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2.0 대한민국 이용자는 아래의 조건을 따르는 경우에 한하여 자유롭게
l 이 저작물을 복제, 배포, 전송, 전시, 공연 및 방송할 수 있습니다. 다음과 같은 조건을 따라야 합니다:
l 귀하는, 이 저작물의 재이용이나 배포의 경우, 이 저작물에 적용된 이용허락조건 을 명확하게 나타내어야 합니다.
l 저작권자로부터 별도의 허가를 받으면 이러한 조건들은 적용되지 않습니다.
저작권법에 따른 이용자의 권리는 위의 내용에 의하여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이것은 이용허락규약(Legal Code)을 이해하기 쉽게 요약한 것입니다.
Disclaimer
저작자표시. 귀하는 원저작자를 표시하여야 합니다.
비영리. 귀하는 이 저작물을 영리 목적으로 이용할 수 없습니다.
변경금지. 귀하는 이 저작물을 개작, 변형 또는 가공할 수 없습니다.
미술박사학위논문
삶의 순간에 나타난 영원성의 조형적 표현 연구
- 배남경 작품을 중심으로-
2 0 1 5 년 2 월
서울대학교 대학원
미술학과 서양화 , 판화 전공
배 남 경
국문 초록
나의 작업은 삶의 단면을 포착하여 영원성을 내포한 순간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삶은 육체적으로 유한에 처한 인간이, 정신적으로는 영원을 추구하는 모순된 상황이다. 삶의 유한성은 죽음에 기인하는데, 그것은 삶의 매 순 간에 닥친 문제로서, 인간의 존재적 불안, 그리고 영별의 불안을 야기한 다. 인간은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 영원성 역시 매 순간 요청하는데, 이 것이 영원에의 지향이며, 삶의 본질적인 의미다. 즉 ‘삶의 순간에 나타난 영원성’이란, 유한한 시간 속에서 영원을 향하여 나아가다 문득, 영원한 가치를 조우했다고 여기는 순간 나타난 영원의 가능성이다.
그 순간이 바로 내가 작업을 통해 구현하려는 영원한 순간이다. 나는 작품이라는 사물로써 정신적인 영원의 가치를 담아내려 하는데, 이것을 그림이 살아나는 것, 영원성을 얻는 것이라고 본다. 즉 작업의 의미는 유한성을 극복하고 영원성으로 나아가는 삶의 본질적 의미와 다르지 않 다.
‘삶의 순간에 나타난 영원성’을 시각화하는 조형적 표현은 ‘어둠 속의 빛’이다. 나는 명암을 단계적으로 만들어 나가는데, 이것은 시간을 축적 하는 것이기도 하고, 환영적인 공간을 구축하는 것이기도 하며, 무엇보 다 그림이 살아나는 과정이 된다. 즉, 나는 화면 속에 어둠을 쌓아가면 서 동시에 빛을 표현하는데, 어둠과 빛은 절대적 존재의 양면의 모습을 은유한다. 어둠은 삶의 근원적이고 무한한 바탕의 모습이라면, 빛은 절 대적인 존재, 또는 존재가 자신을 드러내는 계시를 상징한다. 인간의 입 장에서 본다면, 어둠은 실존의 불안이 되고, 빛은 흔들리는 불안 위에 떠있는 믿음의 상징이다. 즉, ‘어둠 속의 빛’은 ‘근원적 존재의 계시’이자, 그것을 직관하고자 하는 인간의 ‘불안한 믿음’을 표현하는 것이다.
내 작업의 조형 매체는 목판화이다. 그런데 나의 작업은 사진 이미지를
소재로 하고, 회화적인 제판 과정을 가지고 있어서, 사진과 회화의 특성 이 판화 작품에 반영된다.
첫째, 나는 일상의 순간을 담은 사진 이미지를 작품에 사용함으로써, 일상적 사진을 찍는 보편적인 심정을 작품에 담는다. 그것은 시간의 흐 름 속에, 변화하고 소멸해버릴 대상을 붙들고자하는 애착이며, 또 그러 한 노력이 어쩌면 영원을 획득할지 모른다는, 막연하지만 진지한 기대이 다.
둘째, 판 위에서의 드로잉, 판각, 바니시제판은 내 작업의 회화적 과정 이다. 이때, 무의미했던 사실의 기록은 특별한 기억으로 전환된다. 이것 은 무덤덤한 현실을 절실한 관념의 세계로 바꾸는 회화적인 각색이라 할 수 있다.
