Ⅳ. 의지철학과 로고테라피
4.3. 의지철학과 로고테라피
쇼펜하우어와 니체는 철학치료의 두 길을 제시하고 있다. 둘 모두 고통에서 출발하 지만 치료를 위한 해답은 사뭇 달랐다. 생의 맹목적 의지에서 바라본 쇼펜하우어의 시선에서 성욕은 자연을 존속시키고 이어가지 위한 피할 수 없는 본성적 장치였다.
쇼펜하우어에게 있어 의지는 어떤 이성의 의식적 동기와 목적에 의한 것이 아니라 모 든 생물체와 무기물에게 까지 존재하는 생의 의지를 의미한다,
쾌락의 합법적 장치인 결혼으로 인해 발생하는 고통의 현상을 넘어서기 위한 처방 을 쇼펜하우어는 ‘금욕’에서 해결책을 제시했다. 그는 고통의 원인을 인간의 욕망에 있다고 보았다. 쾌락의 충동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쾌락을 던져 버리라는 처방이다.
생물학적 충동에서 비롯되는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은 그의 필생의 과제였다. 그가 홀 로 독신으로 산 이유일 것이다.
표상이 칸트에게 있어서는 선험적인 문제였으나 쇼펜하우어에게는 세계에 대한 표 상은 보편적인 표상이 아니라 개인, 즉 ‘나의 표상’이라고 보았다. 칸트의 인식론에서 표상에 대한 근거를 닦았지만, 쇼펜하우어의 의지이론은 칸트의 이론과는 대립을 이 룬다. 칸트가 인간은 선험적 주관의 형식으로 세계를 경험하는 까닭에, 물자체를 인식 할 수 없다고 보았지만, 쇼펜하우어에게 있어 표상 세계의 원인이 의지, 곧 의지가 물자체로 파악했다. 달리 말하면, 의지가 곧 세계의 원인이자 고통의 원인이라는 것이 다.
삶의 근본 의지를 칸트가 선의지로 보았다면, 쇼펜하우어는 생의 맹목적 의지라고 보았다. 삶에 대한 의지는 맹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는 물리적 힘보다 더욱 강한 충동 곧, 성적 욕망으로 파악했고, 성적 충동은 충족을 통해 해소될 수 있는데, 이것이 종 족보존을 위한 자연의 장치로 보았다. 성적 충동과 이에 대한 억압으로 인한 신경증 의 문제는 프로이트의 쾌락과 죽음의 의지와 연동된다.
쇼펜하우어는 맹목적 의지의 노예상태에서 자유하기 위한 치료방법을 제시한다. 동 물들과 달리 인간은 고통의 본질을 규명하고 해부하는 존재다. 표상과 의지의 노예상 태라는 엄존의 사실에도 불구하고 맹목적 의지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 고 있다. 바로 추상적 개념에 대한 인식을 통한 치료로, 예술과 이념 등을 통한 치료 적 가능성이 열려있다고 보았다.
추상적이고 개념적인 사고와 생각을 통해 인간은 굴레 씌워진 현실의 환경을 넘어 자유롭게 인생을 조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행복이란 욕망과 현실화 사 이의 균형에 기초한다. 고통은 욕망과 현실의 괴리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보았다. 욕망 이 크면 현실은 언제나 결핍의 고통상태에 놓일 수 있다. 소유에 대한, 쾌락에 대한 욕망을 정돈하여 현실에 맞게 자족할 때, 즉 마음의 평정심을 가질 때 행복의 상태로
385) 로저 트리그, 인간 본성에 대한 철학적 논쟁 , 238.
접근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쇼펜하우어가 스토아철학자들을 자주 언급하는 이유이 기도 하다.
쇼펜하우어는 칸트와 달리 이성이 아니라 감성에 근거한 동고에서 해법을 찾는다.
