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도의 정치 1 – 본체로서 만물을 기름
노자는 도와 현상을 구분한다. 이것은 일종의 본체와 현상의 구분과 같다. 현상은 본체가 드러 난 것이다. 본체가 현상을 지배하고 좌우한다. 이 본체(도)와 현상의 관계를 군주와 국가(신하·백 성)의 관계에 적용한다.
큰 도는 두루 넘치네. 그것은 (만물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
만물은 그것에 기대서 살지만, (도는 만물을) 지배하지 않는다.
大道氾兮, 其可左右.
萬物 恃之而生 而不辭 (34장)
도는 만물의 배후에 있는 본체라는 것이다. 만물을 좌지우지하고, 만물을 살린다. 만물이 도에 의지해서 살아간다. 그래도 도는 만물을 지배하지 않는다. 무위 자연이다.
도가 그것을 낳고, 덕이 그것을 기른다.
물질이 그 모양을 만들고, 형세가 그것을 이룬다. (···) 그것을 키우고, 그것을 기르며,
그것을 멈추고, 그것에 독이 된다. (그것을 해치는 것.) 그것을 기르고, 그것을 덮어준다.
道生之, 德畜之; 物形之, 勢成之. (···) 長之育之, 亭之毒之, 養之覆之. (51장)
養은 먹이를 주어서 몸을 기름이다. 育은 몸보다는 마음을 기르는 것이다.
도(道 객관 필연성)를 인식하면, 덕(德 능력)이 생긴다. 도는 본체이고, 만물은 현상이다. 도가 만물을 낳고, 덕이 기르는 것이 된다. 물질이 그 몸을 만들고, 형세가 그 일을 이루어 준다. 구체 적으로 말하면, 도는 만물을 키우고 기른다. 그러면서 동시에 정지시키고, 독을 뿌린다. 즉 살리 면서 동시에 죽인다. 생기는 것은 없어진다. 자라게 하면, 반드시 독을 뿌림도 있다. 이것은 농부 의 상식이다. 모든 것이 자라지만, 강한 것만 살아남게 된다. 이런 식의 선택 역시 도의 과정이 다. 도는 대립자의 공존이다. 길러 주지만, 죽이기도 한다.
養은 길러줌이고, 覆은 덮음이다. 구체적으로는 땅이 기르고 하늘이 덮어줌이다. 땅은 싣는 것 이고, 하늘은 덮어줌 – 이것은 개천설의 대표적인 이론이다. 하늘과 땅은 그 사이의 모든 것을 길러주는 어미가 된다. 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도의 이런 성격은 그대로 통치에 적용된다. 군주는 도와 같은 본체가 되어야 한다.
만물은 도를 높이고 덕을 귀하게 여기지 않음이 없다.
도의 높음과 덕의 귀함으로도 대저 아무도 그것에게 명령을 내리지 않으나, (만물이) 항상 스스로 그러하다.
萬物 莫不 尊道 而貴德,
道之尊, 德之貴, 夫莫之命 而常自然, (51장)
도와 덕은 본체이다. 따라서 만물은 그 둘을 존귀하게 여긴다. 그렇게 존귀한 존재이지만, 도와 덕은 만물 어떤 것에도 명령을 내리지 않는다. 그러나 만물은 항상 스스로 그러하게 된다.
앞에 34장에서 도는 만물을 좌지우지할 수 있지만, 만물을 지배하지 않는다. 여기에서는 도와 덕이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만물이 스스로 그러하게 된다. 즉 자연(自然)이다.
군주는 도의 이런 본체와 무위자연의 성격을 본받아서 정치를 해야 한다. 물론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만물이 스스로 그러하게 만드는 것(自然)은 매우 어렵다. 그런 필연적 추세를 만들라는 것이다. 객관적 필연적 추세가 도(道)이다.
선거라는 것은 누가 표를 더 많이 받느냐는 싸움이다. 여론 조사 인기가 높아도 소용없다. 그 것은 허상이다. 표로 증명해야 한다. 이 지점에서 애닳는 사람이 있다. 윤석열과 이재명이다. 이 들에게 있는 가장 큰 고비는 국힘당과 민주당의 대선 후보가 되는 것이다. 둘 다 쉽지 않다.
