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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 장자 이후의 발전 – 황노학, 도교, 현학

Dalam dokumen 노자의 정치 사상과 제왕학 (Halaman 44-50)

도가학파는 노자 장자 이후에 몇 가지로 발전한다. 그 하나가 한비자이다. 한비자는 도가가 아 닌 법가이다. 그러나 노자에 최초의 주석인 「해노(解老)」 「유노(喩老)」를 쓴다. 그의 전에 장자 외잡편에 노자 의 여러 구절들이 인용된다. 그러나 이는 주석이라 할 정도는 아니다.

한비자 의 내용과 성격을 다시 해석해야 한다. 한비자 의 내용은 전부 다 군주의 절대권이 다. 황제의 절대권이다. 통일된 진나라에서 왕의 칭호로 만든 것이 ‘皇帝’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皇帝’라는 말 자체가 담고 있는 의미도 인간이 아니라 신이라는 뜻이다. ‘皇’이나 ‘帝’나 다 신이 다. 이사가 섬겼던 왕이 진시황이다. 진시황의 행동과 한비자의 책 내용이 똑같다. 그래서 내용 적인 면에서 보자면 한비가 아닌 이사가 쓴 것 같다.

한비자 의 맨 앞부분이 「초견진」편이다. 「초견진」의 뜻은 ‘내가 처음 진나라를 봤다’는 것이 다. 상소문의 형태인데 일반적으로는 한비가 썼다고 하는데 ‘내가’ 누군지는 나오지 않아 논란이 많다. 내용은 진나라가 6국을 멸망시키고 통일하는 방법을 적어놓았다. 그 다음 편은 「존한」편이 다. 「존한」편은 명백하게 한나라 입장에서 쓴다. 내용은 한나라는 속국인데 보존해 달라고 쓰여 있고 글안에 한비가 썼다고 나와 있다. 한나라를 옹호한다. 그래서 이것은 한비자가 쓴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초견진」편은 이사가 쓰고, 「존한」편은 한비자가 쓴 것이다. 이 두 개를 한사람이 썼다는 것은 논리에 맞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기가 6국을 멸망시키라고 하고 또 자기가 한나라를 보존시키라는 것은 말이 맞지 않는다. 한비의 일생은 한나라에 충성을 다한 충신이다.

그러면 왜 『李斯子』라고 하지 않고, 『한비자』라고 했는가? 『한비자』가 완성된 것은 진시황이 통일하고 난 이후이다. 내용 자체가 통일 이후의 것도 들어가 있다. 진나라 시대 최고의 악당이 진시황, 조고, 이사, 호해이다. 진시황이 죽고 호해가 왕이 된다. 왕이 된 호해는 형제와 대신들 을 죽인다. 그 이후 반란이 일어난다. 이사는 진시황이 죽고 난 뒤 환관 조고와 진시황의 아들 호해에게 죽임을 당한다. 요참(腰斬 허리 자르는) 형으로 잔인하게 죽는다. 「초견진」편도 편집자 가 삭제되어 이사의 이름도 나오지 않는다. 이사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책에 이름을 붙여야 하는 데 역적의 이름을 책에 붙일 수가 없어서 그 다음 장에 나오는 한비의 이름을 딴 것이다. 이런 상황들로 인해 이사자 로 못 쓰고 한비자 로 쓴다.

논리적으로 보자면 최약체인 한나라의 국력도 그렇고, 한비도 진나라로 가서 바로 투옥되고 거 기서 죽는다. 그래서 한비가 『한비자』를 썼다면 진나라 통일 전에 써야 한다. 그리고 내용도 진 나라를 두둔하는 내용이 아니라 작은 나라가 살아남는 법을 적어야 한다. 그러나 그런 내용은 거 의 없다.

한비를 정당화 시켜 준 것은 사마천이다. 사기에서 그는 이사와 한비가 순자에게서 배웠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되었다. 이사와 한비가 순자에게 배울 수 없는 이유는 순자는 제나라의 수도 ‘임치’에서 활동한다. 그런데 이사의 고향은 초나라이고, 한비의 고향은 한나라이다. 초나라 한나라 출신이 제나라 수도로 가서 배울 수 있는 확률은 거의 없다. 이사의 초나라와 한비의 한 나라와는 거리가 너무 멀다.

