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idak ada hasil yang ditemukan

황로학과 무위의 통치술

Dalam dokumen 노자의 정치 사상과 제왕학 (Halaman 184-187)

전국 시대를 거쳐서 진시황의 통일까지 ‘천하’라는 생각이 완성된다. 그 닫힌 공간 안을 하나의 왕이 통일해야 한다. 하나의 왕국만 있어야 한다. 이는 천명(天命) 이론으로 더 확고해진다. 통일 된 하나의 왕국을 이루기 위해서는 끝없는 리그전, 하나만 남을 때까지 상대를 죽이는 전쟁을 해 야 한다. 과연 이럴 필요가 있는가?

노자는 이렇게 힘으로 우격다짐으로 하는 것을 반대한다. 노자는 천하관을 반대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힘으로 천하 안을 통일하는 것은 반대했다. 이것은 묵자도 같다. 묵자 역시 비공(非攻) 이

론으로 공격 전쟁을 반대한다.

통일 진나라가 망하고, 항우와 유방의 치열한 전쟁 뒤에 한나라가 수립된다. 한나라 초기에 유 행한 것이 황로학이다. 황로학은 노자 사상의 변용이다.

1) 힘으로 하는 것에 반대함.

정치와 전쟁은 이겨야 한다. 진영 싸움은 이겨야 한다. 그래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중국이 천하관을 완성하면서, 천하 안의 정치적 주체, 국가들이 공존하는 것보다는 적대시해서 전쟁하는 쪽으로 나간다. 평화적 공존은 아니더라도, 적대적 공존을 할 수는 있다.

중세 일본이 그렇다. 수많은 제후국, 다이묘(大名)이 서로 전쟁을 하면서 살았다. 그러나 전쟁 을 해도 상대국을 멸망시키지 않는다. 멸망을 시키면, 전국이 통일될 것이다. 통일되면 사무라이 들이 설 자리가 없다. 사무라이는 전쟁이 있어야 존재한다. 전쟁이 있으려면 여러 나라가 있어야 한다. 통일은 사무라이의 무덤이다. 중국이나 일본은 전쟁에 중독된 나라이다.

천하관과 단일 중국 이념 때문에, 중국은 적대적 공존도 부정하고, 전쟁으로 상대를 멸망시키 는 길로 간다. 생사존망을 건 싸움이므로 너무 심하게 나간다. 이는 지금이나 예나 싸움은 똑같 았다. 잔인, 살벌, 끔찍했다. 노자의 시대도 그러했다.

2) 노자가 싫어한 것 중에 하나가 “강함을 떨치는 자는 그 (올바른) 죽음을 얻지 못한다”(强梁 者 不得其死) 이다. 이렇게 한 사람들이 있었다. 다음과 같은 사람들이다.

⑴ 지백(知伯, 智謠)은 춘추 말기의 진(晉)의 가장 강한 가문이었다. 지백이 한 위 조를 협박하 여 땅을 뺏고, 거절했던 조나라를 공격해서 거의 멸망 지경까지 빠뜨렸다. 이에 한 위 조가 지백 을 공격해서 멸망시킨다. 원한에 사무친 조양자는 지백을 죽이고, 지백의 해골로 술잔을 만든다.

그리고 지씨를 멸문지화시킨다. 지씨 일족은 단 한 명도 남김없이 다 죽였다. 진시황도 6국을 멸 망시키고, 그 왕실을 다 죽였다. 다시는 회복하지 못 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것을 그대로 진나 라 왕실이 당한다. 진나라가 망할 때, 완전히 다 죽여 버린다.

⑵ 이사(李斯)는 진나라의 재상이었다.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진 시황이 죽고 난 뒤에 환관 조고가 권력을 잡고 이사를 투옥한다. 온갖 고문을 다한 뒤에 요참(腰 斬)으로 죽인다. 이사는 진시황이 6국 공격하는 것을 제안하고 주관한다. 한비자 의 「초견진」

편은 실제로는 이사가 쓴 것으로, 여기에 6국을 통일 시킬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조고는 당시에 알려진 모든 고문과 가장 잔인한 사형 방법을 썼다. 그런 조고도 얼마 안 있어 서 살해당하고 일족이 다 죽는다. 이사나 조고나 뿌린대로 거둔 것이다. 제 명에 못 죽었다. 서 로 협력하면서 살아도 된다. 그러나 상대를 잔인하게 죽인다. 세상 사는 방법이 공존이 아니라 상대를 죽이는 것 하나 뿐이었다. 이를 진시황에게서 배운 것이다.

