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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에 따르는 무위의 정치

Dalam dokumen 노자의 정치 사상과 제왕학 (Halaman 187-191)

랍게도 소국과민과 비슷하다. 외부와 단절되고, 내부에서 자급자족한다. 내부의 것에 만족해야 한 다. 소국과민의 백성은 우민(愚民)이어야 한다. 주어진 조건에 만족하면서, 자신이 살고 있는 마 을이 천국이라고 생각한다. 따지면 따질수록 소국과민과 비슷하다. - 이런 것을 진시황이 원했 다. 그런데 진시황이 죽자마자 호걸들이 천하에서 봉기해서, 진나라를 멸망시킨다. 진시황의 천하 의 소국과민화는 철저하게 실패한다.

4) ‘황로학’이라는 말은 주로 사마천의 사기 에 한나라 초기 상황을 설명하면서 나온다. 구체 적으로 이 황로학이 무엇인지는 설명하지 않는다. 후대에 황로학의 정체에 대해서 많은 논란이 있었다. 마왕퇴에서 나온 문헌 가운데 4가지가 황로학의 저술이라는 주장이 있다. 이에 따르면 황로학은 무위자연의 통치를 주장한 것이 아니게 된다. 한나라 초기에 지어진 회남자 가 황로학 의 문헌이라는 주장도 있다. 회남자 는 노자와 장자의 주석서에 가깝다. 특별히 무위와 방임의 정치를 주장하지는 않는다. 전반적으로 황로학은 사마천이 말하듯이 한나라 초기의 방임 정치를 뒷받침한 사상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최선이다.

6.2, 도의 정치와 무위의 정치

노자의 정치 사상의 핵심은 도에 따라 무위의 통치를 하는 것이다. 무위는 단순한 자유 방임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런 점에서 황로학의 방임과는 다르다. 무위의 정치는 방임도 포함하지만, 방 임이 전부는 아니다. 노자는 국가나 군주를 구조가 아니라 상황의 변화로 파악한다. 상황을 관리 하는 방법이 도에 따름, 혹은 무위를 하는 것이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방임이다.

노자는 힘으로 하는 정치를 증오한다. 그래서 무위의 정치로 나간다. 강량(强粱)은 강함을 떨치 는 것으로, 남성적인 것이며 유위(有爲)이다. 반면 유약(柔弱)은 부드럽고 약함으로 여성적인 것 이며 무위(無爲)이다. 노자는 무위의 정치, 유약(柔弱)의 통치를 주장한다. 그것은 자유 방임처럼 보일 수 있다.

자기 갈 길로 간다. 나에게 불리한 길로 가는 도를 인식하고 따르는 이유는 뭐냐?

답 – 마음이 편하기 위해서이다. 어차피 그런 길로 간다는 것을 알면, 마음이 좀 더 편해진다.

더 아플 수도 있지만, 일고 맞는 매가 덜 아프다. - 이것이 장자의 현실 달관의 철학이다. 내가 불구자가 되거나, 죽거나 하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노자는 도를 이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도는 ‘객관적 추세’이다. 내가 그 추세에 관여할 수 있다. 내가 돌을 하나 괴어 놓으면, 추세가 살짝 바뀔 수도 있다. 따라서 도는 객관 필연성이 아 니고, 객관적 추세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과학의 법칙처럼 도를 법칙화시킬 수 없다. 법칙화시 킬 수 없는 추세이다.

그렇기 때문에, 노자는 도를 인식하고 따르라고 말한다. 인식하면, 도를 나에게 유리하게 이끌 수 있다. 왜냐하면 도는 필연적 추세이고, 거기에 내가 관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래서 노자가 처세술로 나갈 수 있다. 그릇을 만들 때 숙련된 장인의 손놀림은 그릇 빗는 도를 따른다. 따르기 때문에 덕이 있다. 마찬가지로 세상일에도 도가 있다. 이 도에 대해서 노자가 말하는 것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대립자의 공존’이다. 이것을 인식하고, 따르면 덕이 생긴다.

바로 그런 방식으로 내가 도에 관여하는 것이다. 노자의 도 개념이 한비자에게서는 리 개념으 로 변하게 된다. 도는 객관 필연성이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여지가 적다. 반면 리는 내 안 에 있는 이치 원리이다. 따라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많다.

군주가 통치를 함에, 따라야 할 객관 필연성(도의 측면)도 있고, 또 자신의 권력과 능력으로 어 떻게 할 수 있는 것(리의 측면)도 있다.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함에 따라 전자는 줄어들고, 후자는 급격히 늘어난다. 외부에 적이 있을 때, 객관 필연성은 중요하다. 천하를 다 가지면, 천하가 내부 의 일이 된다. 따라서 리의 중요성이 커진다.