순자에게서 배웠다면 순자의 이야기가 나와야 한다. 그러나 한비자 어디에도 순자의 이름이나 순자 사상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한비자의 제왕학은 노자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한비자 는 노자의 주석서를 쓴다. 지역적으로나 내용적으로 순자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이런 이유로 한 비가 순자에게서 배웠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

질투심에 이사가 한비를 죽인 것도 의심스럽다. 이사는 당시 강한 나라의 재상이고 한비는 조 그만 나라의 사신에 불과했다. 라이벌 관계가 될 수 없다. 사신을 죽일 이유도 없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한비자는 한비가 아닌 이사가 썼다는 것과 한비와 이사는 순자에게서 배우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왜 한비자가 노자와 연관성이 있는지 뚜렷해진다.

노자는 초나라 사람이다. 이사도 초나라 사람이다. 당연히 초나라에 노자학교가 있었을 것이고 그 학교에서 노자의 사상을 접하게 된다.

한비자의 군주 이론의 철학적 기반은 노자에 있다. 윤리 도덕이나 이념이 아니라, 물질적 힘이 현실을 결정한다. 이런 노자의 물질주의적 형이상학이 한비자의 현실주의적 정치 이론의 기반이 된다. 「解老」 「喩老」 뿐만 아니라 한비자 의 여러 편에서 노자의 설이 보인다.

한비자 「해노」 「유노」의 내용을 보면, 노자의 처세술보다는 제왕학을 배운 것 같다. 노자의 제왕학이 한비자 로 대변되는 이사의 핵심 사상이다. 그는 “군주 - 無爲, 신하 - 有爲”를 노자 에게서 배웠다. 군주는 상과 벌로 신하를 제어한다. 신하가 실제 일을 한다.

이런 도식으로 생각한다. 이것은 주인과 노예의 관계이다. 그리고 국가를 황제의 개인 재산으 로 생각한다. 왕의 소유물 = 국가 = 토지 + 국민 이라는 가산(家産) 국가를 주장한다. 이런 생각 은 노자의 생각과는 거리가 있다. 노자는 국가는 국민 모두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점은 묵 자도 노자의 생각과 같이 국가는 국민 모두의 것이라 생각하는데 다른 것은 국가가 중재를 해준 다하는 점이다.

한비자에 영향을 미친 것은 황로학인 것 같다. 노자는 무위(無爲)의 정치를 주장한다. 국가의 간섭을 최소한으로 줄인 자유방임이다. 반면 한비자는 국가의 간섭과 통제를 최대한 높여야 한다 고 한다. 통제를 하는 이유는 통제가 없어도 돌아가는 사회, 법을 강조하는 이유는 법이 없어도 유지되는 국가를 이루고자 함이다. 즉 무위(無爲)의 국가가 된다.

노자와 한비자는 방법은 다르나 무위(無爲)의 국가를 만들고자 한 점은 같다. 이래서 노장과 법가의 융합된 사조를 ‘도법가(道法家)’라고 하는 경우가 있다.

2) 황로학

한나라 초기에 유행한 것이 황로학이다. ‘황로(黃老)’는 황제와 노자이다. 이 두 사람을 철학의 근거로 삼는다. 황로학은 제나라의 직하에서 시작됐다. 그리고 한나라 초기에 무위의 정치를 할 때, 이론적 근거가 된다. 이때는 말 그대로 자유방임의 정치를 한다.

진시황의 통치는 매우 강압적이었다. 진나라는 치밀, 복잡한 국가 체제였다. 이것을 법으로 규 정했다. 어느 사람이 태만하냐를 찾아내는 것도 신하가 하고 상과 벌을 주는 것도 신하가 한다.

이렇게 해서 거대 국가를 유지하는 이론이다. 공산주의 국가도 이 체제와 비슷한 중앙 독재 체제 이다. 이런 체제가 몰락하는 이유는 욕망을 무시하기 때문이다.

진나라가 망하고, 항우와 유방이 쟁패하면서, 중국은 철저하게 파괴된다. 한나라 초기는 피폐한

폐허였다. 여기에서 국가 기능을 유지하기는 어려웠다. 한나라 초기에 자유방임을 한 이유는 전 쟁 때문에 인적, 물적, 토대가 다 무너진다. 이런 상황이라 국가가 관여하고 싶어도 관여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말 그대로 자유방임을 하는 통치를 했다. 한나라 초는 황로학에 따라 작은 국가 이론을 지향했다. 이처럼 한비자의 국가 모델과 황로학의 국가 모델은 정반대이다.

