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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의 시거용현(尸居龍見)

Dalam dokumen 노자의 정치 사상과 제왕학 (Halaman 99-110)

1) 카리스마 – 정복 전쟁의 논리

노자의 현동(玄同)과 비슷한 것이 장자의 ‘尸居龍見’이다. 장자는 말한다.

시동처럼 있어도 용이 나타난다.

연못처럼 침묵해도 우레 소리가 난다.

尸居龍見 淵黙雷聲

그가 가만 있어도 그에게 용이 어른거린다. 그가 침묵해도, 우레 소리가 친다. 정지와 용, 침묵 과 우레는 모순이다. 이 양자가 함께 있는 사람이 있다. - 대부분의 경우는 최고 권력자이다. 그 의 카리스마는 바로 가만 있어도 용이 나타나고, 침묵해도 우레가 침이다. 그런데

장자는 권력이 아니라, 道를 알고 행동하는 사람을 묘사하는 말로 쓴다. 도를 안다고, 과연 용

과 우레가 될 수 있는가?

장자는 「소요유」에서 붕새를 이야기한다. 이 붕새는 세상의 모든 것을 초월달관하고 유유히 노 닌다. 도를 체득한 사람을 상징하는 말이다. 붕새는 용과 우레 형의 인간과는 정반대이다. 용은 왕을 상징한다. 신비한 신기한 어떤 힘 가진 존재이다.

시동(尸童)처럼 있어도 용이 나타난다.

연못처럼 침묵해도 우레 소리가 난다.

정신이 움직이니, 하늘이 따른다.

조용히 아무런 함이 없어도, 만물이 묶여서 밥을 짓는다.

君子 ··· 尸居而龍見, 淵黙而雷聲,

神動而天隨, 從容无爲而萬物炊累焉. 장자 「재유(在宥)」 「천운」

인식이라는 것은 인식의 주체와 인식 대상 간의 거리에서 성립한다. 인식은 주관과 객관이 서 로 떨어져야 성립한다. 이는 도의 인식에 적용된다.

도를 인식하는 자는 도와 떨어져 있다는 말이다. 인식은 내 밖의 것을 하는 것이다. 도가 내 밖에 있다는 말이다. 만약 도와 하나가 되고, 도와 같아지면, 도는 인식할 수 없게 된다. 도와 하 나인 사람은 어떤 지식도 없게 된다. 주관인 나와 객관인 도가 같아지게 되면, 인식은 없게 된 다. 도와 하나가 되면, 인식은 없는 반면, 끝없는 능력을 가지게 된다.

(이는 장자가 혜시 등 명가에게서 배운 논리이다. 이 논증은 개떡 정도이다.)

이처럼 도가 사람의 안에 있게 되면, 용이나 우레와 같이 밖으로 드러나게 된다. “시동(尸)처럼 가만히 있어도 용처럼 드러나고, 연못처럼 침묵해도 우레 소리가 난다!”라고 하는 것은 신비한 힘이나, 감출 수 없는 카리스마가 가득 차 있는 사람이다.

장자의 「인간세」에서는 똑똑하면서 잔인한 폭군의 이야기가 나온다. 「응제왕」에서는 ‘帝王’이라 는 말이 나온다. 帝王은 ‘신적인 군주’이다. 하느님과 같은 능력과 힘을 가진 군주라는 뜻이다.

이렇게 장자는 초월달관의 상징인 붕새와는 다른 이미지인 카리스마가 넘치고, 최고의 권력을 가 진 군주를 이야기한다. 이런 말들은 천하통일을 이루고 최고의 권력을 가진 진시황을 떠올리게 한다. 아마 진시황이 장자 를 읽고 제왕이 되려 했던 것 같다. 그래서 자신을 ‘황제(皇帝)’라 칭 한다.

이런 카리스마가 있는 인물로는 중국은 모택동이 있고, 한국에는 박정희가 있다. 반대의 인물 은 등소평이다.

“정신이 움직이니 하늘이 따른다”(神動而天隨) 는 말은 카리스마를 의미한다. 정지함에 용이, 침묵에 우레가 나는 것이다. 이 카리스마에 만물은 물론 하늘도 따른다.

