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道’는 ‘길’이라는 뜻이다. ‘길’은 사람들이 따라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하듯이 현상 세계의 변화에도 ‘길’이 있다. 변화가 나가는 ‘길’이다. 노자는 세계를 ‘변화’로 본다. 그리고 변화 속에 는 반드시 ‘길’이 있다. 변화가 따라가는 길이다. 이런 점에서 도는 변화의 ‘필연적 추세’이다. 그 래서 ‘道’를 ‘객관 필연성’, 혹은 ‘객관적 필연적 추세’라 할 수 있다.
이는 ‘道’라는 말에서 추론해낸 것이다. 정작 노자 원문에는 ① 도가 ‘객관적 필연적 추세’임 을 명확하게 말하는 곳이 별로 없다. 반면 도(道), 즉 길이 ② 대립자의 공존이며, ③ 현상 뒤의 본체이다. - 도가 이 두 가지라는 것은 명백하게 이야기한다.
이래서 ‘道’의 본래 뜻이 노자 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리고 도(道)가 신비화된다. 그러 나 노자 를 전반적으로 살펴보면, ‘道’의 원래 뜻인 ‘길’의 관념이 들어 있다. 노자 전체를 이해 하는데 ‘道=길’이라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이점을 망각하면, 노자 사상은 이상한 곳으로 빠지게 된다.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는다. 도는 ‘스스로 그러함’을 본받는다.
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 (25장)
결국 사람 – 땅 - 하늘은 도(道) 혹은 ‘自然’을 본받아야 한다. 여기에서 ‘自然’은 ‘스스로, 저 절로 그러함’이다. 이는 ⑴ 객관 필연성이면서, 동시에 ⑵ 주관적인 욕망 감정으로 억지로 우격 다짐으로 하지 않음을 뜻한다. 전국 시대에는 욕망 감정 때문에, 무력으로 싸웠다. 유위(有爲)의 극치이다. 노자는 무위(無爲)를 권한다. 무위는 감정 욕망으로 하는 것은 거의 없음이다. ⑴ 이것 은 결국 객관적 필연적 추세를 따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 노자의 ‘道’(길) 개념이 들어간
다. - 이는 정치인들이 알아야 하는 것이다. 물 흐르는 것과 같은 순리를 따라야 한다. 자기 운 명을 따라야지, 거슬러서는 안 된다.
도는 항상 “함이 없으나, 하지 않음이 없다.” (되지 않음이 없다.) 道常 無爲 而無不爲. (37장)
道常은 ① “도는 항상”, ② “도의 항상됨은”,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문법상 ①이 맞다. 백 서본은 ‘無爲而無不爲’를 ‘無名’이라 한다. 따라서 ‘道恒無名’을 후대에 누군가 ‘道常 無爲而無不 爲’로 바꾼 것이다. 뒷부분에 ‘無名之樸’이라는 말이 나오기 때문에 ‘道恒無名’이라 한 것 같다.
도는 객관적 필연적 추세이다. 도를 따르면, 그 추세에 의해서 일이 그러하게 이루어진다. 내가
“함이 없어도, 하지 않음이 없게 된다.” 도의 원래 뜻이 바로 이것이다.
후대에 가면 ‘無爲而無不爲’를 ‘無爲自然’으로 바꾼다. ‘無不爲’(하지 않음이 없음)은 ‘自然’(저 절로 그러함)과 같은 뜻이다. 그러나 노자는 ‘無爲自然’이라고 말한 적은 없다.
2) 객관적 추세로서 도(道)가 변화 속에 드러날 때, 이를 미리 알지 못 하는 이유는 무엇인 가? 사람들은 눈앞의 현상의 변화만 본다. 눈과 귀 등의 감각 기관은 현상을 지각한다. 그러나 현상 속에 든 ‘객관적 필연적 추세’를 지각하는 것은 아니다. 지각되지 않기 때문에, 이성적으로 추론해야 한다. 감각으로 지각한 변화의 모습을 이성적으로 사유하면, 그 안에 든 ‘필연적 추세’
를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일반인은 도(道)를 모른다. 도를 보더라도 우습게 안다. 도는 얼핏 보면, 엉성한 그물로 보인다. 그래서 사람들이 무시한다. 그리고 도에 따른 객관 필연성이 닥치면, 그때 후회한다.
