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각 공간이 용도에 맞게 분리되어 있었고 얼마 간은 입주 당시 깨끗하게 청소했던 모습을 유지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유치원 공간은 아이들이 신나게 노는 만큼 그야말로 혼돈의 공간으로 변해갔다. 아이들 은 모든 벽에 물감과 크레파스로 자유롭게 칠한 나름의 작품을 만들어 놓았고, 책장의 책들을 바닥에 쏟아 징검다리처럼 밟고 다녔다. 처음 공 동육아를 시작할 당시 100일 전후의 갓난아기였던 통통이와 별님이를 위 해 가져왔던 유모차는 큰 아이들의 수레가 되었다. 아이들은 놀이방에 있었던 의자들을 거실로 끌고와 일렬로 만든 후 기차놀이를 하기도 했 고, 요리 재료가 들어있었던 택배 박스를 쌓아서 아지트를 만들기도 했 다. 간식과 점심을 먹을 때 쓰는 밥상을 뒤집으면 전쟁놀이를 하기 위한 참호가 되기도 했다.
한나의 제안대로 아이들이 “자유롭게 노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다보니 공간과 물건은 아이들의 놀이에 따라 끊임없이 재편되었고 청소와 정리 정돈하기는 점차 어려워졌다. 바닥에 널린 장난감을 치워도 아이들이 금 세 또 새로운 장난감을 꺼내고, 맨발로 마당의 모래놀이터를 수시로 드 나드는 바람에 청소기를 돌려도 금방 더러워졌다. 청결을 가장 우선순위 로 꼽는 다른 보육시설들과 비교해 보았을 때 숲이랑놀자는 무법지대처
럼 보였다. 마치 “바다 위에서 물걸레질 하듯” 치워도 치워도 끝이 없다 는 사실도 문제였고 체력적 한계에 부딪힌 것도 문제였지만, 엄마들이 가장 위기의식을 느꼈던 부분은 유치원 내부를 깨끗하게 유지하기 위한 갖가지 “자질구레한 일들”이 공동육아활동을 ‘잠식’해 나가고 있다는 사 실이었다. 대안적/공동체적 가치를 누리기 위해 찾아왔는데 정작 터전에 서 하는 일은 집에서 하는 일과 별반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바닥을 쓸 고 닦는 사이 정작 아이들은 방치되고 있는 것 같다는 불만은 공동육아 를 시작한지 한달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여러 엄마들을 통해 제기 되었다.
공동육아에 대한 막연한 희망과 기대가 컸던 걸까.
고백컨대 체력이 작은 나는, 일주일도 안 되어 ‘아이고 힘들다.’라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바다 위에서 물걸레질 하는 듯한 터전 청소와 부모회의가 정신없이 오고 가며 재하와 온전히 시간을 보내지 못했고, 과연 ‘공동육아는 무엇일까’ 하는 자못 심각한 고민도 했더랬다.
서로 도우며 아이를 함께 키운다는 것이 공동육아의 큰 그림이라면, 모든 엄마들 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일을 분배하는 것은 과연 공동육아인가. 그것은 가능한 일인가? 그렇다고 셀 수도 없는 잡다한 일들이 특정 몇몇 엄마의 몫으로 고스란히 돌아가는 것은 과연 괜찮은 걸까. 나는 항상 계산하지 않고 공동육아에 몸담을 수 있는가하는 이런저런 고민들.