⑶ 노자는 도 개념에 있어서, 한비자의 철저한 필연성 개념으로도 가지 않고, 한비자의 리 개 념, 즉 주관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추세 개념으로도 가지 않는다. 양자의 절충이지만, 필연성 개념에 더 가깝다.

운명은 ⓵ 따르는 자는 데려가고, ⓶ 반항하는 자는 끌고 간다. - 가는 것은 똑같은데, 그 방 법은 각자가 선택해야 한다. 도(道)는 운명과 다르다. 도는 ⓵ 도를 따르는 자는 ‘길’로 가게 한 다. 성공한다. ⓶ 도를 따르지 않는 자는 그냥 둔다. 길이 아닌 곳을 헤매다가 실패한다. 도는 운 명처럼 강제력이 없다.

따라서 도를 인식하고 순종해야 한다. 도를 알지 못 하는 이유는 주관적인 욕망 감정이다. 개 인의 욕심 때문에 무리하고, 억지로 하는 것은 잔인하고 살벌한 폭력으로 가기 쉽다. 세상은 자 기 욕심대로 되는 경우가 없기 때문이다. 욕망과 감정은 폭력으로 갈 가능성이 크다.

분노의 감정을 죽이고, 절실한 욕망을 줄이고, 도(道)를 인식하고 도를 따르라. 이는 순리에 따 르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일이 잘 이루어지고, 폭력이나 살벌함도 없다.

그래서 도(道)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이다. 無爲는 ‘함이 없음’, 힘들이지 않음이고, 自然은 ‘저절 로 그러함’이다. 노자는 힘과 폭력, 우격다짐으로 하는 것을 증오한다. 언제나 길(道, 객관적 추 세)에 따라 부드럽고 우아하고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을 강조한다. 여성적 철학이다.

⑷ 노자는 道를 따르는 것을 無爲라고 말한다. 無爲는 나의 주관으로 행동하지 않는 것이다.

주관으로 행동하는 것은 道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래서 노자는 주관을 버리고 객관을 따르라고 강조해 말한다. 이런 노자의 객관적 사고는 경험론과 비슷하다.

도에 따른 무위(無爲)의 정치는 무통치의 통치, 통치하지 않는 통치이다. 소국과민(小國寡民)의 상태가 그렇다. 한나라 초기가 무통치에 가깝다. 항우와 유방의 천하 전쟁에서 너무 많이 죽고, 너무 많이 파괴되었다. 그래서 유방은 나라를 통일한 뒤, 약법 3장이라는 가벼운 법으로 백성들 을 그냥 방임한다.

무통치는 무사안일과 같다. 게으르게 빈둥거리며 살기이다. 인간은 게으를 때가 가장 행복하다.

그래서 “내일 할 수 있는 일은 오늘 하지 말자!”

2) 도에 의한 정치 – 무통치의 통치

⑴ 허심(虛心) - 도를 인식하기

‘無爲’는 ‘함이 없다’는 뜻이다. ‘自然’은 ‘스스로 그러함’이다. 어떤 것이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다. 노자는 ‘無爲 自然’의 통치를 이상적인 것으로 여겼다. 이것이 통치론의 핵심이다.

‘도(道)’는 ‘길’이다. 사람이 따라가야 하는 필연적 추세이고, 객관적 필연성이다. 이 필연성이

‘스스로 그러함’(自然)이다. ‘저절로 그러함’이 바로 필연적 추세이다. 이 추세를 따르면, 일이 잘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주관을 버리고 객관을 따라야 한다.

이 객관적 필연적 추세와 나란히 주관적 욕망이 있다. 내가 간절히 바란다고 그것이 그대로 이 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점이 필연적 추세와 반대이다. 객관적 추세는 저절로 그렇게 된다. 주 관적 욕망은 노력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나아가 세상은 나의 욕망에 의해서 그 객관 필연성이 바뀌지는 않는다.

그래서 노자는 ‘마음 비우기’(虛心)를 하라고 한다. 허심(虛心)을 하는 이유는 도(道 길), 즉 객 관적 필연적 추세를 따르기 위해서이다. 주관을 버려야 객관을 따를 수 있다. 객관을 따름은 도 (道)는 따르는 것이고, 무위(無爲)의 통치가 가능해진다.

마음은 대략 “지각 인식 → 욕망 → 감정 → 행위”의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욕망 과 감정이다. 특히 감정이 중요하다. 행위는 욕망과 감정의 산물이다. 맹자나 노자나 전국 시대 에는 ‘감정=행위’로 본다. 따라서 행위를 들지 않고, 그냥 감정만 말한다. 『중용』의 첫머리에 나 온다. “희노애락(喜怒哀樂)이 발하지 않음을 中이라 한다. 발(發)해서 마디(節)에 맞음을 和라고 한다. 中은 천지의 大本(큰 근본)이고, 화(和)는 천하의 달도(達道, 보편적인 길)이다.” 여기에서 희노애락은 단지 감정이 아니라, 행위를 말한다. 따라서 큰 근본, 보편적 길이 된다.