셋째, 최종 매체인 목판화에서 가장 중요한 특성은 각인(刻印)이라는 몰두의 과정과, 초월적인 우연성이다. 몰두는 판화의 치열한 작업 과정 을 말하는데, 그 자체가 곧 영원에의 지향으로서, 영원의 가능성을 선취 한다. 그런데 이 몰두의 비약적 힘이 끝내 초월의 빛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벗어나는 최후의 계기가 요구되는데, 인쇄가 바로 그것이 다. 인쇄의 순간 나의 조작은 잠시 차단되어지고, 이때, 자연적이면서 우 연적인 효과들이 작품에 나타나서, 결국 자신을 초월하는 표현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작업의 기법적 특징은 기존의 다양한 미술 전통을 응용하여, 새롭게 적 용해 나가는 것이다. 이 목판 기법은 기존의 일률적이고 고정된 프로세 스를 탈피한다. 그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작품의 몸이 되는 재료는, 한국화 재료(한지, 먹, 한국화물감)를 도입하였는데, 이것은 작품의 정서 를 형성한다. 둘째, 제판법은 소거법으로서, 하나의 판을 가지고 수차례 제판하면서, 명암의 톤을 단계적으로 형성한다. 이렇게 하여 ‘어둠 속에 빛’이 드러나는 사실적인 환영의 공간을 구축하는 것이다. 셋째, 수십여 회의 거듭 찍기를 함으로써, 깊이감과 밀도가 있는 화면을 만들어낸다.
본 논문은 내 작업의 주제, 조형, 매체, 기법을 살펴보고, 그 본질을 논 하는 것으로서, 그것은 바로 ‘삶의 순간에 나타난 영원성’이다. 즉, 삶의
현실적 단편을 영원의 이상이 담긴 순간으로 표현하는 것이 내 작업의 본질이다.
주요어: 영원성, 삶의 유한성, 영원한 순간, 불안한 믿음, 어둠 속의 빛, 각인(刻印)의 몰두
학 번: 2005-30387
목 차
국문초록 ··· ⅰ 그림 목차 ··· ⅶ 1. 참고그림 ··· ⅶ 2. 그림 ··· ⅹⅲ
Ⅰ. 서론
··· 11. 연구 목적과 과제 ··· 1
2. 논제에 관하여; ‘삶의 순간에 나타난 영원성’의 조형적 표현 ··· 2
3. 연구 내용 ··· 3
4. 연구 방법과 대상 ··· 5
Ⅱ. 삶의 순간에 나타난 영원성
··· 71. 삶의 유한성 ··· 10
1) 예정된 한계 상황 ··· 11
(1) 현존재의 죽음 ··· 12
(2) 영별(永別) ··· 15
2) 일상의 비(非)일상성 ··· 18
(1) 일상의 함정 ··· 20
(2) 자각된 일상 ··· 32
2. 영원에의 지향 ··· 34
1) 불안한 믿음 ··· 35
(1) 믿음의 요청 ··· 38
(2) 불안의 환기 ··· 40
2) 영원한 순간 ··· 42
(1) 시간, 영원, 순간 ··· 46
(2) 지금(只今) ··· 57
Ⅲ. 영원성의 조형적 은유; 어둠 속의 빛
··· 621. 어둠의 의미 ··· 67
1) 근원적 어둠(玄) ··· 68
(1) 시간의 축적 ··· 70
(2) 어둠으로 쌓인 물감의 켜 ··· 72
2) 실존의 그림자(影) ··· 74
(1) 평면적 그늘 ··· 76
(2) 이미지와 겹쳐진 나뭇결 ··· 81
2. 빛의 의미 ··· 85
1) 존재로부터의 계시 ··· 88
(1) 광원(光源); 존재의 상징 ··· 94
(2) 빛(明) 속의 빛깔(色) ··· 99
2) 그림의 살아남 ··· 103
Ⅳ. 사진과 회화의 특성을 도입한 판화
··· 1121. 사진으로 포착한 삶의 단면 ··· 116
1) 시간의 파편 ··· 118
2) 촬영자의 관심 ··· 127
2. 회화적 각색 ··· 138
1) 기록에서 기억으로 ··· 142
2) 이미지의 점층적 구축 ··· 151
3. 판화: 각인(刻印)을 통한 몰두와 필연적 우연 ··· 157
1) 과정의 합목적성; 몰두(沒頭) ··· 158
2) 우연(偶然)적 현상(現像) ··· 163
Ⅴ. 전통 목판화 기법의 현대적 활용
··· 1661. 전통과 새로움 ··· 169
2. 제판 기법; 소거법 ··· 174
1) 판재 ··· 177
2) 완만한 판각; 판 바림을 포함한 회화적 판각 ··· 182
3) 바니시제판 ··· 192
3. 인쇄 기법; 거듭 찍기 ··· 198
1) 한국화 재료의 도입: 한지, 먹, 한국화물감 ··· 200
2) 스펀지 물감 먹임과 기계(프레스) 인쇄 ··· 211
Ⅵ. 결론
··· 223참고문헌 ··· 228
기타 그림 ··· 237
Abstract ··· 254
그림 목차
1. 참고그림
<참고그림 1> ··· 8 반 고흐, [씨 뿌리는 사람] (The Sower), 1888, 캔버스에 유채,