이것은 정복 국가의 정복자를 상징한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앞에서 말한 용, 우레는 나의 정신 또는 신묘함에서 나오니, 여기서 장자 가 하는 이야기는, 카리스마는 지배력, 또는 지배하는 힘이다.

용(龍)과 우레(雷)는 나의 정신과 신묘함이다. 이것이 있으면, 하늘도 나를 따른다. 진시황이 추 구 하였으며, 자신을 황제라 부른다. 자신이 신이라는 것이다.

“조용히 아무런 함이 없어도, 만물이 묶여서 밥을 짓는다.” (從容无爲而萬物炊累焉) 이는 무언 가에 속박당해 밥을 짓는다는 말이다. 예속이 되어서 밥을 짓는 것이다. 이는 노예가 되었다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정복 전쟁에서 포로들이 노예가 된다. 여기에서는 카리스마가 모두를 노예로 확 쓸어버린다. 그야말로 ‘칼 있으마’이다.

정복 전쟁의 궁극적인 목표는 적의 의지까지 정복하는 것이다. 징기스칸 군대의 전략은 공포 전술이다. 저항하는 놈은 잔인하게 죽인다. 저항할 의지를 꺾어 버린다. 바로 이런 정복 전쟁의 논리를 장자는 “尸居龍見, 淵黙雷聲”이라 아름답게 표현한다. 칼이 아니라, 카리스마로 정복한 다. 눈빛 하나, 손짓 하나로 다 제압한다.

* 현동(玄同)이나 화광동진(和光同塵)은 지혜를 감추고 겉으로는 잘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 이 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카리스마를 안에다 감추고 안 드러내는 것은 이해하기 쉽지 않다. 정 말 그렇게 효과가 있냐? 이는 정복 전쟁의 변형이다. 절대 권력자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尸居龍見, 淵黙雷聲”이 있는 현실은 지옥일 것이다.

사나이를 숭배하는 남자들은 “尸居龍見, 淵黙雷聲”을 목표로 삼을 것이다. 군대의 사단장, 조 폭 두목, 그리고 마누라 앞의 남편이 그렇다. 경상도 사나이 철학을 완성한 남명 조식이 바로 그 두 구절을 매우 좋아했다.

노자는 권력을 쓰지 말라고 한다. 안 쓰고 쓸 듯 말 듯 할 때가 가장 권력이 잘 작동한다. 한 번 쓰면 사람들이 그것에 적응한다. - “尸居龍見, 淵黙雷聲”도 그렇게 볼 수는 있다. 그러나 권 력과 카리스마는 다르다.

5. 맹자의 수면앙배(睟面盎背), 대학 의 심광체반(心廣體胖)

맹자는 공자의 사상을 계승 발전시킨다. 마음에 덕을 쌓아서 인격을 닦아야 한다. 그 인격을 이룬 자는 겉으로 밝게 빛나게 된다고 맹자는 말한다.

군자가 본성으로 하는 바는

인격 의로움 예의 지혜가 마음에 뿌리박아서

그것이 낯빛에 생겨남이 맑아서, 얼굴에 보이고, 등에 그득 차고 네 몸에 베풀어져서, 네 몸이 말하지 않아도 깨우친다.“

君子所性 仁義禮智 根於心 其生色也

睟然見於面 盎於背 施於四體 四體不言而喩. 맹자 「진심」 상 21.

‘채워서 가득참’을 일러서 ‘아름다움’이라 한다.

‘채워서 가득차서 빛나는 것’을 일러서 ‘큼’이라 한다.

‘커서 변화시킴’을 일러 ‘성스러움’이라 한다.

‘성스럽되 (그가 한 것을) 알지 못함’을 일러 ‘신묘함’이라 한다.

充實之謂美, 充實而有光輝之謂大, 大而化之之謂聖, 聖而不可知之之謂神. 맹자 「진심」 하 25

부유함은 집을 윤택하게 하고, 덕은 몸을 윤택하게 한다.

마음이 넓어지고 몸이 후덕해진다. 그러므로 군자는 반드시 뜻을 성실하게 한다.