노자는 이렇게 말한다.
하늘의 길은
다투지 않아도, 잘 이기고, 말하지 않아도, 잘 응하고 부르지 않아도, 스스로 오며, 느리고 굼떠도, 잘 꾀한다.
하늘의 그물은 (코가) 넓고 넓어서, 엉성하기는 해도 놓치는 법이 없다.
天之道
不爭而善勝, 不言而善應, 不召而自來, 繟然而善謀.
天網恢恢, 疏而不失. (73장)
도와 현상을 나누었을 때, 도를 따르면, 일시적으로 현상이 다르게 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결국 현상은 도의 필연성으로 간다. 도는 객관 필연성이기 때문이다. 현재의 현상에 현혹되어 도 를 어기지 말라. 도는 강제로 힘으로 하지 않는다. 말하고 부르고 우격다짐으로 잡아끌고, 이런
것이 없다. 그러나 결국 도의 객관적 필연적 추세대로 된다. 도는 드러나지 않는다. 다투지 않아 도 잘 이기고, 말하지 않아도 사물이 잘 응한다. 부르지 않아도 잘 온다.
도는 그물과 비슷하다. 코가 넓고 성겨서 다 놓치는 것 같지만, 잡을 것은 다 잡는다. 이는 객 관 필연성의 역설이다. 성기지만 다 잡는다. ‘無爲而無不爲’(함이 없어도 하지 않음이 없음), ‘無 爲自然’(함이 없어도 저절로 그러함)이라고 추상적으로 표현한 것을 노자는 구체적인 사물인 그 물의 비유로 설명한다.
이러한 것이 그대로 통치 이론으로 옮겨간다. 잘 하는 통치는 ‘無爲而無不爲’의 모습으로 드러 난다. 통치자들이 도의 객관 필연성을 따르기 때문에, “함이 없어도 하지 않음이 없음”이 된다.
말은 멋있는데, 실제로 구체적으로 대체 어떻게 하는 것인가?
3) 공(公)과 사(私)에서 사(私)의 극치인 진시황은 천하를 사적으로 소유했지만 멸망했다. 한 개인이 천하를 자기 재산으로 관리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천하를 천하의 사람에게 맡겨라.
모두가 자신의 것을 잘 할 것이다. 모두의 사(私)를 다 모으면 공(公)이 된다.
일정함을 알아서 포용한다.
포용함은 곧 공적인 것이다.
공적인 것은 곧 왕 노릇함이다.
왕 노릇함은 곧 하늘이 됨이다. 하늘이 됨은 곧 도이다.
도는 곧 오래간다. 몸이 죽도록 위태롭지 않다.
知常容, 容乃公,
公乃王. 王乃天, 天乃道.
道乃久, 沒身不殆. (16장)
도의 모습을 노자는 ‘공적인 것’, ‘일정함’, ‘포용함’으로 말한다. 객관적 필연적 추세는 그 세 가지와 연결된다. 포용하고, 공적이고, 일정하면, ‘객관적 필연적 추세’가 될 수 있다. 이것이 노 자의 정치 이론의 핵심 부분이다. 원래 정치라는 것은 혼자 다 가지려는 것이다. 그래서 투쟁하 고 싸운다. 그런데 노자는 반대로 가라고 한다. 포용하고 나누고 공적인 입장이 되라. 그것이 객 관적 필연적 추세인 도를 만들 것이다.
4) 앞의 73장에서 말하는 천도(天道)는 하늘이 나아가는 길, 즉 하늘의 길인 것이다. 이것은 노자가 말하는 자연이 나아가는 길이기도 하다. 이처럼 자연에서 배우고 길을 찾자고 하는 것은 노자의 기본적 생각이다.
하늘의 그물은 코가 넓어서 엉성하게 보이지만, 잡을 것은 다 잡는다. 도(道)라는 것도 이와 같 이 확실하지 않은 것 같지만, 하지 않음이 없다. ‘無爲 而無不爲’이다. 도라는 객관 필연성은 강 함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따라서 하늘의 도(道)도 부드러움으로 모든 결과를 만들어내고 승리한 다. 이런 사상이 현동(玄同), 화광동진(和光同塵), 부쟁(不爭) 등으로 나타난다.
