Ⅱ. 이론적 논의
2.3. 모델에 관한 인지과학적 논의
2.3.1. 정신 모델(Mental model)
과학철학에서의 구문론적 관점과 유사하게도, 인지심리학의 전통적 관점에서도 인간의 정신 작용을 명제적 표상(proposition-like representation)에 의한 논리에 바탕을 둔 것으로 간주한다(Inhelder &
Piaget, 1958). 그러나 이처럼 인간의 사유를 순수 구문론적 관점으로 파 악하려는 입장은 의미론적 정보와 관련된 인지심리학의 실험적 연구 결
과를 설명하지 못한다는 측면에서 비판에 부딪힌다. 이에 인간은 특정 상황에서 내적 모델을 구축하고 이를 조작하는 사고 실험을 통해 사유한 다는 대안적 가설이 부상하게 된다. 이러한 내적 모델을 인지심리학에서 는 ‘정신 모델(Mental model)’이라 한다. Johnson-Laird(1983)에 의하면 정신 모델은 새로운 환경 혹은 상황에 직면하였을 때 사람들의 정신 내 에 형성되는 대상에 대한 역동적이고 구조화된 표상이다. 이때 정신 모 델은 새로운 상황을 해석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장기기억에 저장 된 지식으로부터 도출한 정보를 결합함으로써 형성된다.
정신 모델은 물리적 시스템에서의 인과 추론(DeKleer & Brown, 1983), 인간의 사유 과정에서 내용 지식(domain knowledge)의 역할(Gentner, 1983), 귀납적 사유에 관한 연구(Holland et al, 1986) 등 광범위한 영역 에서의 인간의 이해와 사유에 관한 이론적 틀을 제공하였다. 특히, 인지 심리학자들은 과학자의 활동에서 나타나는 문제 해결 과정에 정신 모델 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실험적 연구 결과들을 보고 하였다(Chi et al, 1981; Clement, 1989; Dunbar, 1995)
2.3.2. 정신 모델과 과학 활동
정신 모델은 인간을 포함한 많은 유기체가 주어진 환경에 적응 하며 살아가기 위해 발달한 시뮬레이팅 능력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유기 체들은 지각과 경험을 통해 자신을 둘러싼 환경 속에서 특정 상태나 행 동 등의 조건(constraints)이 가져올 가능한 결과들을 예측하고 이를 바 탕으로 적응하며 생존한다. 이러한 가설을 받아들일 때, 과학 활동은 인 간의 뇌가 진화하면서 원래의 정신 모델링 능력에 의한 이해와 사유의 범주가 확장된 결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과학 활동 은 정신 모델이 제공하는 틀을 바탕으로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Johnson-Laird는 정신 모델이 실제 세계 또는 상상된 상황, 사건, 과정 에 관한 구조적 유사체(structural analogue)라고 하였는데 이는 정신 모 델의 생성이 실제 대상에 대한 유비적 표상을 통해 이루어짐을 의미한 다. 동시에, 정신 모델이 문제 해결 과정에서 요구되는 시간․공간적 관 계들, 인과적 구조, 독립체(entities)들을 포함하고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 다.
Nersessian(2002)의 입장은 기본적으로 Johnson-Laird가 말하는 이러한 정신 모델의 특징을 과학 활동에도 적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 연 현상을 표상하는 과학자의 정신 모델에 내재된 관계와 구조, 독립체 의 생성은 과학 내용 지식이 제공하는 조건들에 기반한다는 점에서 차별 화된다. 다시 말해, 과학 내용 지식은 과학자의 정신 모델 생성에 사용되 는 조건들의 원천(source domain)이다. 이와 관련하여 Nersessian (2002) 은 일반적 정신 모델과 과학자의 정신 모델 사이 차이점을 조건 제공처 에서 찾고 있다. 일상의 문제 해결 과정에서 사람들은 정신 모델을 생성 한다. 이때 바탕이 되는 조건들은 대부분 일상적 경험이나 실제 사건에 서 연유하는 것이므로 매우 높은 정확도를 가진다. 가령, 이사를 위해 방 안에 있는 커다란 가구를 밖으로 이동시켜야 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가구 를 이리저리 돌려 문을 통과하도록 할 수 있다. 이때 우리는 특별한 규 칙이나 조건을 언급하지 않고도 공간상에서 가구의 다양한 회전 방식에 따라 결과를 예상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일상적 정신 모델링에 관여하는 조건들은 별도로 언급될 필요가 없으며 우리는 특별한 어려움 없이 성공 적인 모델을 만든다. 그러나 과학자의 정신 모델링은 이와 다르다. 과학 자에게 주어진 상황은 감각적 경험이 배제된 맥락이며 모델링에 필요한 조건들은 대부분 과학 이론을 통해 제공된다. 따라서 과학자의 모델링을 위해서는 과학 이론이 제공하는 조건들에 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림 2-8은 이와 같은 Nersessian의 관점을 반영하여 일반적 정신 모 델의 작용과 정신 모델로 설명한 과학 활동의 차이점을 도식화 한 것이 다. 그림 2-8에서 조건의 원천으로부터 정신 모델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유비적으로 일어난다. 정신 모델이 실제 현상에 관한 유비적 표상이라는 점은 과학 활동의 인지과학적 해석에서 중요하다. 유비적 표상 과정에서 실제 현상과 모델의 관계는 특정 측면, 특정 정도(degree)의 유사성에 근 거하므로 둘 사이의 완전한 동일성을 요구하지 않는다. 따라서 모델은 일반성을 가지게 되므로 하나의 모델을 서로 다른 영역이나 현상에 적용 할 수 있게 된다. 이와 관련하여 태양계 모델을 원자모형에 적용한 사례 는 널리 언급되는 예시 중 하나이다(Qiming, 2002).
