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앞에서 정명(正名)과 무명(無名)을 비교할 때, 이미 서술한 것처럼, ‘이름’(名)은 ‘규정하는 것’, 즉 규정자이다. 공자는 ‘이름’이 가진 규정자의 성격을 이용해서, 사회와 국가에 질서를 이 루려 한다. 내가 ‘임금’이라는 이름을 가지면, 나는 ‘임금답게’ 행위해야 한다. 나는 ‘임금’이라는 이름에 규정당한 것이다.
이름의 규정성, 이를 노자는 정치에 적용한다. 정치를 분석하는데 ‘이름’의 규정성을 사용한다.
이름으로 규정을 한다면, ‘규정하는 자’(규정자)와 ‘규정된 자’(피규정자)가 나누어지게 된다.
권력자(A)는 누군가(B)에게 이름(名)을 내리는 자이다. 이름을 내려서 규정하는 자이다.
A – 규정하는 자 (규정자) - (남에게) 규정되지 않는 자 (무규정자) B – 규정되는 자 (피규정자) - (남을) 규정하지 못 하는 자
A – 권력자는 남을 규정하지만, 남에게 규정되지 않는 자이다. 권력이 높을수록 더 그렇다. 최 고의 권력자는 모든 사람을 다 규정하지만, 정작 자신을 규정할 존재는 아무 것도 없다. 진시황 은 자신을 ‘皇帝’라 한다. ‘하느님, 신’이라는 뜻이다. 자신이 모든 것을 규정하되, 자신을 규정할 자는 아무 것도 없다는 선언이다. 하느님 위에는 아무 것도 없다.
노자는 ‘名’을 이처럼 규정성으로 해석한다. “권력 = 무규정성”이다. 위에 아무도 없기 때문에 자신은 아무런 ‘규정됨’(무규정)도 없다. 그러나 반대로 자신이 ‘무규정’이기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규정할 수 있다. 규정자이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바 ‘부동(不動)의 동자(動者)’와 비슷한 것이다.
2) 무명(無名)은 ‘이름이 없음’, 즉 ‘규정됨이 없음’이다. 이는 ‘자유’를 뜻한다. 자유는 아무런 규정도 없이 마음대로 함이기 때문이다. 이런 자유는 어떤 것인가? 자유를 규정하는 방법은 다양 하다. 가장 유명한 것은
우리 헌법 앞 부분에 나열된 ‘자유권’이다. 국가의 권력으로부터 시민이 가지는 자유이다. 이는 피와 땀으로 쟁취한 것이다. 그것이 있기 때문에 시민은 노예가 아니라, 자유인이 될 수 있다.
이와 반대 지점에는 우주 끝에서 끝까지 노니는 붕새처럼 사는 것, 즉 상상의 자유가 있다. 상 상으로는 우주 전체를 휘젓고 다닐 수 있다. 몸은 예속의 극치인 노예이지만, 마음은 황제, 아니 붕새가 되어 절대 자유를 누린다. 이것이 장자의 자유이다.
3) 노자는 ‘자유=권력’으로 등치시킨다. 권력의 크기만큼 자유가 있다. 따라서 이 자유는 ‘힘’과 같은 개념이다. 힘이 있는 만큼 사람은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자유’는 무엇인가?
노자는 ‘無名=자유’로 본다. 이는 공자의 정명 개념에서 자가 발전한 개념이다.
권력의 크기만큼 힘을 가지고, 자유를 가진다. 이는 “규정되지 않으면서, 규정할 수 있음”을 뜻 한다. 논리적으로 보자면, 나라의 최고 권력자는 모든 이를 규정할(有名) 수 있지만, 자신을 규정 할 수 있는 것은 없다(無名). 최고 권력자는 ‘무규정자’이다. 규정된 아무 것도 없다. 따라서 그것 은 말로 설명할 수 없다. 바로 이 지점에서 ‘무규정자’(無名)은 도와 같다.
도는 본체이다. 현상의 배후에 있다. 1장에서 말하듯이 현상은 유명(有名)이다. 도는 본체로서 뒤에 있다. 무명(無名)이다. 만약 어떤 것이 중요할지라도, 유명(有名)이라면, 그것은 도가 아니라 현상이다.
나라에서 최고 권력자는 본체로서 도와 같다. 현상은 본체가 드러난 것이다. 마찬가지로 나라 의 모든 것은 최고 권력자에게서 시작된다. 왕이 본체라면, 관료와 백성 모두는 현상이다.