하늘의 그물은 엉성하다. 도 역시 그렇다. 그러므로 도를 인식하고 따르는 사람들은 엉성하게
느슨하게 보인다. 그래서 지혜의 빛을 숨기고(和光), 어둡게 도와 같아진다(同塵). 도를 따르기 때 문에, 굳이 싸울 필요는 없다(不爭). 억지로 힘으로 강요하지 않는다. 하늘은 이런 것들을 바탕으 로 천지 만물을 키운다.
천망(天網)이라는 그물은 이 세상의 모든 구조를 유지시키는 것으로, 필연적인 법칙과 비슷한 의미이다. 그래서 아무도 어길 수 없다.
하늘이 가는 길은 (특정한 것만) 사랑함이 없이 항상 잘 하는 사람의 편에 선다.
天道無親 常與善人 (79장)
79장에서 ‘天道無親’의 ‘親’은 ‘私’와 같은 뜻으로, 개인적으로 친하거나 편드는 것을 말한다.
‘常與善人’의 ‘與’는 더불어서 어울리거나, 함께 하다는 뜻이다. 親과 與는 반대의 뜻이다.
‘선인(善人)’은 ‘잘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선하고 착한 사람’은 아니다. 세상을 사는데 실질 적 능력을 갖춘 사람이다. 그래서 잘 하는 사람(善人)이면, 누구든 상관없이 성공하게 만든다.
중국의 알리바바 그룹의 창업자 마윈의 얼굴이나 몸매는 정말 볼품없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을 잘 읽어서, 인터넷 상거래를 처음 시작한 사람 중 하나이다. 중국의 전자 상거래를 꽉 잡았고, 나아가 알리페이로 금융에도 진출해서 대성공을 거둔다. 도는 객관 필연성이다. 마윈도 이런 객 관 필연성을 잡은 것이다. 이처럼 도는 인간을 차별하지 않는다.
마윈이 금융에 진출하면서, 중국의 은행들을 전당포 수준이라 비난했다. 이에 중국 정부는 마 윈을 집중적으로 탄압했다. 상장 금지, 막대한 벌금을 물렸다. 이렇게 가면 결국 알라비바 그룹 도 몰락할 것이다. 인위적이고 강압적인 간섭이 경제를 죽이고 있다. 이는 천도(天道)와 정반대이 다. 하늘은 마윈을 성공시키고, 시진핑은 마윈을 때려잡고 있다.
5) 하늘은 잘 하는 사람(善人)의 편에 서기를 좋아한다. 일을 잘 하고, 일이 잘 이루어지는 이 유는, 도라는 객관 필연성에 따라서 행동하기 때문이다. 노자는 항상 욕망 감정으로 하는 것을 비난한다. 욕망 감정이 앞서면, 힘과 무력으로 우격다짐으로 나간다. 결국 싸움이 일어난다. 노자 는 이처럼 힘으로 해결하려 하는 것을 규탄한다. 대신 도를 알고 도에 따라 하라. 도는 물 흐르 는 것과 같은 순리이다. 객관적 필연적 추세이다. 이를 따르면 부드럽게 일을 처리할 수 있다.
힘으로 하는 것은 결과가 좋지 못하다. 도를 따르면 힘들이지 않고 좋은 결과를 가져 올 수 있 다.
노자는 ‘잘 함’(善)을 매우 강조한다. 노자의 ‘善’의 뜻은 ‘잘 함’이다. 노자는 문명이 발전할수 록 다툼과 경쟁이 심해진다고 생각한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강한 자가 이긴다. 그러나 이긴 것이 오래 간다고는 장담할 수 없다. 결국 마지막에 이기는 자가 진짜 승자이다. 강한 힘으로 이 긴 것은 원망을 낳게 되고, 오래 가지 못한다. 당장은 승리하지만, 길게 보면 패배하게 된다. 최 후의 승자, 즉 진짜 승자가 되지 못 한다. 진시황이나 항우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약함과 부드러움으로 이기게 되면, 원망이 없어지고 원만하게 오래간다. 최후의 승리자 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노자가 말하는 ‘잘 함’이다. 하늘은 누구의 편도 들지 않고, 잘하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