도가 계열에서는 한나라 초의 황노학, 위진 시대의 신흥 종교인 도교나, 철학인 현학(玄學; 新 道家)이 나타난다.

황로학(黃老學)은 황제(黃帝)와 노자(老子)를 숭상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황로학은 제나 라의 직하(稷下) 학궁(學宮)에서 발생된 것 같다. 관자(管子) 는 직하의 학술을 모은 것이다. 거 기의 「심술(心術)」 「백심(白心)」 등의 편이 황로학이라 하나, 명확하지 않다. ‘黃老’라는 이름이 붙은 가장 유명한 책은 황제 내경 이라는 의학책이다.

1973년말 마왕퇴의 한나라 초기 묘의 발굴에서 비단에 적힌 많은 글들이 발견되었다. 백서 노 자도 그 중 하나이다. 그 가운데 4편이 오랜 연구 결과 한서(漢書) 에 언급돼 있는 ‘황제 사경 (黃帝四經)’이라고 믿게 됐다. 우주는 도라는 법칙이 지배하며, 인간과 우주는 동일한 구조를 가 지고 있다. 음양은 나오나 오행 개념은 없다. - 이런 특징은 황제 내경 에 그대로 들어가 있다.

황로학이 가장 유행한 것은 한나라 초기이다. 이때 황로학은 무위(無爲)의 정치, 즉 국가가 간 섭하지 않는 자유방임의 정치로 유명했다. 황로학은 항우-유방의 통일 전쟁으로 피폐한 현실 복 구에 유용했고, 백성 및 정치가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쓰다듬었다.

중국의 왕조는 농민 반란으로 망하고, 다시 새 왕조가 들어선다. 그 와중에 인구는 대략 절반 정도로 줄어들고 경제적으로 파탄에 빠진다. 넓은 농토와 줄어든 인구, 새 왕조는 토지 분배를 다시 하고, 생산력이 증가된다. 한나라 초기에도 그러했다. 통일을 한 유방이 진나라의 그 복잡 한 모든 법률을 다 폐지하고, 간략한 법 3조(略法 3章)를 반포한 것은 물론 진나라의 잔혹한 법 치주의에 대한 반대이겠지만, 또한 전쟁으로 피폐한 상태에서 국가가 백성들에게 간섭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는 인식에서 나온 것이기도 했다. 황로학에 따라 백성들을 가만 내버려 둔 결과 인 구와 경제력이 회복된다.

한 무제는 회복된 경제력을 바탕으로 동서남북 모든 곳으로 정복 전쟁을 한다. 한 무제 말기에 한나라는 빛나는 것 같지만, 망할 징조가 보였다. 한 무제는 뭔가를 하고자 했으므로(有爲), 무위 를 주장하는 황로학을 버리고, 동중서 등의 유교로 간다. 황로학의 유행은 그래서 끝난다.

이 무렵 한나라의 도가 사상을 모은 문헌이 회남자(淮南子) 이다.

초기 『노자』 주석서들이 대부분 황로학과 관련이 있다. 전국 말기, 현존하는 최초의 『노자』 풀 이 문헌이 되는 『한비자』의 「해로」 「유로」로 부터, 동한 말기 초기 도교의 주요 경전이 되는

『노자 상이주』에 이르기 까지, 이들 사이에 출현한 『노자』와 관련된 문헌들은 대부분 황로학과 연관이 있다.

황로학은 중국 고대 사상사에서 전국(戰國) 중후기 이후 서한(西漢) 시대를 거쳐 동한(東漢) 시 대까지 이어지면서 거의 400여 년 동안 유행하였던 하나의 사상적 조류이다. 그러나 그것의 정 확한 발생 시기와 그것이 진행된 기간, 그리고 그것의 구체적인 사상적 특징과 성격에 대해서는 아직 체계적으로 정리되지 못했고 또 논란도 많다.

황로(黃老)라는 말은 황제(黃帝)와 노자(老子)의 첫 글자들을 취해 만든 합성어다. 그러나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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