4) 나라에서 무규정자는 하나 뿐이다. 진시황처럼 세계를 정복하면, 세계에서 무규정자는 그 하나 뿐이다. 진시황 영정의 통일은 결국 “1인의 자유, 만인의 노예화”를 뜻한다.
최고 권력은 무명(無名)이며 무규정자이다. 분할되지 않은 미분리의 하나이다.
여기에서 문제가 생긴다. 어떻게 그 권력을 제어할 수 있는가? 최고 권력자가 진시황의 호언처 럼 ‘황제(皇帝)’, 즉 ‘하느님-신’이라면 문제가 없다. 그러나 황제들은 인간이다. 인간은 유한하다.
늘 실수를 하고, 감정 욕망에 사로잡힌다. 그가 최고 권력을 사용함에 있어서 잘못할 때, 과연 누가 그것을 지적하고, 바로잡을 수 있는가? 그것은 쥐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다는 것과 같다.
진시황은 자신을 ‘황제(皇帝 하느님)’으로 자부했기에, 자신에게 비판하고 따지는 학자들을 생 매장해서 죽였다~! 이제 왕에게 바른 소리를 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한다. 다시는 양혜왕과 제선 왕에게 협박하는 맹자와 같은 신하는 나타날 수 없다.
진시황이 세계 안에서 단 하나의 절대 권력을 만든 이래, 이는 대물림되어 왔다. 그러나 이것 을 제어할 장치는 전혀 개발되지 않았다. 심지어 현재의 중국도 똑같다. 서양은 몽테스키외가 3 권 분립 이론을 제시한 이래, 국가 권력을 최소한 3개로 쪼개는 것을 당연시한다.
중국은 미분리의 권력으로 간다. 시진핑을 보라. 중국은 공산당이 입법 사법 군대 등 모든 것 을 장악한다. 단지 행정 부분만 국가에 속한다. 요컨대 공산당이 국가를 장악하고 소유한다는 말 이다. 그 공산당을 시진핑이 영도하고 있다.13)
이것은 중국의 전통적인 군주 체제에 다름 아니다. 항우와 유방처럼 호걸들이 쟁패해서 최종 승자가 천하를 차지한다. 천하는 개인 소유가 된다. 가산(家産) 국가이다. 그래서 황제가 된다.
황제는 분할되지 않는 무규정의 권력을 소유한다. 중국에서는 권력을 분립하고 나눈다는 발상 자 체가 전통적으로 없다. 노자의 무명(無名) 개념이 바로 그것을 증언한다.
5) 무명과 무위-유위
무명(無名)은 무규정이다. 무규정은 자유이다. 자유는 힘이다. 힘은 권력이다. 이처럼 노자는
‘名’이라는 언어적 규정을, 말로 규정함을 정치적 권력 행사와 같은 것이라 한다.
자유와 권력은 같다. 권력을 많이 가지면 자유가 더 큰 것이다. 마음대로 할 수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군주 -無爲, 신하 - 有爲”라는 사상이 나온다. 군주는 아무 것도 함이 없다. 반대로 신하는 모든 것을 다 한다. 따라서 군주는 함이 없지만, (신하가 다 하기 때문에), 하지 못 하는 것이 없다. 이를 노자는 ‘無爲而無不爲’ 혹은 ‘無爲自然’이라 한다. “함이 없지만, 하지 못 함이 없다.” “함이 없지만, (모든 일이) 저절로 그러하게 된다.”
노자 이후 이 사상은 중국의 군주정의 기본 원리가 된다. 특히 한비자가 그렇다. 한비자 를 쓴 이사는 초나라의 노자 학교를 다녔다. 그는 “군주 무위, 신하 유위”를 진시황에게 가르쳤고, 진시황은 진심으로 공감했던 것 같다. 그의 치세를 보면 그렇다.
그러나 정작 노자 를 보면, ‘군주 무위, 신하 유위’가 명시적으로 나오지 않는다. 단지 무명(無 名) 등의 부분에 암시하고 있을 뿐이다. 노자는 한비자 식의 군주 독재, 강압 통치를 찬성하지 않는다.