富潤屋 德潤身 心廣體胖 故君子 必誠其意. 대학 전 6장

(1) 맹자가 말하는 “얼굴에 보이고, 등에 그득함”(睟面盎背)과, 대학 에서 말하는 “마음이 넓 어지고 몸이 후덕해짐”(心廣體胖)은, 안에 쌓여진 덕과 인격이 바깥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공자나 맹자에 따르면, 사람이 마음에 인격을 갈고 닦으면, 그것이 말과 행동으로 드러나게 되고, 온몸 이 지혜로 빛이 나게 된다. 광휘(光輝)는 빛이 나는 것이다. 이렇게 빛이 나면, 타인에게 전해진 다. 전해지면 영역이 생기게 된다. 그것이 大이다.

大는 어떤 단위 구역을 말한다. 이것의 의미는 어떤 영역에 가득 차서, 그 영역을 다 교화시키 는 것인데, 이는 ‘성스러움’을 뜻한다. ‘성스러움’은 통치를 의미한다. 인격을 깊이 닦고, 道를 체 득하면, 부처님이나 예수님처럼 겉으로 빛이 나는 후광이 생긴다.

맹자가 말하는 성인은 이상적 통치자이다. 이것은 화광동진(和光同塵)과 정반대이다. 睟面盎背 는, 내 안에 윤리, 도덕이 쌓이면, 그것이 겉으로 드러난다. 그러면 아름답다. 가득차서 드러나면 아름답고 빛이 나서, 어떤 영역을 다 채운다. 여기서 빛은 통치를 의미한다. 그래서 빛으로 통치 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장자 스타일은 카리스마로 강압으로 신비를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정복자의 힘으로 만 드는 것으로, 강한 카리스마를 뜻한다. 장자가 말하는 용이나 우레는 사람에게는 실제로 없지만, 그 사람을 만나 본 사람들이 보고 느끼는 것이다. 이것은 절대 권력이라는 힘의 카리스마가 온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이다.

반면 맹자가 말하는 것은 온화하게 반짝이는 지혜의 빛이 얼굴에 나타나는 것이고, 실제로 덕 이 몸에 베인 모습이다. 맹자는 여기서 명확한 표현은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품이 빛나면 사람 들이 감복을 한다. 성인이 되는 것이다. 카리스마를 인의예지, 즉 인격으로 만든다. 이것은 부드 러운 카리스마이다.

(2) 노자는 눈으로 볼 수 있는 현상 세계의 이면에는 눈으로 볼 수도 없고,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도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 이 도라는 것을 알고 행동하게 되면 세상을 잘 살 수 있는 능력 인 덕을 가질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도(道)’와 ‘덕(德)’의 상호 관계를 잘 알아야 한다. 눈에 보이는 현상이 전부가 아니고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이 현상을 움직이는 실질적인 것을 잘 보고 알아야 한다는 것이 다. 노자의 사상은 실제로 눈에 보이는 현상 사물이라는 것이 전부나 진짜가 아니라는 것이다.

노자는 현상 사물처럼 겉으로 드러난 것은 허상일 뿐이고, 그 뒤에 진실이 숨어 있다는 생각이 다. 이 부분은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알기가 어렵다. 여기서 그 뒤에 숨어있는 진실이라는 것은 힘이나 권력을 의미한다. 진실은 이렇게 실질적으로 현실을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 자는 눈으로 보이는 현상만 보지 말고, 그 이면에 실제로 작용하는 진실이라는 참 모습을 보라고 강조한다.

노자는 47장에서 다시 한 번 말한다. “대문을 나서지 않고도 온 세상을 알 수 있다!” (不出戶, 知天下) 세상은 실제로 눈에 보이기 때문에 그것은 깊이가 없고, 한계가 있는 극히 피상적인 것 이다. 통찰을 하는 사람들은 방안에 가만히 앉아서도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움직이는지의 흐름 이나 요점을 알 수 있다. 노자가 볼 때, 눈으로 보이는 현상만이 이세상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 이다. 그 눈으로 보이는 현상의 뒤에 본체인 道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道는 無名, 樸, 모 순의 공존을 포함하고 있다. 이런 노자의 사상은 본질주의라고 볼 수도 있다.

Dalam dokumen 노자의 정치 사상과 제왕학 (Halaman 99-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