타자의 고통에 대한 동고야 말로 순수한 사랑이고, 이와 반대되는 것이 이기심이라고 규정한다. 쇼펜하우어의 동고 개념에 대해 김선희는 나의 관점에서 벗어나 세상의 관 점으로,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마음으로 정리하고 있다.
쇼펜하우어에게 있어 동고는 타자의 고통을 자신이 직접 느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밝혔듯이 의지의 노예 상태로부터 해방되어 개체를 지배하는 원리에서 자 유로워진 자에게 희로애락이라는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때 사라진 것은 나의 고통이지 세계의 고통이 아니다. 나의 표상과 나의 의지로부터는 자유로워졌 지만 다른 표상과 다른 의지에 의한 다른 사람들의 고통은 여전히 존재한다. 세상은 여 전히 그 개별화의 원리가 휘두르고 있는 폭력적 인과율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 다. 따라서 동고는 나의 고통에 대한 고통이 아니라 타자의 고통에 대한 고통이다. 개 별화의 원리에서 해방된 존재는 나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관점에 서 세상을 보고 느끼고 생각한다. 이것을 상징으로 드러내는 개념이 바로 쇼펜하우어의 동고 개념이다.386)
쇼펜하우어의 방법론으로 해결책에 도달하는 사람들은 드물다. 의지에 대한 부정과 고행과도 같은 끊임없는 자리 투쟁을 통해서 해탈과 평정심의 상태는 특별한 사람들 의 전유물처럼 보인다. 욕망하는 몸을 가지고 살아가는 한 의지로부터 완전히 자유로 워지는 것을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니체는 동일한 고통의 문제 앞에서, 생의 맹목적 충동보다 이성을 치명적인 고통의 이유로 파악했다. 이성의 억압과 굴레 속에서 벗어나는 해법으로 그는 디오니소스적 삶을 제시했다.387) 기독교와 도덕, 이성의 억압과 굴레에서 자유 하는 것을 치료의 해법으로 본 것이다. 쇼펜하우어처럼 그 역시 독신으로 살아갔음에도 삶의 고통에 대 한 해결책은 사뭇 달랐던 것이다.
니체는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자신의 사상에 적극 수용했고, 또한 격렬하게 비판했 다. 도덕의 계보학 에서 유럽사회에 허무주의를 불러온 원인의 하나로 쇼펜하우어의 의지의 부정과 동고의 윤리학에서 비롯되었다고 비판했다. 니체가 긍정하고자 했던 것은 쇼펜하우어의 의미에서 전통 형이상학적인 이성이나 인식주체로의 인간이 아니 라 몸이자 감각이었다. 니체가 제시하는 해결책은 전통적 형이상학에서 말하는 참된
386) 김선희, 철학자가 눈물을 흘릴 때 , 108-109. 쇼펜하우어의 세계관에 대한 보다 정밀한 이해를 원 하면, 이규성, 의지와 소통으로서의 세계: 쇼펜하우어의 세계관과 아시아의 철학 (파주: 동녘, 2016) 을 참고하라. 19세기의 3가지 세계관과 더불어 쇼펜하우어의 소통을 위한 대안들을 살펴볼 수 있다.
387) 백승영, 니체, 디오니소스적 긍정의 철학 (서울: 책세상, 2006) 니체의 비도덕적 윤리학, 즉 이전 의 기독교도덕에서 벗어난 디오니소스적 삶, 힘에의 의지를 따라 허무주의 극복을 위한 관점주의를 세세하게 풀어가고 있다. 이창재, 니체와 프로이트: 계보학과 정신분석학 (서울: 철학과 현실사, 2000) 니체의 계보학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연결하는 가교와 같은 책이다. 니체가 탈근대를 위 한 방법론으로 정신분석학과 도덕계보학의 상관성을 다루어놓고 있다.