⑶ 진시황은 천하를 통일한 후 순수(巡狩)를 해서 나라를 돌아보다가, 수은 중독으로 고통 속 에 죽었다. 진시황이 죽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진나라가 망한다. 무덤과 궁궐은 불타고, 진 황 실이 멸문지화를 당한다. 진시황이 다른 나라에 했던 것과 똑같이 망하게 된다.

중국은 역사에서 보고 배운 것이 없다. 실패한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반성 보완을 하 지 않는다.

2) 노자는 힘으로 하는 것을 반대하고, 유약(柔弱)을 제시한다. 부드러움과 약함으로 처세를 하

고 통치를 해야 한다. 천하관에서 나온 천하 통일, 그리고 전쟁, 잔인함의 경쟁 – 이런 것을 반 대한다. 노자는 부드러운 정치, 무위 자연의 통치를 주장한다.

진시황의 통일 전쟁, 그리고 진나라가 망한 뒤에 항우 유방의 전쟁 등을 겪으면서, 힘과 무력 으로 하는 것에 대한 반감과 염증이 늘어났다. 그래서 한나라 초기에는 황로학이 유행한다. 하로 학은 자유 방임의 통치와 무위의 다스림을 주장한다. 국가가 백성의 삶에 개입하지 않거나, 최소 한의 개입만 한다.

黃老學은 ‘黃帝와 老子’를 뜻한다. ‘黃帝’는 “노란 임금”이다. 황달 걸렸다는 말은 아니다. 오 행 사상에서 중앙은 노란 색이다. ‘帝’는 신격화된 임금이다. 역사 이전의 신화 시대의 임금이다.

역사 시대의 통치 이론이 없었으므로 황제는 전혀 통치에 개입하지 않는다. 무위(無爲)의 통치를 했다. 통치하지 않는 것이 통치이다.

黃老는 노자의 사상을 황제(黃帝)의 통치에 넣은 것이다. 노자 사상을 통치 이론으로 바꾼 것 이다. 무위의 방임 정치인데, 이를 최초에 선택한 사람은 한고조 유방이다. 약법 3장을 발표한다.

진나라의 복잡하고 잔인한 법들을 다 폐지했다. 이후에 한나라 황제들은 황로학에 따른 방임의 정치를 선택한다. 한 문제(文帝)가 노장 사상을 국가 통치 이념으로 삼았고, 그의 부인 두태후에 의해 한 무제(武帝) 초기까지 통치 이념으로 이어진다. 무제가 황로학의 통치 이론을 버리고, 유 가를 국가 이념으로 삼았다. 그리고 동서남북을 다 쳐들어간다. 동쪽으로 조선을 정벌해서 한4군 을 설치했다.

왜 한나라 초기에 황로학의 자유 방임, 무위의 통치를 선택하는가? ⑴ 진시황의 철저한 법가 통치, 국가 개입 때문에 진나라가 망했다. 이런 반성이 있었다. 5가 작통법 등 진나라의 법 → 유방이 약법 3장으로 바꾼다. ⑵ 진시황이 죽고 난 뒤에 한나라가 건국되던 약 6년 정도의 기간 은 천하가 전쟁터였다. 인구의 약 50-60% 죽었다. 대부분의 시설이 다 파괴되고, 폐허 위에서 정상적인 국가가 작동하기 어려웠다. ⑶ 한 문제는 황로학에 따라 자유 방임으로 국력을 회복시 켰다. 그래서 진나라 통일 때 이상으로 회복하게 된다. ⑷ 무제(武帝)는 이 강한 국력으로 동서남 북을 다 공격했다. 무제는 10대에 즉위를 했다. 할머니 두태후의 황로학을 증오했다. 친정을 하 자마자 유교를 국가 이념으로 선포하고, 사방을 공격했다. 무제의 롤 모델은 진시황이었다. 무제 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전한이 망한다. 항우 여후(呂后) 무제 등 진시황을 모델로 삼은 자들은 대략 비참하게 망한다. 진시황의 망령은 아직도 중국을 지배하고 있다. 시진핑을 보라.