64.2×80.3cm, 크뢸러 뮐러 미술관, 오텔로
<참고그림 2> ··· 9 반 고흐, [추수하는 사람] (The Reaper), 1889, 캔버스에 유채,
73×92cm, 반고흐미술관
<참고그림 3> ··· 12 프란시스코 고야, [자식을 잡아먹는 크로노스] (Saturn
Devouring One of His Sons), 1820~1823, 143.5×81.4cm, 프라도미술관
<참고그림 4> ··· 16 에드바르 뭉크, [병든 아이], 1885~1886, 캔버스에 유채,
노르웨이국립미술관
<참고그림 5> ··· 23 에드워드 호퍼, [뉴욕의 방] (Room in New York), 1942,
캔버스에 유채, 73.7×91.4cm, 링컨 네브래스카 대학교 셸던 메모리얼 아트 갤러리, F.M. 홀
<참고그림 6> ··· 28 가츠시카 호쿠사이, [가나가와 앞바다의 파도], 1820~1830년경,
우키요에 목판화, 25×37cm
<참고그림 7> ··· 60 폴 고갱,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Where do we come from, What are we,
Where are we going ; D'où venons nous, Que sommes nous, Où allons nous), 1897~1898, 캔버스 위에 유채,
139.1×374.6cm, Museum of Fine Arts, Boston, Tompkins Collection-Arthur Gordon Tompkins Fund
<참고그림 8> ··· 80 케테 콜비츠, [자화상], 1924, 목판화
<참고그림 9> ··· 89 색유리 창, [시에나대성당] (Duomo di Siena), 1229~1380
<참고그림 10> ··· 90 하르먼스 판 레인 렘브란트, [명상 중인 철학자] (Philosophe en
méditation), 1632, 패널에 유채, 28×34cm, 루브르 박물관
<참고그림 11> ··· 91 조르주 피에르 쇠라, [라 그랑드 자뜨 섬의 일요일 오후]
(Sunday Afternoon on the Island of La Grande Jatte), 1884~1886, 캔버스에 유채, 207.5×308cm,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참고그림 12> ··· 92 신윤복(申潤福), [월하정인] (月下情人), 『혜원 전신첩』,
18세기 후기, 지본채색(紙本彩色), 28.2×35.6cm, 간송미술관, 국보 135호, (이미지 출처:doopedia두산백과)
<참고그림 13> ··· 114 [현관-弘]의 작업의 매체 전환 과정. 왼쪽부터 자료 사진, 2차
제판된 목판, 완성된 판화
<참고그림 14> ··· 115 [현관-弘]의 다섯 번의 제판 단계 모음
<참고그림 15> ··· 121 [선생님]의 자료 사진
<참고그림 16> ··· 125 ‘사진 찍는 가족’ 사진들
<참고그림 17> ··· 126 [1973] 부분과 전체 모습. 1994, 캔버스에 아크릴물감,
166×130cm
<참고그림 18> ··· 130 로버트 프랭크, [미국인들]의 수록 사진, 1959
<참고그림 19> ··· 132 제프 월, [여성들을 위한 그림], 1979, 163×229cm, 파리;
조르주 퐁피두센터, 국립현대미술관
<참고그림 20> ··· 134 앙리 카르티에-브레송, [파리의 플라스드외로프], 1932
<참고그림 21> ··· 139 [기차]의 2장의 자료 사진
<참고그림 22> ··· 140 [기차]의 판 위 드로잉과 1~4차 바니시제판
<참고그림 23> ··· 141 조셉 코수스, [세 개의 의자] (One and Three Chairs), 1965,
접는 나무의자, 사진, 사전 정의를 복사한 것
<참고그림 24> ··· 145 사진과 판화 작품. 왼쪽 위부터 [출구], [사원], [테오의
밀롱가-리아와 제이; 색], [소녀], [베란다], [푸른 저녁], [신부; 색], [동생의 결혼식; 먹]
<참고그림 25> ··· 147 오윤, [봄의 소리], 1983, 16.5×16.5cm
<참고그림 26> ··· 150 [새]의 작업 과정. 왼쪽 위부터 자료 사진, 판 위의 1~10차
제판, 마지막은 판화 [새; 먹]
<참고그림 27> ··· 151
[꽃시장] 드로잉 된 판 위에 제판 1차 진행 모습
<참고그림 28> ··· 152 [꽃시장]의 1차, 5차, 7차 제판에서 시행한 드로잉의 변화
<참고그림 29> ··· 153 [꽃시장]의 2~11차 제판.