세계가 아니라 가상의 세계였다.388)
무기력하며 무의미의 허무주의에 빠진 인생에 필요한 대안은 가상세계를 환기시키 는 것, 곧 꿈의 도취와도 같은 상상, 예술들과 같은 것이다. 현실의 척박함에서 음악 이나 예술은 현실의 척박함을 변형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꿈과 도취, 유희를 중심한 예술에 대한 논의 속에서 심미적 전환이 일시적이 아니라 주체자체를 조형시킬 수 있 는 대안이라고 파악했다.
니체의 기독교 비판은 당대의 도덕주의 형이상학 세계 전체에 대한 비판이기도 했 다. 도덕적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삶을 억압하는 권태이며, 실체를 가장한 위장이요 속 임수로 보았다. 유약함과 노예근성을 가려주는 일시처방일 뿐이라는 것이다. 현실을 비방하며 숨을 수 있는 내세를 발명했다고 보았다. 노예 도덕적 세계관에 대한 대안 으로 니체는 그리스 비극, 즉 디오니소스적인 영웅, 초인을 대안으로 제시한다.389) 디 오니소스적 광기가 삶의 풍요로움과 상실한 삶의 의미를 회복시킬 것이라 주장했다.
니체의 꿈은 블로흐(Ernst E. Bloch)의 낯 꿈을 선취하고 있는데, 과거의 밤 꿈보 다는 미래를 만드는 일, 삶을 조형해나가고 변화시켜가는 일에 관심을 두는 꿈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니체의 신화와 가상세계는 끊임없이 미래를 조형하고 더 나은 삶에 대한 영감과 변화의 바람을 불어넣는다.
그는 우리 인생에 막다른 골목,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삶은 허무에로 떨 어지지 않을 수 있다 주장한다. 힘에의 의지를 통해서 삶의 영겁회귀를 인정하는 운 명애(運命愛)로 돌파해 나갈 수 있다고 보았다. 고통과 허무 속 세상에서 니체의 복음 (福音)은 완전한 허무주의이다. 허무의 밑바닥까지 내려가서, 참된 세계라고 하는 것 은 허구라는 것을 인지하고, 그곳에서 극복해 내는 초인(Übermensch)이다.
니체는 도덕적 세계를 비판하며 미적이고 의지적인 세계를 표방하며, 힘에의 의지 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윤리적인 것에 대한 비판은 결국 윤리적 결여의 문제를 태생 적으로 안고 있는 셈이다. 전통철학에서 말하는 주체와 참된 세계에 대한 부정하며 제시한 그의 계보학은 결국 하버마스의 지적대로 자체 딜레마에 봉착하게 된다. 기존 의 세계를 부정하고 해체하였지만, 해체 후에는 그 어떤 합리적인 대안도 제사할 수 없다는 모순에 처하게 된다. 니체가 제시하는 계보학적 관점에서 힘에의 의지는 담론 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어야 하는데, 정초할 수 있는 존재론적 인식론적 자기 정당화 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허무를 불러오는 원인을 쇼펜하우어가 강한의지로 보았다면, 니체는 반대로 유약한 의지에 있다고 보았다. 강한 욕망과 충동과 현실세계의 괴리로 인해 허무가 찾아온다
388) 김선희, 철학자가 눈물을 흘릴 때 , 118.
389) 김선희, 철학자가 눈물을 흘릴 때 , 158-59. “니체는 그리스인들이 향유했던 이 비밀스러운 세계 를 디오니소스라는 상징적인 인물을 통하여 우리에게 제시한다. 이 봄의 충동과 마취적인 음료가 선 물하는 비밀스러운 세계에 대한 경험은 걷는 대신에 춤추게 하고, 말하는 대신에 노래하게 한다. 걷 는 것과 말하는 것을 망각할 뿐만 아니라 마법에 걸린 것처럼 느낀다. 실제로 다른 사람이 되어버릴 뿐만 아니라 오직 상상력 속에서만 살아 숨 쉬고 있던 신을 자기 자신 속에서 느낀다. 바로 이런 의 미에서 아폴론적인 것에서 예술가로 변신했던 우리는 이제 디오니소스적 경험 속에서 예술 작품, 즉 자신이 신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