6) 노자의 ‘무명(無名)’의 개념은 ① 이데올로기(이념) 비판적 측면, ② 무규정으로 권력을 규정
13) 중국에 만연한 것은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것이다. 실제로는 황제 체제이지만, 그게 공산주의 체제인양 꾸민다. 그러 면 학자들이 북치고 장구치며 선전한다. 권력의 몽둥이와 칼날이 무서워서 백성은 찍소리도 못 한다. 국수주의자들 은 황제를 중국과 동일시하면서, 외국에 대한 증오로 길길이 날뛴다. 중국은 이런 위선을 외국에도 강요한다. ‘하나 의 중국’이 절대 원리라고 강요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하나의 중국은 황제 독재에 다름 아니다.
하는 측면 두 가지를 동시에 가진다. 공자의 정명론을 무명론으로 반박하는 것은 이념 비판의 측 면이다. 권력을 규정-무규정으로 해석해서, 군주 무위, 신하 유위를 주장하는 것은 ②의 측면이 다. 노자에게는 이 두 측면이 다 있다. 그렇지만 싹으로만 존재한다. 노자가 명시적으로 ①과 ② 를 주장하지 않는다.
7) 무명과 통나무(樸)
⑴ 이 세상에 존재하는 현상 사물은 정확히 규정되어 있어 어떤 이름을 붙일 수 있다. 그러나 반대로 道는 이름을 붙일 수 없다. 道라는 것은 규정이 되지는 않지만, 변화의 가능성이면서 동 시에 힘이다. 이런 점 때문에 노자는 道를 ‘무명(無名)의 통나무’(無名之樸. 37장)라고 한다.
이때 통나무는 원료나 원재료라는 뜻이다. 그 원료를 가공을 하면 가구가 된다. 이와 같이 국 가 기구라는 것도 군주권이라는 무규정의 상태에서 통나무가 가공되듯이 만들어 지는 것이다. 노 자에서 이 통나무의 비유는 상당히 많이 나온다. 도는 통나무이다. 그리고 무규정자라는 개념이 다.
이렇게 道는 현실에서 규정이 되지 않는 어떤 가능성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이 때 도(道)가 의 미하는 것은 ‘길’이다. 길이라고 하는 것은 세상의 모든 사물들이 변해가는 어떤 필연적인 추세 이고 과정을 뜻한다. 도의 개념에는 서로 다른 두 가지의 뜻이 있다. 그 첫 번째가 드러나기 전 의 무규정과 자유와 가능성의 개념이다. 그리고 두 번째가 드러난 이후의 객관적인 필연성의 길 의 개념이다.
⑵ 道라는 것은 이름을 붙일 수 없기 때문에 無名이라고 한다. 無名이란 무규정이다. 무규정은 자유이다. 그리고 권력이다. 그리고 道는 모든 有名을 가능하게 하는 원천이 된다.
道는 이름 붙일 수 없음(無名)이므로 말로써 표현 되지 못한다. 그러나 억지로 어떤 글자라도 붙여서 道라고 부른다. (吾不知其名,字之曰道. 25장)
다시 말해 사람들이 道라고 하는 것은 어떤 한 물질로서 탁자를 탁자라고 부르는 것과는 다르 다. 사람들이 탁자를 부를 때는 탁자라는 이름의 어떤 속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道를 부를 때는 道라는 이름의 속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처럼 탁자는 현상 사물이지만, 道는 현상 사물 이 아닌 ‘이름이 없는 이름’이다.
道는 만물이 생기고 나오는 근본이고 원천이다. 언제나 사물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도는 언제나 존재하며, 도라는 이름도 영원히 존재한다. 노자는 이 세상에 만물이 존재하는 것은 그것을 존재 하게 하는 ‘그 어떤 무엇’이 있다고 생각했다. 노자는 이런 ‘그 어떤 무엇’에 ‘道’라는 이름을 붙 였지만, 사실은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이 ‘道’이다. 따라서 道는 형식적인 것이고 실질적인 것이라 고는 말하지 못한다. 즉 만물을 생성시키는 ‘그 어떤 무엇’은 어떠한 말로도 표현할 수 없다. 이 렇게 ‘도’가 만물을 생기게 했기 때문에 도를 어떤 사물 중에 존재하는 한 사물로 볼 수는 없다.
그것은 ‘道’라는 것을 하나의 사물로 놓고 보면 ‘道’라는 것은 사물을 다 생성시키는 ‘그 어떤 무 엇’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이 모두 이름을 가지지만 ‘道’라고 하는 것은 사 물이 아니기 때문에 ‘無名’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