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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지키지 못하고 동생인 취운에게 부탁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취교와 춘향의 다른 점이 보인다. 그렇지만 오탁한 환경에 몸이 담 겨 있는데도 끝내 정결한 마음을 지켜내도록 하는 강인한 의지가 춘향과 유사하다. 한편, 이몽룡처럼 신분제의 선입견으로 인해 좌절 한 적이 없지만 김중은 다른 시련을 겪게 된다. 바로 취교의 정절을 평가하는 문제이다.298) 청루의 생활을 경험하게 되고 두 남편을 두 었던 취교가 온전하게 정절을 지킨다고 볼 수 있는가? 김중은 유교 사회의 통념을 넘어가서 취교의 행동을 보지 않고 그 행동의 동기 와 태도로 취교를 평가한다. 결국 김중의 이러한 행동은 취교에 대 한 굳은 신의에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299)

이렇게 보면 춘향과 이몽룡의 사랑과 취교와 김중의 사랑이 이

루어지는 과정을 살펴보면 아름다운 사랑만이 아니라 엄청난 시련 을 체험해보고 당사자의 시련 극복의 태도와 의지를 알아낼 수 있 는 동시에 이를 통해서 인간의 보편성과 한국과 베트남 민족의 특 수성을 탐구할 수 있다. 그래서 <춘향전> 교육에 이러한 내용을 집 어넣을 필요가 있다.

과 다른 고유한 지점이 있다. 춘향의 수절은 봉건사회의 보수적인 덕목을 강화시키는 성격의 것이 아닌, 자기의 지향과 행복을 지키기 위한 투쟁의 도구라 할 수 있다.300) 춘향은 정절을 지키기 위해 “열 녀불경이부(烈女不更二夫)”라는 전통적인 윤리에 근거를 두고 변학 도의 수청 요구에 항거하였으나, 춘향의 ‘일부종사’에는 다른 의미가 담겨 있다.301) 춘향의

‘일부종사’는 사랑 없이 의무로서만 남편을

무조건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고 믿으면서 ‘동고동락(同

苦同樂)’하는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생불여사”라며 형벌을 받을

마음까지 준비되었다. 춘향의 그러한 태도를 통해 춘향에게 수절이 매우 중요한 덕목이자 인간다운 삶을 위한 투쟁의 도구임을 알 수 있다.302) 춘향이 바라는 삶은 물질적 넉넉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사랑과 행복이 충족된 것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춘향이 “독숙공방(獨宿空房)”을 두려워하면서도 변학도의 수청 요구에 항거한다. 그녀는 스스로 변학도의 수청 요구에 항거하 는 것이 승리를 거두지 못할 일임을 알면서도 끝까지 항거한다. 춘 향에게 수절은 행복을 보증해주는 수단이다. 이렇듯, 춘향의 수절은 전통적인 덕목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이몽룡을 위한 사랑과 믿음 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래서

“이수재(李秀才)는 경성(京城)

사대부

(士大夫)의 자제(子弟)로서 명문(名門)귀족(貴族)의 사위가 되었으니

일시(一時) 사랑으로 잠깐 노류장화(路柳墻花)하던 너를 일분(一分) 생각하겠느냐”303)라는 변학도의 말에도 춘향의 마음은 조금도 흔들

300) 박희병은 춘향의 열은 순전히 자유의지에 의해 초래되고, 봉건적 신분 관계를 부정하 고, 양반적인 통치질서를 부정하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합목적적인 성격을 지니고, 약속의 이행, 신의의 관철로서 쌍방의 상호관계에 입각하는 것으로서 봉건적 의 미의 열과는 본질적으로 구별된다고 한다.(박희병, 앞의 논문, 김병국 외(1996), 앞의 책, 96면 참조.)

301) 박희병은 “춘향의 열은 비록 겉으로는 전통적 의미의 열과 똑같이 ‘일부종사’나 ‘열녀 불경이부’의 구호를 내걸고 있긴 하지만, 그 위상 및 구체적 내용이” 다르다고 보고 있 다.(박희병, 앞의 논문, 김병국 외(1996), 위의 책, 97면 참조.)