3) 이런 황로학은 노자의 통치술과는 별 상관이 없다. 소국과민도 이런 방임과는 다르다.

노자 사상은 군주의 처세술, 즉 군주가 변화는 상황을 관리하는 방법을 주로 제시한다. 힘과 폭력이 아니라, 도라는 객관 필연성에 따라 상황을 처리한다. 이것은 부드러움과 약함이다. 노자 는 자유 방임을 주장하지는 않는다. ‘무위 자연’은 방임이 아니라, 도에 맡김을 뜻한다. 도에 따 르면 내가 특별히 행위하지 않더라도 저절로 그렇게 된다.

소국과민은 역사 초창기의 마을 국가이다. 마을 안에서 살면서, 자급자족하고, 그것에 만족한 다. 문명을 발전시키지 않고, 욕심도 늘리지 않는다. 그냥 자연 속에서 사는 짐승들처럼 사는 것 이다. 한나라 초기의 상태는 철저한 폐허였다. 그래서 폐허를 복구하여서, 문명 사회로 돌아가는 것이 시급했다. 폐허는 소국과민과는 다른 상태이다.

따지고 보면, 진시황이 중국 전체, 천하를 단일 왕국으로 만들었다. 이 단일 왕국의 성격은 놀

랍게도 소국과민과 비슷하다. 외부와 단절되고, 내부에서 자급자족한다. 내부의 것에 만족해야 한 다. 소국과민의 백성은 우민(愚民)이어야 한다. 주어진 조건에 만족하면서, 자신이 살고 있는 마 을이 천국이라고 생각한다. 따지면 따질수록 소국과민과 비슷하다. - 이런 것을 진시황이 원했 다. 그런데 진시황이 죽자마자 호걸들이 천하에서 봉기해서, 진나라를 멸망시킨다. 진시황의 천하 의 소국과민화는 철저하게 실패한다.

4) ‘황로학’이라는 말은 주로 사마천의 사기 에 한나라 초기 상황을 설명하면서 나온다. 구체 적으로 이 황로학이 무엇인지는 설명하지 않는다. 후대에 황로학의 정체에 대해서 많은 논란이 있었다. 마왕퇴에서 나온 문헌 가운데 4가지가 황로학의 저술이라는 주장이 있다. 이에 따르면 황로학은 무위자연의 통치를 주장한 것이 아니게 된다. 한나라 초기에 지어진 회남자 가 황로학 의 문헌이라는 주장도 있다. 회남자 는 노자와 장자의 주석서에 가깝다. 특별히 무위와 방임의 정치를 주장하지는 않는다. 전반적으로 황로학은 사마천이 말하듯이 한나라 초기의 방임 정치를 뒷받침한 사상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최선이다.

6.2, 도의 정치와 무위의 정치

노자의 정치 사상의 핵심은 도에 따라 무위의 통치를 하는 것이다. 무위는 단순한 자유 방임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런 점에서 황로학의 방임과는 다르다. 무위의 정치는 방임도 포함하지만, 방 임이 전부는 아니다. 노자는 국가나 군주를 구조가 아니라 상황의 변화로 파악한다. 상황을 관리 하는 방법이 도에 따름, 혹은 무위를 하는 것이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방임이다.

노자는 힘으로 하는 정치를 증오한다. 그래서 무위의 정치로 나간다. 강량(强粱)은 강함을 떨치 는 것으로, 남성적인 것이며 유위(有爲)이다. 반면 유약(柔弱)은 부드럽고 약함으로 여성적인 것 이며 무위(無爲)이다. 노자는 무위의 정치, 유약(柔弱)의 통치를 주장한다. 그것은 자유 방임처럼 보일 수 있다.

Dalam dokumen 노자의 정치 사상과 제왕학 (Halaman 184-1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