<참고그림 30> ··· 154 [희원언니]의 제판 과정. 왼쪽 위부터 드로잉과 1차 판각, 2차
판각과 1차 바니시제판, 3차 판각과 2차 바니시제판, 나머지는 3~5차 바니시제판
<참고그림 31> ··· 156 [흰장갑]의 드로잉과 1~5차 제판
<참고그림 32> ··· 169 [걷는 아이들1], [걷는 아이들2]의 연속 배치
<참고그림 33> ··· 170 [걷는 아이들]의 자료 사진
<참고그림 34> ··· 170 전칭(傳稱) 김홍도, 김득신 등의 화원 작, [원행을묘정리의궤;
반차도](園行乙卯整理儀軌; 班次圖), 1798, 판본채색(板本彩色), 각면 24.6×16.7cm, 36면 부분
<참고그림 35> ··· 171 [영조정순후가례도감의궤; 반차도]의 부분. 도장 형식의 목판
인쇄
<참고그림 36> ··· 171 [걷는 아이들] 1과2의 아이들 판, [걷는 아이들2]의 배경 판
<참고그림 37> ··· 175 뒤러, [묵시록]에서 ‘네 기사’ (The Four Horsemen of the
Apocalypse, Suite de l'Apocalypse: Les Quatre cavaliers de l'Apocalypse), 1498 , 루브르박물관
<참고그림 38> ··· 176 뵈히트린 [메멘토모리], 1512년경
<참고그림 39> ··· 178 [사원]의 부분
<참고그림 40> ··· 179 [웃고 있는 어머니]의 부분
<참고그림 41> ··· 181 [밤]의 부분
<참고그림 42> ··· 181 [목도리]의 부분
<참고그림 43> ··· 186 자오옌니안, [아큐정전] (阿Q正傳; The Biography of Ah Q)
삽화 1번, 1978~1980, 중국지에 유성잉크, 19×16.5cm
<참고그림 44> ··· 187 오윤, [칼노래], 1982, 목판화에 채색, 32.2×25.5cm
<참고그림 45> ··· 190 [DECKS]의 부분
<참고그림 46> ··· 190 [강가]의 부분
<참고그림 47> ··· 191 [세상의 모든 지식]의 네 번째 삽화의 부분
<참고그림 48> ··· 191 [웃고 있는 어머니]의 부분2
<참고그림 49> ··· 194 [추석]의 3차 제판에서의 판 부분
<참고그림 50> ··· 197 [밤]의 판 부분. 제판 단계 변화
<참고그림 51> ··· 199 [토요일] 인쇄 30단계
<참고그림 52> ··· 204 [아파트]의 드로잉과 1차, 2차 제판
<참고그림 53> ··· 213 캐롤 서머스, [The Likiang], 1982, 60×60cm
<참고그림 54> ··· 214 롤러 식 목판 프레스, 필로프린트(PHILOPRINT) 제작
<참고그림 55> ··· 216 [운동장] 드로잉과 1차 제판 된 판
<참고그림 56> ··· 216 [운동장] 노랑, 빨강 1차례씩 인쇄된 판화
<참고그림 57> ··· 220 [푸른 저녁] 1차 제판 후, 모노타입으로 부분 색을 입힌 판
<참고그림 58> ··· 238 마틴 문카치, 탕가니카 호수에 뛰어드는 흑인 아이들 사진,
1929~1930년경에 촬영, 《아르제 메티에 그라피크》 (1931)
2. 그림
<그림 1> ··· 25 [토요일] (Saturday), 2009, 목판화(한지에 먹, 한국화물감),
97.5×67.5cm
<그림 2> ··· 29 [꽃시장; 색] (Flower Market; color version), 2007,
목판화(한지에 먹, 한국화물감), 154×116cm
<그림 3> ··· 31 [DECKS], 2004, 목판화(한지에 한국화물감), 77×110cm
<그림 4> ··· 33 [베란다] (Balcony), 2005, 목판화(한지에 한국화물감),
20×25cm
<그림 5> ··· 37 [밤] (Night), 2008~2009, 목판화(한지에 먹, 한국화물감),
110×80cm
<그림 6> ··· 44 [선생님] (Teacher), 2003, 목판화(한지에 한국화물감),
160×112cm
<그림 7> ··· 47 [연경반] (硏經班; Sunday Class), 2008, 목판화(한지에 먹),
118×80cm
<그림 8> ··· 52 [출구] (EXIT), 2004, 목판화(한지에 한국화 물감),