302) 이상택은 춘향의 수절은 이도령과의 애정을 성취하거나, 이도령과 결연함으로써 상류 사회에 진출하여 자기의 신분적 열등의식에서 구제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고 지 적한다.(이상택, 「성격을 통해 본 춘향전」, 김병국 외(1996), 위의 책, 223-224면 참 조.)

리지 않는다. 그 이유는 춘향에게 수절은 ‘일부종사’ 하기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사랑과 선택에 대한 믿음인 인 까닭이다.

과연 춘향의 믿음은 현실이 되었다. 이몽룡은 춘향을 잊지 않고

과거에 급제하여 암행어사가 되어 춘향을 고난에서 구해준다. 결국 춘향은 이몽룡과 함께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임 금으로부터 정렬부인이라는 품위를 부여받게 된다. 춘향이 임금으로 부터 정렬부인이라는 품위를 받게 된 것을 가리켜 <춘향전>의 춘향 의 수절은 결국 전통적 수절 관념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 할 수 있겠으나, 이에 대해서는 보다 섬세한 고찰이 필요하다. “너 같은 창기배(娼妓輩)게 수절(守節)이 무엇이며, 정절(貞節)이 무엇이 다. 구관(舊官)은 전송(餞送)하고 신관(新官) 사또 연접(延接)함이 법 전(法典)에 당연(當然)하고 사례(事例)에도 당당(堂堂)커든 고이한 말 내지 마라. 너희 같은 천기배(賤妓輩)게 충렬(忠烈)이자(二字) 왜 있으리.”304)라는 회계 나리의 말을 근거로 보면 춘향이 변학도의 수 청 요구에 응하지 않고 끝까지 완강하게 항거한 것은 봉건사회의 질서에 부합하는 일이 되지 못한다.305) 이렇게 보면 임금이 춘향의 수절에 대해 국가적 질서를 성립한 사례로서가 아닌, 개인의 뛰어난 행위로서 칭찬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결국 봉건 사회의 최고 대표자라 할 수 있는 임금의 춘향에 대한 칭찬은 개인이 자신 의 행복을 지키기 위한 행위 또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임을 간접적 으로 인정한 것이 된다. 이렇게 보면 춘향의 수절은 신분제 사회에 서 미천한 신분에 놓여있는 여성의 사랑과 행복을 보장해주는 영리 한 수단이 된다.

303) 구자균 교주(1976), 앞의 책, 135면.

304) 구자균 교주(1976), 위의 책, 137면.

305) 이지영은 <단천절부시>의 일선을 들어 당대 사회에서 절개를 지키는 행위는 신분과 관계 없이 기생의 정절을 허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반론했지만 절개를 지키는 행위가 가 치 있는 일로 인식되는 것과 기생의 수절을 허용하거나 장려하는 것이 서로 다른 일이라 고 봐야 한다. 일선은 사랑하던 남자에 대한 수절을 하기 위해서 선택할 수 있는 것으로 죽음 밖에 아무 방법도 없었던 것 자체가 그의 반증이 된다.(이지영(2013), 「<춘향전>

의 가치에 대한 비판적 검토」, 『고전문학연구』44, 한국고전문학회, 281-282면에서 참조.)

춘향의 수절과 마찬가지로 <취교전>의 취교의 정절과 수절은 전 통적 정절과 수절의 관념과는 다르다. 취교는 세상 사람들의 찬양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행복을 위해 정절을 지킨다. 취교의 정절에 대한 태도는 자신이 비파를 연주하는 것을 듣는 김중이 부 정한 행위를 하려고 했을 때 하는 말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취교가] 말하네, “그렇게 장난치지 마세요,

저만치 떨어져서 제 말씀 좀 들어보세요!

한 그루 보잘없는 요도(夭桃)가,

홍원(紅園)에 청조(靑鳥)가 날아드는 것을 막을 수는 없지요 [그러나] 이미 형포(荊布)가 된 몸,

종부의 도리로는 정절(貞節)이 최우선이지요.

상간복상(桑間濮上)[의 여인처럼] 행실이 부정하다면, 그런 사람을 도대체 누가 원하겠어요!

순간의 정욕에 이끌려 버린다면 그건,

백년의 정절을 하루아침에 저버리는 일이에요!

고금 기우(寄寓)의 인연을 생각해 보건대,

어울리는 한 쌍으로는 그 누가 최장(崔張)만 하겠어요.