출처: ‘꽃마리의 숲이랑놀자 기록’ 중에서
터전에서의 일상적 업무로 인해 정작 아이들에 대한 돌봄이 부족해지는 현상은 다른 공동육아 터전에서 자주 발견되는 문제는 아니다. 왜냐면 대다수의 공동육아 터전은 어린이집 형태로 운영되고 있어 조리와 청소 를 비롯한 일상적 업무를 맡아주는 전담 인력이 상주하고 있기 때문이 다. 숲이랑놀자에서도 조리사 선생님과 같은 전담 인력을 고용하는 문제
에 대해 3월 한달 내에 여러 가지 논의가 오갔다. 일상적 업무에 대한 엄마들의 체력적 한계를 직시하고 이를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지에 대한 고민은 “서로 도우며 아이를 함께 키운다”는 공동육아의 관념적 이상 앞 에서 본격적인 ‘문제로 인식’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잡다한 일들이 특정 몇몇 엄마의 몫으로 고스란히 돌아”가고 그들의 얼굴이 눈에 띄게 수척해져 가는 게 보일 즈음에야 그들의 에너지 고갈은 ‘문제로 인식’되 었고 조리사 선생님 고용 문제가 숲이랑 전체의 협의 사안으로 올라왔 다.
비용적인 측면에서 부담이 있었던 것도 하나의 원인이었지만 조리사선 생님을 고용하는 선택에 주저했던 이유는 숲이랑이 처음부터 양육자보다 는 아이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현옥·박주희(2019)는 부모로서의 성장, 즉 ‘부모됨’의 시작은 아이뿐만 아니라 양육자 자신의 재생산노동에 대해 올바른 가치를 매길 때에야 비로소 가능하다고 지적 한다. 그에 따르면 돌봄노동은 화수분처럼 계속 끌어다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돌봄을 제공하는 사람의 에너지를 배려하고 양육자에 대한 ‘정서 적 돌봄’이 이루어져야만 공동육아공동체의 지속성이 담보된다고 설명했 다. 이러한 맥락에서 ‘서로 도우며 아이를 함께 키운다’는 공동육아의 가 치는 먼저 ‘양육자를 도울 때’ 비로소 구현된다고 볼 수 있다.
주말에 가족들이 모여 아빠들이 터전 청소 및 수리를 하는 동안 엄마들 은 회의를 거쳐 조리사선생님을 고용하기로 결정하였다. 한나와 오로라 는 각각 담임선생님과 보조 선생님으로 아이들한테만 집중하기로 하였고 나머지 숲이랑놀자 업무에 대해서는 “아주 세세한 것까지 목록을 만들 어” 분업화했다. 3월 22일부터 조리사선생님이 오셔서 간식과 음식준비 를 전담하게 되면서 비로소 엄마들도 숨을 돌릴 수가 있었다. 하지만 엄 마들은 조리사선생님 덕분에 남게 된 체력이 다시 아이에게 가야 한다 고 생각했다. 10시쯤 출근하는 조리사선생님이 음식 준비를 하실 동안 당번으로 나오는 엄마들은 아이들과 근처 산으로 숲활동을 갔다. 아이들 의 안전에 더 기여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숲활동을 다녀온 후에는 아이들 점심을 먹이고 청소와 빨래를 했다. 업무를 세분화했다고는 하지
만 청소는 여전히 난제였다.
우선 아이돌봄의 특성상 분업화한 역할만 담당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었다. 예를 들어 청소당번을 맡은 엄마가 청소기를 돌리고 있다가도 자신의 아이가 울면 뛰어가서 달래거나 수유를 하거나 기저귀를 갈아줘 야 했는데 이는 다른 엄마가 대신하기에 어려운 일이었다. 어린 아기일 수록 낯을 가리고 엄마만 찾는 경우가 대부분이였기 때문이다. 아이를 달래느라 기약 없는 시간이 흘러가는 동안 으레 다른 엄마들이 눈치껏 청소기를 잡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러다보니 상대적으로 손이 덜 가는 3, 4세 이상인 아이들의 엄마가 갓난 아이의 엄마들보다 더 많은 일을 담당 하곤 했다. “잡다한 일들이 특정 몇몇 엄마의 몫으로 고스란히 돌아”가 는 상황을 막기 위해 분업을 시작했지만 악순환은 계속 되었고 이는 모 든 엄마들의 마음의 짐이 되기 시작했다. 종달새와 아름과 같이 갓난 아 이가 있는 엄마들은 자신의 일이 다른 엄마들에게 돌아가는 상황을 미안 해했고 반대로 다른 엄마들은 미안해하는 엄마들의 모습에 심적인 부담 을 느끼게 되었다. 역할과 당번에 대한 규칙이 계속 부침을 겪고 있었던 4월 한달 동안 엄마들은 서로가 서로를 향해 ‘미안한 감정’만 내비치고 있을 뿐 이들의 관계는 진전되지 못하고 있었다.
