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 사회는 신분제 사회로 신분에 따른 차별이 극심하여 많은 사회적 문제들을 낳았다. <춘향전>은 이러한 사회적 배경에서 탄생했다고 볼 수 있다. 최혜진이 지적한 바와 같이
“<춘향전>은
신분적 예속과 피해, 불평등 속에서 살아가던 당대 삶의 진실들을 여러 인물 형상을 통해 표현하고 있으며, 이러한 인물군상을 통해 당대 사회가 불합리하였다는 점을 드러내었다”93). <춘향전>을 이해
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사회적 배경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다 음에서는 남녀 주인공인 춘향과 이몽룡과 관련된 신분제도와 기생 제도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조선시대의 신분제도는 법제적으로 양인과 천인으로 구분하는 양 천제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양반, 중인, 평민, 천민의 네 가지의 계 층으로 구분된다. 조선 사회는 양반을 지배계층으로 하고 나머지의 계층을 피지배계층으로 하여 신분 차별이 자못 극심했다. 지배계층 으로서의 양반은 사회적 특권을 용이하게 누릴 수 있는 반면, 최하 급의 피지배계층으로서 천인은 개인이나 국가에 예속되어 생활의
93) 최혜진(2016), 「<춘향전> 인물군의 사회적 성격」, 『한국어와 문화』20, 숙명여자대 학교 한국어문화연구소, 177면.
자유를 영위할 수 없었다. 또한 천인은 신분이 세습되어 평생 천한 신분을 가져야 할 뿐만 아니라 자녀까지 물려주어야만 한다. 천인에 해당되는 계층으로서 노비, 광대, 무당, 기생, 백정 등이 있었는데,
<춘향전>의 춘향이 재색을 겸비하고도 온갖 고난을 겪어야 하는 이
유는 비천한 기생 신분에 속하는 까닭이다.여기서 기생 신분과 기생 제도에 대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기 생이라는 신분은 고려 시대부터 존재했고 조선 시대에도 그대로 유 지되었다.94)
“조선시대 기녀는 국가나 지방관청에 소속된 천민으로
서 양반들의 풍류와 향락의 수단으로 각종 행사나 연회에 동원되 었”95)던 관비의 신분이다. 따라서 기생이란 관리나 양반들의 유흥 의 수단이 될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아무리 양반의 부녀자들과 같 이 비단옷을 입을 수 있고 노리개를 찰 수 있으며 사대부들과 자유 로이 연애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천민이었고 안정된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보장이 없었다. 사랑을 받으면 다행이나 그렇지 못할 경우 대체로 고난에 찬 삶을 보내야 했다. 고을 원이 임기가 차서 돌아가 게 되면서 다른 사람이 취할 것을 염려하여 촛불로 볼을 지졌다는<파한집>의 일화
96) 는 이러한 사정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기생이란무릇 재색으로 생계를 유지하는데 미색이 사라지면 무엇으로 생계 를 유지할 수 있을까? 결국 폐인이 되어 다른 사람에게 동정을 사 는 신세가 되고 만다.
또한 기생은 자신이 좋아하는 남자에게만 순종할 권리가 없다.
만약 자신이 좋아하는 남자에게만 순종하기로 마음먹는다면 선택할 수 있는 것으로는 죽음뿐이다.97) 그런데 개인이 기생으로서의 삶을 원하는 것과 별개로 천자수모법(賤者隨母法)에 따라 기생의 딸로 태 어나면 기생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절개를 지켜 귀신이 된 기 생(전불관전)>을 통해서 알 수가 있다. 전불관은 첨사 전모와 기생
94) 조광국(2000), 『기녀담 기녀 등장 소설 연구』, 월인 참조.
95) 조광국(2000), 위의 책, 15면.
96) 조광국(2004), 위의 책, 23면 참조.
97) 이혜순, 김경미(2002). 한국의 열녀전, 월인, 429-437면 참조.
사이에 태어났기에 기생이 되어야 했고, 첨사 구모 덕분에 기생 명 부에서 이름이 빠지게 된다. 하지만 새로 온 첨사가 여전히 불관을 기생으로 취급하고 수청 들라고 강요한다. 불관이 그 말을 따르지 않자 화를 내며
“네 비록 전관(前官)이 사랑한 여자지만 한낱 진
(鎭)의 기생일 뿐이다.
어찌 감히 관령을 거역하느냐?”하고 그녀를감옥에 가둔다. 결국 불관은 “기생의 팔자로 태어난 것이 너무도 원 통합니다.” 하고 죽음을 택하고 만다.98)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한국 전통사회의 기생은 남성들의 유흥
수단으로 취급당하며 뜻대로 살 수 없고 천한 신분을 대대로 이어 받아 벗어날 길이 많지 않았다. 그러나 기생이 자신의 신분을 벗어 날 수 있는 길이 전무한 것이 아니었다. 조선 초에는 고려 정종 때 제정된 천자수모법(賤者隨母法)에 따라 일반관료와 기녀 사이에 태 어난 딸은 관기가 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태종 14년에는 양 반 관료의 딸을 기녀로 삼는 것이 지나치게 몰인정하다고 생각되어 사대부의 기첩의 소생을 양인으로 삼게 했다.99) 물론 이 규정은 여 러 차례 조정을 거쳐야 했으나 기생은 양반 관료의 첩이 되면 자기 가 면천을 받지 못하더라도 자녀만은 면천 받을 길을 열어준 것이 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모두에게 일률적으로 적용되는 것이 아니 었다.