싸워서 이기는 것이 장땡이냐? 둘은 앞에 강력한 적들이 있다. 인기 만큼의 적이 있다. 적들을 다 때려 부셔서 이기면, 대통령이 되는가? 게임룰이 오묘한 것이 있다. 표를 많이 받는 자가 대 통령이 된다. 적을 부수면, 적의 표는 다 날라간다. 대립자의 공존이다. 이기면 지는 게임이다.
반대로 지는 것이 이기는 게임이다. 그러나 져준다고 꼭 그놈들이 나를 찍으리라는 보장이 없 다.
최선의 전략은 “아무도 (만물에게) 명령을 내리지 않으나, (만물이) 항상 스스로 그러하다.” 여 기에서 확실한 것이 있다. 정치는 힘-무력의 싸움이 아니라 지혜의 싸움이다. 항우와 유방처럼 무력으로 싸워서 결판을 낼 수도 있다. 정복 전쟁 논리이다. 노자는 이것을 부정한다. 정치는 힘 싸움이 아닌, 지혜의 싸움, 도의 싸움이 된다.
도는 하나를 낳고,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고, 셋은 만물을 낳는다.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 (42장)
이 말대로 하면, 도는 만물을 낳는 것이다. 도는 만물의 어미가 된다. 도와 만물 사이에 1, 2, 3이 있다. 위의 인용문 뒤에 “만물은 음(陰)을 지고 양(陽)을 안고 있으며, (음양이) 어울린 기운 이 조화를 이룬다”(萬物 負陰而抱陽, 冲氣以爲和)라고 한다. 따라서 2는 음과 양이다. 1은 음과 양이 아직 구분되지 않은 상태이다. 음양 미분리이다. 3은 음과 양이 조화를 이룬 것, ‘冲和’이 다. 沖은 텅 빈 상태이다. 그러나 문맥상 ‘中’에 가깝다. 따라서 冲和→中和이다. 가운데 지점, 즉 알맞음이 中이고, 그 알맞음을 이루면 조화(和)롭게 된다. 음과 양, 그리고 그 알맞은 조화로
움이 3이다.
결국 2(음양)를 놓고, 앞에 1, 뒤에 3이 있다. 1은 음양 미분리이다. 이를 노자는 대립자의 둘 을 껴안음, 즉 포일(抱一 하나로 껴안음)이라 한다. 3은 대립자가 조화와 알맞음을 이룸이다. 따 라서 사물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대립자인 음양, 그리고 둘을 하나로 껴안음(抱一), 알맞음과 조 화, 이 셋이 필요하다. 이것이 정치의 핵심이기도 하다.
윤석열과 이재명이 적들과 치열하게 싸움은 음과 양이다. 그렇지만 적들을 포용해서 하나가 되 어야 한다. 포일(抱一)의 시각을 가지고 중화(中和)를 이루어야 한다. 비록 나와 싸우지만, 결국은 나의 표밭이 될 사람들이다. 하나로 껴안아야 한다. 그들과 ‘알맞은 조화’(中和)를 이루어야 한다.
도는 항상 이름이 없는 통나무이다.
비록 작지만, 천하에 어느 누구도 (그것을) 신하로 삼을 수 없다.
제후인 왕이 만약 그것을 지킬 수 있다면, 만물이 장차 스스로 (그것에) 손님이 될 것이다.
道常無名 樸. 雖小, 天下莫能臣也;
侯王若能守之, 萬物將自賓. (32장)
도는 본체이다. 현상의 재료가 된다. 마치 통나무가 모든 가구의 재료가 되는 것과 같다. 이름 이 없다는 것은 ‘규정됨’이 없음이다. 원료·재료는 규정됨이 없다. 반면 제품은 규정된 것이다.
도는 본체이다. 천하 만물을 만들어내는 원료이다. 이름이 없이 현상 뒤에 있다. 그래서 사람들 은 그것을 작게 본다. 그렇지만 아무도 그것을 신하로 삼을 수 없다. 오히려 반대로 도가 현상 사물을 만들고 움직이게 한다. 도는 주체이고, 현상은 객체이다.
군주가 나라를 다스릴 때 그렇게 해야 한다. 모든 것을 만드는 재료이지만, 어떤 것에도 명령 을 내리지 않는다. 사물들이 스스로 그러하게 만든다. 그래서 사물들이 스스로 도의 손님이 된 다. 신하와 손님의 차이이다. 侯王은 제후(侯)이었는데 왕(王)이 된 사람이다. 참된 후왕은 모두를 신하로 삼는 것이 아니라, 손님으로 만든다. 신하로 삼는 것은 정복해서 이기는 것이다. 손님으 로 하는 것은 힘으로 정복하는 것이 아니다. 윤석열과 이재명이 알아야 할 것이 그것이다. 상대 를 신하가 아니라 손님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성공한다. 신하로 굴복시키는 것이 정치가 아 니다. 손님으로 대하고 공경하는 것이 정치이다. 도가 만물의 ‘이름없는 통나무’가 되는 것이 그 것이다. 모든 것의 재료가 되는 것이다.