종달새: 내가 둘째도 있고 꽃님이도 챙겨야 하다 보니 어떻게 하면 다른 엄마한테 부담이 되지 않을지, 근데 둘째 별님이가 너무 예민하기도 하고 터전에서 는 잘 안 자다가 공동육아 끝나고 차에 태우면 꽃님이 별님이 둘 다 곯아 떨어지거든. 그럼 집에 가면 나는 주차장에서 애들 깰 때까지 몇 시간을 보내는 거야. 그럼 또 밤늦게까지 안 자고 그럼 나는 또 너무 힘들고 (울 컥) 그래서 그래서 내가...(눈물)
출처: ‘꽃마리의 숲이랑놀자 기록’ 중에서
서로 도우며 양육의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시작한 공동육아가 도리어 부 담으로 다가오는 상황에 회의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은 종달새 뿐만이 아 니었다. 꽃마리는 심한 아토피 때문에 하루에도 몇 번씩 불편을 호소하
는 맥스가 혹시나 자신의 몸을 긁어 상처를 내지는 않을지 계속 주시하 여야 했는데, 자신이 당번이 아닌 날에는 다른 엄마들이 맥스 때문에 고 생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터전으로 출근하지 않는 날에는 미안한 마음 에 맥스도 보내지 않았다. 써니 또한 자신과 떨어지는 것을 몹시 어려워 하는 레오 때문에 다른 엄마들만큼 터전의 일에 함께 참여할 수 없어서 고민스러워 했다.
사실 공동육아에 있어서 구성원들의 참여와 일의 분배 문제는 집단 내 갈등의 요인으로 빈번히 등장하며 결과적으로 공동체 형성에 장애물이 되는 경우가 많다. 공동육아가 원활히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부모들의 주 체적이고 자발적인 참여가 필요한데, 각 구성원들의 균형 잡힌 참여가 부족하면 공동체 형성의 필수 조건인 ‘신뢰 기반의 관계 맺기’가 어려워 지기 때문이다(오하나·배정환 2013).
류경희·김순옥(2001)은 공동육아에의 참여는 곧 “공동체적/대안적 가족”
을 만들어 나가는 과정으로써 이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에서 자신과 집단 이 맞지 않는다는 생각에 개인적인 회의를 느끼거나 구성원 간 갈등이 일어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런 현상이라고 설명한다. 특히 집단적 활동에 소홀한 구성원이 있을 경우 다른 구성원에게 일이 전가되어 안 좋은 분 위기가 조성되거나 혹은 그냥 묵인하고 삭히며 불만을 쌓다가 결국 공동 체가 와해되는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고 말했다. 숲이랑놀자 엄마들 사이 에서도 갈등은 피할 수 없었다. 꽃마리는 연구자와의 면담에서 과거 아 름의 이기적인 태도가 다른 구성원에게 피해를 주었던 일을 지적했다.
꽃마리: 응 아름네, 맞아. 되게 뭐지 아… 나도 옛날에 그런 면이 있었어. 되게 자 기꺼 되게 잘챙기고 딱…. 예를 들어서 우리가 4시에 끝난다고 해. 그러 면 칼같이 4시에 애만 쏙 데려가. 근데 우리는 다른 가족들이 그렇지 않 았기 때문에 더 많이 눈에 튀었던거 같아. 우리는 와서 애들이랑 같이 얘 기하고 좀 도와줄 거 좀 도와주고…. 길게는 아니더라도. 오늘 어떻게 보 냈냐 이런 식으로 얘기하고 했으면 좋았는데 그냥 이제 아름네는 되게 이 제 뭔가 유치원 어린이집 보내고 데리고 오는 느낌…. 딱 데려오고 딱 왔다가 딱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