[그렇지만] 운우(雲雨)가 금석(金石)을 무너뜨리니,

도가 지나쳐 연앵(燕鶯)은 서로 싫증이 나고 말았죠.

비익(比翼), 연지(連枝)와 같이 다정스럽다가 마음 한 구석에서 경시하는 마음이 싹튼 것이지요.

서상(西廂)에서 맹세하며 피운 향이 싸늘하게 식어버려, 도탑던 인연은 부끄러운 인연이 되고 말았죠.

먼저 북(梭)을 던져 [정절을] 지키지 않고서, 훗날 그대에게 부끄럽게 된다면 누구 탓이겠어요?

왜 그리 급히 화류를 강요하시나요?

언젠가 제가 은혜에 보답할 날이 틀림없이 있을 거예요.”306)

취교가 정절을 지키고자 김중에게 몸을 허락하지 않은 이유는

306) Nguyễn Du, 최귀묵 역(2004), 앞의 책, 57-59면.

청심재인(靑心才人)의 <김운교전(金雲翹傳)>의 취교(翠翹)처럼 천고 의 정절의 본보기가 되려고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와 김중의 인연이 최장(崔張)의 인연처럼 깨어질까 걱정하기 때문이다. 결국 춘향과 마찬가지로 취교에게 수절은 자기의 사랑과 행복을 지키기 위한 행위이다. 그것은 마감생에게 몸을 팔 때 취교의 생각을 통해 서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선품(仙品)이 비천한 자의 수중에 떨어졌으니, 누군가를 위해서 햇빛과 비를 피한 일이 허사로구나!

이 몸이 전락하는 지경이 될 줄 알았더라면,

도예(桃蘂)를 차라리 사랑하는 이로 하여금 꺾게 할 것을!”307)

마감생에게 시집갔기 때문에 몸을 허락하는 것은 당연하고 정절

을 잃어버리지 않은 것은 자랑스러운 일임에도 오히려 취교는 억울 한 마음만 들고 사랑하는 김중에게 몸을 허락하지 않은 것이 후회 스러운 일이라고 생각이 든다. 그녀의 이러한 생각은 봉건사회에서 는 자못 급진적인 생각308)으로, 대부분의 베트남 유가들이 취교에 대하여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다.309) 그런데 15년간의 수난을 겪고

307) Nguyễn Du, 최귀묵 역(2004), 위의 책, 87-88면.

308) 팜 반 흥(Phạm Văn Hưng)은 취교의 이러한 생각이 반란이라고 보고 있다. 그는 법적 으로 따지다보면 취교가 마감생의 첩인데 그러한 생각이 드는 것을 보니 취교가 정신적 외도를 하게 된다고 한다.(Phạm Văn Hưng(2016), 앞의 책, 138-139면.)

309) 기생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던 응웬 꽁 쯔(Nguyễn Công Trứ(阮公著, 1788-1858):

완씨(Nguyễn) 왕조의 대신이자 베트남 고유의 문학 갈래인 핫노이(hát nói)의 유명한 작 가 중의 하나이다. 그는 첩을 많이 두었는데 그중에 (베트남 교유의 창가유형인 까쭈(ca trù)연주를 업으로 하는)기생출신인 사람이 많다.)도 취교에 대하여 아낌없는 욕설을 퍼 붓는다. 그는 <취교영(翠翹詠)>이라는 시로 취교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Đã biết má hồng thời phận bạc 홍안박명을 알면서도

Trách Kiều nhi chưa vẹn tấm lòng vàng 취교가 한결같은 마음 지키지 못함을 책하노라.

Chiếc quạt thoa đành phụ nghĩa Kim lang 비녀와 부채로 맺은 김랑과의 언약을 어기고 말았네.

Nặng vì hiếu, nhẹ vì tình thời cũng phải 효를 중시하고 정을 경시하는 것은 올바르지마는 Từ Mã Giam Sinh cho đến chàng Từ Hải 마감생으로부터 서해까지는

Cánh hoa tàn đem bán lại chốn thanh lâu 청루에서 시든 꽃을 팔아 버렸으니 Bấy giờ Kiều còn hiếu vào đâu 효만으로 변명할 수 없겠구나.

Mà bướm chán ong chường cho đến thế? 왜 그렇게 벌과 나비를 실컷 맞아들였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