무릉도원은 실재성이 부족한 액자적인 흠모의 세계로 나타난다.34) 서양의 경우 지상 낙원과 천상낙원,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 인간과 신의 대립과 경쟁 속에 서 보다 논리적이고 실현가능한 낙원을 추구하였다면 동양의 경우는 보 다 비실지적이고 낭만적인 낙원의식이 강하였다. 그러나 서양에서도 창 세기의 에덴동산은 과거 회귀형의 대표적 비실지적 이상향이다. 에덴동 산은 타락한 아담 이브가 돌아가고자 하나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비실 지성으로 종교적 관념화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관념성
33) 최원석, 「한국 이상향의 성격과 공간적 특징」, 『대한지리학회지』제44권 제6호(대 한지리학회, 2009), pp.746-747.
34) 구인환, 「한국소설의 낙원의식」, 『근대문학의 생성과 현실의식』(한샘, 1983), pp.220-221.
을 극복하고자 하는 반작용이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이상향을 지상 가운 데 실현하고자 하는 동력이 되기도 하였다.
동양의 이상향에도 관념적인 유형이 다수를 차지하지만 실질적인 유형 도 존재한다. 수잔 넬슨(Susan E Nelson)의 논문에 의하면 중국에서 도 원에 대한 해석은 비실지적 이상향으로서 ‘신선들의 낙원’과 실지적 이상 향으로서 ‘현세적 공간’ 두 가지로 해석하였다. 당송(唐宋) 대는 도원을 신선들의 공간으로 해석하는 비실지적 경향이 강해서, 도원도는 주로 봉 황(鳳凰)과 란(鸞), 선궁(仙宮)과 신선(神仙) 등 도교적 모티브의 신선경 (神仙境)이 많았다. 그러나 도원을 현세적 공간으로 보게 되면 현세를 떠 나 자연 속에서 이상적인 삶의 터전을 발견하려는 자연 귀의적인 태도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상적인 삶의 조건이 완비된 최적의 입지를 자연 속 에서 찾으려는 의지가 강하게 보인다. 이러한 대표적인 예가 깊은 산간 의 선경을 중심으로 한 이상향으로 중국에서는 ‘무이구곡’이며 한국에서 는 ‘청학동 마을’이라 할 수 있다.35)
조선시대에는 이상향을 뜻하는 지명이 실제로 지역 곳곳에 있었다. 특 히 강원도 정선은 도원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정선 관아에는 도원을 상정한 건물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객사는 도원관(桃源館), 세 개의 문에 는 도원선위지부(桃源仙尉之府), 동헌은 범도헌(泛桃軒), 청사 위쪽에는 심원당(心遠堂), 도화유수관(桃花流水館)이 있는데 모두 이상향인 도원과 연관된 명칭이다. 이는 이상향이 단순히 허구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실지 지형과 지역을 토대로 이상세계를 구현하려 한 것이다.36)
이규경(李圭景, 1788-?)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중
「낙토에 여생을 보낼 곳을 만든다.(樂土可作菟裘37)辨證說)」에는 전국 에 낙토로 알려진 곳에 대한 자세한 소개가 나온다. 여기서 낙토의 조건 은 첫째, 전란에도 피해가 없어야 한다. 둘째, 평상시에는 생계를 유지하 기에 적절한 농토와 물이 있어야 한다. 셋째, 외부세계와 격리되어 평온
35) 최원석, 앞의 글, p.747.
36) 안대회, 「옛 문학 작품 속 이상향의 세계」, 『산수화, 이상향을 꿈꾸다』(국립중앙 박물관, 2014), p.223.
37) 토구는 토구지지(菟裘之地)의 줄임말로 벼슬을 내놓고 은거하는 곳이나 노후(老後)에 여생을 보내는 곳을 뜻한다.
한 지역이어야 한다는 것이 낙토의 최소조건으로 제시된다. 그 대표적인 낙토가 지리산 청학동(靑鶴洞), 경상도 상주 우복동(牛腹洞), 용화동(龍華 洞), 강원도 양양 회룡굴(回龍窟), 회양 이화동(梨花洞), 경기도 광복동 (廣腹洞) 등등이다.38) 이러한 장소들이 낙토로 언급되면서 많은 사람들 에게 실지적으로 존재할거라는 믿음을 주었으나 실재적인 지역명과 달리 허구의 이상향인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이규경도 아래와 같이 말하였다.
우리나라에도 도원에 버금간다고 알려진 우복동이란 곳이 있어 뜻을 가진 사 람들이 부러워 마지않는다. 천번 만번 찾아가지만 끝내 찾지를 못해 마치 고 려의 쌍명재(雙明齋)39) 이인로가 지리산 청학동을 찾았으나 찾지 못한 일과 같다.40)
라며 위의 낙토들은 실지 장소가 아님을 언급하고 있다. 특히, 이익(李 瀷, 1681-1763)과 정약용(丁若鏞, 1726-1836)과 같은 실학자들은 이상향 의 탐구를 허상이라 비판하며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비실지적 낙토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된 것이 최상의 거주지로서 의 실지적 이상향을 제시한 『택리지(擇里志)』이다. 택리지는 조선후기 의 대표적 지리서이다. 『택리지』, 「복거총론(卜居總論)」에서는 사람이 살만한 곳을 가려서 정할(卜居) 때에, 고려해야 할 네 가지 요소에 대해 제시한다. 첫째는 ‘지리(地理)’, 둘째는 ‘생리(生利 혹은 生理)’, 셋째는 ‘인 심(人心)’, 넷째는 ‘산수(山水)’이다. 이 네 가지 조건이 구비된 곳이 바로 낙토(樂土)라는 것이다. 지리란 풍수적 사유를 바탕으로 한 형이상학적 인 자연 원리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생리는 그 지역의 생산물이나 이익 을 가리킨다. 그리고 인심은 그 환경 속에서 삶을 영위해 나가는 사람들 의 관계성을 말한다. 네 번째 산수란 지리와 달리 사람들이 완상(玩賞)
38) 안대회, 앞의 글, p.223.
39) 쌍명재(雙明齋) 이인로(李仁老, 1152-1220)는 고려 후기의 문신이다. 글을 잘 짓고 초서와 예서에 능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1170년(의종 24) 19세 때 정중부가 무신의 난을 일으키고 문신에 대한 박해가 심해지자 피신하여 불문에 귀의하였다.
40) 李圭景, 『五洲衍文長箋散稿』, 「樂土可作菟裘辨證說」, “…我東亦有與挑源相埒者 其 名曰牛腹洞 有志者艶羨不已 千搜萬索 終不得尋 有若麗朝雙明齋李仁老之覓智異山靑鶴 洞而不遇者焉 更有細人贋作洞圖路記 以售於渴求之癡人 還可捧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