개국공신인 화산군(花山君) 장사길(張思吉)이 합주(陜州)의 관기 복덕(福德)을 기첩으로 삼아 그 사이에 딸을 두었는데 전 첨절제사 정복주(鄭復周)가 본처와 이혼하고 복덕의 딸과 혼례를 치러 계실
(繼室)로 삼았다. 하지만 사헌부에서 이를 문제삼아 정복주가 본처
를 내쫓고 기첩의 딸과 혼인하여 정처를 삼았으니 풍속을 바로잡는 차원에서 죄를 물어야 한다고 했다. 이에 태종은 아주 특이한 판결 을 내렸다.
98) 이혜순, 김경미(2002). 앞의 책, 434-437면 참조.
99) 정연식(2004), 「춘향전 - 가공의 현실에 투영된 꿈」, 『역사비평』67, 역사비평사, 290면.
정복주는 나와 동년으로 지금 이미 늙었다. 그런데 조강지처를 버리고 천인을 얻어 스스로 배필로 삼았으니 또한 가증스럽지 아니 한가? 만약 폐하여 백성을 삼으면 복덕과 신분이 서로 맞게 되고 그러면 복덕의 사위가 되어도 괜찮을 것이다.100)
이 일화를 통해서 규정과 실제의 일치는 달성되기 어려운 것임
을 확인할 수 있다. 기생이 면천을 받을 수 있는 길은 이외에도 다 른 방법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대구속신(代口贖身)이었다. 『세종실 록』권113, 28년 7월 을미 조에 의하면 “아버지가 확실하다고 판단 되면 경외(京外)의 여기(女妓)가 유품(流品)과 조관(朝官)과 관계하 여 낳은 자식은 그 자식과 나이가 비슷한 종을 대신 바치고 속신하 여 면천하게 하도록 했다.”101) 하지만 이 제도도 여러 차례 조정을 거쳐야만 했다. 숙종 25년(1699)에 외방(外方) 관노비의 면천(免賤) 을 일절 금하는 수교(受敎)가 있었다. 그러다가『속대전(續大典)』
(1746년)에 이르러 비로소 공천(公賤)의 대구속신(代口贖身)이 법령
으로 제정되었으나 이 속신(贖身)의 제도가 기생에게는 제대로 작동 되지 않았다.102) 이를 보면 기생이 양민으로 속량되는 길이 쉽지 않 았다고 할 수 있다. 속신하려면 돈이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관청에 안면도 있어야 가능했다. 게다가 속신했더라도 완전한 면천이 아니 었다. 관청에 소속된 기생을 감독할 권한과 의무가 있는 수령은 대 구(代口)로 근무하는 관비에게 문제가 있으면 원래의 관비를 복귀시 키거나 원기(原妓)의 자식이란 근거로 기안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 기 때문이다.103)한편, 관청에 소속된 기생은 관리의 수청 요구에 시달려야 했다.
이와 관련하여,『대명률직해(大明律直解)』의「관리숙창(官吏宿娼)」
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100) 정연식(2004), 위의 논문, 292면 재인용.
101) 정연식(2004), 위의 논문, 290면 재인용.
102) 김종철(2018), 「<춘향전>에서의 법과 사랑」, 『고전문학과 교육』38, 한국고전문학 교육학회, 185면.
103) 김종철(2018), 위의 논문, 186-187면 참조.
“무릇, 관리(官吏)가 창녀(娼女)의 집에서 유숙(留宿)하면 장 육십(杖
六十)의 형(刑)에 처하고, 매개인(媒介人)은 범인(犯人)의 죄(罪)보다
일등(一等)을 감경(減輕)한다. 관원(官員)의 자손(子孫)이 창녀(娼女) 의 집에서 유숙(留宿)한 자도 또한 같으며, 명부(名簿)에 죄과명(罪
過名)을 부기(附記)하여 두었다가, 음관승습(蔭官承襲)의 날을 기다
려 관등(官等)을 1등(等) 강등(降等)하여 먼 변방(邊方)에 임용(任用) 한다.”104)
그렇지만 실제로는 관청의 기생들이 수령이 요구하는 대로 수청
을 들어야만 했다. 왜냐하면 법률이 먼 곳에 있는 대신 지방수령의 권한은 막강했기 때문에105) 수청 요구를 거역하면 춘향이나 전불관 의 신세가 되기 마련이었다.
조선후기에 수령제 운영의 강화와 더불어 지방수령의 권한이 막
강했다. 수령은 한 고을의 작은 왕이나 마찬가지였다. 고을 백성들 의 생활의 안위가 수령에게 달려 있었다. 그러한 권한을 이용해서 국법을 무시하고 범람한 짓을 하는 자가 많았다.106) 이에 대해서 철
종
2년(1851)
좌의정 김홍근(金弘根)이 탐묵(貪墨)의 폐를 말한 내용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전후(前後)의 수계를 보니 열 가운데 일곱, 여덟은 다 부정한 방법 으로 재물을 모으고 있습니다. 대개 탐관오리가 부정을 일삼는 방 법은 한둘이 아니어서, 결세(結稅)를 빼돌리기도 하고, 향임(鄕任) 을 팔기도 하며, 뇌물을 받고 송사(訟事)를 처결하기도 하고, 백성 을 위협하여 그 재물을 빼앗기도 하며, 창곡(倉穀)으로써 장난질을 해 고리대를 일삼기도 합니다. 심지어는 씀씀이가 헤퍼 관가의 빚 이 점점 많아지면 임기를 마치고 돌아갈 적에 적당히 꾸며 놓는바
104)한국고전번역원(1964),「관리숙창(官吏宿娼)」,『대명률직해(大明律直解)』,법제처, 479 면
105) 정연식(2004), 앞의 논문, 301면.
106) 김태준(1930), 박희병 교주(1990), 『교주 증보조선소설사』, 한길사, 194-19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