2) 도의 정치 2 - 正 常 公
‘올바름’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기발함’으로 군대를 쓴다.
‘일을 없앰’으로 천하를 취한다.
以正 治國, 以奇 用兵, 以無事 取天下. (57장)
노자는 正과 奇를 대립시킨다. 正은 올바름이고, 奇는 기이함, 기발함, 변칙이다. 나라를 다스 릴 때는 ‘올바른 수단’으로 해야 한다. 올바르지 않은 것은 쓰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군대와 전 쟁은 승리를 위해서 모든 것이 허용된다.
나라를 다스림은 政=正이다. 정치는 올바름으로 하는 것이다. 혹은 바로잡는 것이다. 정치는 군대처럼 승리가 목표가 아니다. (이재명은 대통령이 되는 것과 싸워서 이기는 것, 둘을 혼동하 는 것 같다. 목표는 싸워 이기는 것이 아니다. 대통령이 되는 것이다. 사람은 자신이 잘하는 것 에 빠진다. 이재명은 싸움닭이다.)
正, 즉 ‘올바름’ 혹은 ‘바로잡음’에 대해서 노자와 유가가 다른 주장을 한다. 유가는 윤리 도덕 이 올바름이고 바로잡는 수단이다. 반면 무사(無事)가 올바름이고, 바로잡는 방법이다. 그래서
내가 행위함을 없애니, 백성이 스스로 변화된다.
내가 고요함을 좋아하니, 백성이 스스로 바르게 된다.
내가 일함을 없애니, 백성이 스스로 부유해진다.
내가 욕심냄을 없애니, 백성이 스스로 소박해진다.
我無爲 而民自化, 我好靜 而民自正,
我無事 而民自富, 我無欲 而民自樸. (57장)
군주가 무위(無爲) 무사(無事) 무욕(無欲)하면, 백성이 변화하여 올바르게 되고, 소박해지고 부 유해진다. 군주가 욕망 때문에 일을 일으키고 행위를 하면서, 나라가 바쁘게 돌아가고, 신하와 백성은 고되고 일해야 한다. 물론 군주가 꼭 해야 하는 일이 있지만, 할 필요가 없는 것을 너무 많이 한다. 이명박은 4대강을 파헤치고, 반대파를 사찰하고 쫓아냈다. 청계천 재개발로 서울시장 과 대통령이 되었다고, 꼭 4대강 개발을 할 필요는 없었다. 반대파를 굳이 박해할 필요가 있는 가? 노무현이 자살한 것이 대표적이다. 하는 대로 받는 것이 세상일이다.
정치는 올바르게 하면 되지, 굳이 쓰데없는 짓거리는 할 필요가 없다. ‘무사안일’은 정말 좋은 이야기이다. 일상이 최고의 행복이다. 내가 내 몸을 의식하지 못 할 때가 가장 건강하다. 이런 것들이 소국과민의로 드러난다.
그 정치가 어둡고 어두우면, 그 백성이 순수하고 순수해진다.
그 정치가 살피고 사찰하면, 그 백성이 이지러지고 이지러진다.
其政悶悶, 其民淳淳; 其政察察, 其民缺缺. (58장)
정치는 두 가지 스타일이 있다. 하나는 국가가 백성을 사찰하지 않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살 피고 사찰하는 것이다. 悶은 어둡고 깨닫지 못 함이다. 국가가 백성의 행위나 삶에 대해서 어둡 고 잘 알지 못 함이다. 반면 察은 국가가 백성을 완벽하게 감시하는 것이다. 요즘으로 치자면, 민주주의와 독재 국가이다. 한국과 중국의 차이이다. 북한보다 더한 곳이 중국이다. 사찰하는데도 돈과 기술이 든다. 독재자는 찰찰(察察)하는 정치를 선택하겠지만, 백성은 민민(悶悶)한 쪽을 택 할 것이다. 크게 보자면, 최고 권력자에게도 찰찰(察察)보다는 민민(悶悶)하는 쪽이 낫다. 후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