24.5×34.8cm
<그림 9> ··· 63 [마을버스] (Bus), 2008, 목판화(한지에 먹, 한국화물감),
109.3×77.3cm
<그림 10> ··· 71 [사원] (Temple), 2005, 목판화(한지에 한국화물감), 25×20cm
<그림 11> ··· 73 [희원언니] (Ms. Lue), 2004, 목판화(한지에 한국화물감),
162×116cm
<그림 12> ··· 76 [강가] (Riverside), 2005, 목판화(한지에 한국화물감),
55×60.5cm
<그림 13> ··· 79 [소녀] (A Little Girl), 2005, 목판화(한지에 한국화물감),
115.5×159.7cm
<그림 14> ··· 83 [웃고 있는 어머니] (Smiling Mother), 2005, 목판화(한지에
한국화물감), 52×55.5cm
<그림 15> ··· 86 [테오의 밀롱가-리아와 제이; 먹] (Theo's Milonga-Leah and
Jay; black version), 2010, 목판화(한지에 먹), 161×122cm
<그림 16> ··· 96 [학교] (School), 2009, 목판화(한지에 먹, 한국화 물감),
70×50cm
<그림 17> ··· 101 [빛 길; 색] (Green and Red Road; color version), 2014,
목판화(한지에 먹, 한국화물감), 67.7×48cm
<그림 18> ··· 104 [동생의 결혼식; 먹] (Sister's Wedding; black version), 2013,
목판화(한지에 먹), 165×121cm
<그림 19> ··· 107 [신부; 색] (Bride; color version), 2012, 목판화(한지에 먹,
한국화물감), 165×121cm
<그림 20> ··· 119 [진경언니] (Jin Kyung), 2008, 목판화(한지에 먹, 한국화물감),
165×113cm
<그림 21> ··· 122 [목도리] (Muffler), 2006, 목판화(한지에 먹), 60×79cm
<그림 22> ··· 137 [기차] (Train), 2007, 목판화(한지에 먹), 60×80cm
<그림 23> ··· 149 [새; 색] (Bird; color version), 2012, 목판화(한지에 먹, 한국화
물감), 121×79cm
<그림 24> ··· 155 [흰 장갑] (White Glove), 2007, 목판화(한지에 먹), 60×80cm
<그림 25> ··· 161 [산책] (Stroll), 2004, 목판화(한지에 한국화물감),
114.5×79cm
<그림 26> ··· 165 [피아노; 먹] (Piano; black version), 2011, 목판화(한지에 먹),
138×113cm
<그림 27> ··· 172 [걷는 아이들1] (Walking Children 1), 2006, 목판화와
붙이기(한지에 먹, 한국화물감), 119×146.5cm
<그림 28> ··· 173 [걷는 아이들2] (Walking Children 2), 2006, 목판화와
붙이기(한지에 먹, 한국화물감), 119×146.5cm
<그림 29> ··· 180 [베란다Ⅱ; 색] (VerandaⅡ; color version), 2012,
목판화(한지에 먹, 한국화물감), 79×100cm
<그림 30> ··· 183 [교대역] (Subway Station), 1999, 목판화(판화지, 유성잉크),
10×90cm
<그림 31> ··· 184 [판화실] (Printmaking Room), 2000, 목판화(판화지,
유성잉크), 22.5×22.5cm
<그림 32> ··· 189 [비둘기호] (Local Train), 2000, 목판화(한지, 한국화물감),
60×60cm
<그림 33> ··· 193 [겨울 산책] (Stroll in Winter), 2001, 목판평판화(한지에
한국화물감), 60×60cm
<그림 34> ··· 195 [추석] (Chuseok; Korean Autumn Festive day), 2013,
목판화(한지에 먹, 한국화물감) 165×121cm
<그림 35> ··· 203 [탱고구두; 색] (Tango Shoes; color version), 2009,