Nersessian(2002)은 유비적 모델링과 더불어 모델의 조작에 의한 추론 을 과학자의 모델 기반 사유에서 중요한 부분으로 다루고 있다. 과학자
의 모델 기반 추론은 제공된 조건들에 의한 제한된 방식으로 정신 모델 이 새로운 상태를 창출하는 과정이다. 따라서, 모델의 조작을 통해 추론 된 결과는 특정 영역의 내용 지식이 제공하는 조건과 일관성을 갖도록 제한된다. 그러므로 과학자는 모델의 조작을 통해 특정 조건하에 허용된 유일한 결과를 예측할 수 있다. Nersessian(2002)은 모델 조작에 의한 추 론이 모델이 구성된 이후 진행되는 명제적 과정이 아니라, 모델 구성 단 계에 이미 내재된 것이라고 피력한다. 이러한 주장에 따르면, 모델을 구 성할 때 어떤 조건들을 고려하는가에 따라 모델의 구조와 조작의 결과가 모두 결정된다. 이는 모델 구성의 조건을 변화시켰을 때 시스템이 행동 할 수 있는 방식이 어떻게 달라지는가를 알 수 있음을 의미한다.
모델 조작에 의한 추론은 인간의 인지과정에서 개념적 차원과 경험적 차원을 연결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Gooding, 1992). 모델이 경험적인 힘을 가지는 이유는 그것이 구성될 때 과학 지식에서 기인한 조건들뿐만 아니라 실제 세계에서의 경험과 현상에서 연유한 조건들에 의해 구성되 기 때문이다. 모델의 이러한 특징은 경험적 현상에 비추어 모델을 평가 하는 과정에서 중요하게 작용한다. 최초의 모델은 현상을 추상화하는 데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조건들을 기본으로 인출되거나 구성된다. 그러나 이렇게 구성된 최초 모델이 문제 해결에 실패한다면 최초 모델을 수정하 거나 현상을 다른 관점으로 이해하기 위한 조건들을 포함하도록 모델을 새로 구성해야 한다.
[그림 2-8] 일반적 정신 모델과 과학에서의 정신 모델
[그림 2-9] 모델링 과정(Nersessian, 2002)
이때 새로운 조건은 이해하고자 하는 현상(target domain)에서 얻을 수 도 있고 다른 영역의 내용 지식(source domain)에서 얻을 수도 있다. 따 라서 모델의 평가와 진화는 구조적, 인과적, 기능적인 조건의 만족 그리 고, 모델링 과정에서 획득한 현상에 관한 새로운 이해와 관련하여 일어 난다 할 수 있다. 그림 2-9는 이러한 진화의 과정을 도식화 한 것이다 (Nersessian, 2002).
2.3.3. 모델링과 과학자의 창의성 그리고, 개념 변화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을 정리하면 과학자들이 공유한 공동 체의 지식이 모델 구성의 조건을 제공하며 이렇게 구성된 모델의 조작을 통해 경험적 차원과 개념적 차원이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학자의 창의성은 이러한 틀을 통해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Qiming(2002)의 통찰은 이러한 질문에 명쾌한 답을 제공한다. 이 시점 에서 우리는 다시 정신 모델이 표상해야 할 대상에 관한 ‘구조적 유사체 (structural analogue)’라고 지적했던 Johnson-Laird의 언급에 주목해야 한다. 유사성은 동일성을 요구하지 않는다. 따라서 모델 기반 사유의 유 사성의 판단 과정에는 필연적으로 비형식적 사유가 개입하게 된다. 이와 관련하여 Qiming(2002)은 논리적․형식적 사유만으로는 과학의 발전을 설명할 수 없다고 지적하면서 유비적 사유 과정이 논리적으로 엄밀하지 않다는 점에 주목한다. 유비적 사유가 논리적으로 엄밀하지 않다는 것의 의미는 이를 연역이나 귀납적 사고와 비교할 때 명확히 이해할 수 있다.
그림 2-10은 연역, 귀납, 유비적 사유의 논리적 엄밀성과 각 사유 과정 을 통해 도출된 결론의 엄밀성을 간단히 비교한 것이다. 연역적 사유를 통해 도출된 결과는 논리적으로 상당히 제한된 결과를 도출한다. 또한, 전제가 참임을 가정할 때 연역적 논리를 통해 도출된 결과 역시 참이다.
이는 연역적 사유에서 사실상 전제에 결과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귀납적 사유는 연역적 사유보다 유동적인 결과를 도출하며 이때 결과는 참이 아닐 가능성을 어느 정도 내포한다. 유비적 사유는 유사성에 기반 하므로 가장 약한 논리적 엄밀성을 가진다.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유비 적 사유를 통해 도출된 결과는 연역이나 귀납적 사유에 비해 거짓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이는 명백히 유비적 사유의 약점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Qiming(2002)은 과학적 발견과정의 역동성을 고려할 때 유비적 사유의 이러한 논리적 느슨함은 오히려 강점으로 작용한다고 지적한다. 과학자 들은 종종 알려지지 않은 현상이나 새로운 문제를 해결하려 할 때 적용 가능한 기존 이론이 없어서 새로운 가설을 세워야 하는 상황을 대면하게 된다. 이때 유비적 사유의 논리적 느슨함은 큰 역할을 한다. 낯선 현상 앞에서 과학자는 모델을 구성하기 위한 적절한 조건을 식별하기 어려워 지고 시도된 적이 없는 다양한 조건들을 조합을 동원하려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