* 욕망과 감정은 이성의 적이다. 감성과 이성은 대립자이다. 공존할 수 없다. 감성은 죽이고, 이성을 키우라. 대부분의 철학은 그렇게 말한다. 대표적으로 소크라테스, 플라톤, 스토아 철학, 노자, 한비자, 맹자, 주희 등 철학의 주류들이다. 노자의 허심(虛心)도 감성을 비우고, 이성을 차 리는 것이다. 정신을 팔고 있으면, 바로 눈앞의 것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⑵ 본체와 현상

노자는 세상을 ‘도(道)와 현상’으로 구분 짓는다. 1장이 대표적이다. 여기에서 도(道)를 무명(無

名)과 무욕(無欲)으로, 현상 세계를 유명(有名)과 유욕(有欲)으로 규정한다. 이 둘은 서로 대립의 관계이다.

본체 ; 無名 - 無欲 - 본체 - 道 - 객관 필연성 - 무위 자연 – 부드러움, 약함.

현상 ; 有名 - 有欲 - 현상 – 감정 욕망 – 주관적 의지 – 싸움, 힘, 잔인.

道는 이름이 없다(無名). 즉 규정됨이 없다. 규정됨이 없는 것에는 욕망을 품을 수 없다. 따라 서 욕망이 없다(無欲). 규정됨도 욕망도 없는 것으로, 객관적 필연성(道)이다. 이 필연적 추세를 따르면, 저절로 그러하게 된다(自然). 억지로 무엇을 하지 않아도 그렇게 되는 무위(無爲)이다. 이 렇게 도(道), 무위(無爲), 자연(自然)은 서로 연결된다.

반면 현상 세계는 사물로 채워져 있다. 이름이 있고, 욕망이 있다. 有名이고 有欲이다. 감정과 욕망의 세계이다. 주관적 의지가 작동한다.

노자는 이 둘을 대립시키면서, 현상을 넘어서 본체를 인식하라고 한다. 현상 뒤에 있는 본체, 도를 보라고 한다. 객관적 필연적 추세인 도를 인식하고 그것을 따르라. 그래야 성공한다.

* 노자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간다. 단지 도를 인식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 한 걸음 더 나가서, 네가 바로 도(道)가 되어라. 사람들은 현상이 될 것이다. 노자는 임금과 신하 백성의 관계를 이런 식으로 도(본체)와 현상으로 보는 단초를 연다. 한비자가 이것을 이어서, 군주는 본 체, 신하는 현상이라 한다. 군주는 무위(無爲)하고 신하는 유위(有爲)해야 한다. 군주는 무명(無名 규정되지 않음)이고, 신하는 유명(有名 규정됨)이다. 군주는 이름표가 없고, 신하는 있다.

군주는 마음을 비우고 무념(無念) 무사(無事)해야 한다. 반면 실무를 뛰는 신하들은 유념(有念) 유사(有事)해야 한다. 군주의 명령을 부지런히 실행해야 한다.

결국 군주가 국가이고, 국가는 군주이다. 군주는 본체이고, 신하와 백성은 현상이다. 본체가 현 상으로 드러난다. 도(道 객관 필연적 추세)가 현실에 드러나서, 현실을 제압한다. 도는 현상 뒤에 있으면서,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현상을 만들고 조종한다.

⑶ 한비자는 노자의 사상을 통치론과 제왕학으로 받아들인다. 한비자가 노자에게 배운 것은 이 렇다. 도(道)는 無爲 自然이며, 객관 필연성이다. 그것을 장악하라. 그렇게 하면 현실의 문제를 힘들이지 않고 해결할 수 있다. 노자의 ‘無爲而無不爲’(함이 없어도, 하지 않음이 없음)이 그 핵 심이다. 이 말은 ‘無爲 自然’과 같다. “함이 없어도, 저절로 그러하다.” 이렇기 때문에 군주는 무 위(無爲)로 통치할 수 있다. 無爲(함이 없음)이어도 無不爲(하지 않음이 없음)이고, 自然(스스로 그러함)이다.

군주가 객관 필연성(道)을 알고 따라야 한다. 힘, 권력, 무력이 객관 필연성을 보장한다. 한비 자는 도(道)라는 자리에 ‘권력, 무력’을 넣는다. 군주가 국가의 최고 권력, 즉 군주권을 쥐면, 신 하와 백성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다. 국가를 손바닥에 놓고 조작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군주는 본체이고, 신하와 백성은 현상이 된다. 도라는 객관 필연성이 현상을 이름 짓고 규정하고 부리게 된다.

Dalam dokumen 노자의 정치 사상과 제왕학 (Halaman 187-1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