목판화(한지에 먹, 한국화물감), 119×79cm
<그림 36> ··· 205 [아파트] (Apartment), 2008, 목판화(한지에 먹), 60×80cm
<그림 37> ··· 207 [쌈지가게] (Ssamzie Shop), 2006, 목판화(한지에 먹),
60×79cm
<그림 38> ··· 209 [관객] (Audience), 2014, 목판화(한지에 먹 한국화 물감),
85×65cm
<그림 39> ··· 217 [운동장] (Play Ground), 2009, 목판화(한지에 먹, 한국화물감),
100×70cm
<그림 40> ··· 219 [서울 타워-秀] (Seoul Tower-Soo), 2011, 목판화(한지에
먹), 61×45cm
<그림 41> ··· 221 [푸른 저녁] (Blue Dusk), 2006, 목판화(한지에 먹, 한국화
물감), 79×60.5cm
<그림 42> ··· 239 [꽃시장; 먹] (Flower Market; black version), 2007,
목판화(한지에 먹), 154×116cm
<그림 43> ··· 240 [유람선] (Pleasure Boat), 2002, 목판화(한지에 한국화물감),
74×100.5cm
<그림 44> ··· 241 [피아노; 색] (Piano; color version), 2011, 목판화(한지에 먹,
한국화물감), 138×113cm
<그림 45> ··· 242 [탱고구두; 먹] (Tango Shoes; black version), 2009,
목판화(한지에 먹), 119×79cm
<그림 46> ··· 243 [테오의 밀롱가-리아와 제이; 색] (Theo's Milonga-Leah and
Jay; color version), 2010, 목판화(한지에 먹 한국화물감), 161×122cm
<그림 47> ··· 244 [동생의 결혼식; 색] (Sister's Wedding; color version), 2013,
목판화(한지에 먹, 한국화물감), 165×121cm
<그림 48> ··· 245 [신부; 먹] (Bride; black version), 2012, 목판화(한지에 먹),
165×121cm
<그림 49> ··· 246 [새; 먹] (Bird; black version), 2012, 목판화(한지에 먹),
121×79cm
<그림 50> ··· 247 [빛 길; 먹] (Green and Red Road; black version), 2014,
목판화(한지에 먹), 67.7×48cm
<그림 51> ··· 248 [현관-弘] (Door-Hong), 2011, 목판화(한지에 먹), 61×45cm
<그림 52> ··· 249 [여이], 2000, 목판화(판화지에 한국화물감), 45×45cm
<그림 53> ··· 250 [겨울 산책], 2001, 색드로잉(종이에 콘테와 수채), 39×51cm
<그림 54> ··· 250 [밀이보] (密移步; Mil I Bo), 2004, 목판화(한지에
한국화물감), 79×79cm
<그림 55> ··· 251 [친구 순덕] (My Friend), 2007, 목판화(한지에 먹,
한국화물감), 78×60.5cm
<그림 56> ··· 252 [극장] (Theater), 2002, 목판화(한지에 한국화물감),
72.5×100cm
<그림 57> ··· 253 [세상의 모든 지식] 삽화, 2005, 목판화(한지에 한국화물감),
삽화 1과 2는 각각 32×49.5cm, 삽화 3~15는 각각 23×35cm
Ⅰ. 서론
1. 연구 목적과 과제
본 연구는 나의 미술 작업을 대상으로 작품에서 표현하고 있는 내용과 조형 형식을 분석하여, 작업에서 지향하는 궁극적 목표를 밝히고, 더불 어 구체적인 제작 기법과 그 특징을 논하는데 목적을 둔다.
나는 작품을 통하여 어떤 주제를 강하게 발언하기보다 오히려 작업 과 정에서 무엇이 저절로 나타나는지를 기다리는 편이다. 왜냐하면 작품에 는 작가가 의도적으로 ‘표현하는’ 것뿐 아니라 저절로 ‘표현되는’ 것이 있는데, 나는 이렇게 무의식적으로 표현되어지는 것 속에 더 본질적인 것이 나타난다고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연구의 목적 역시 작업의 조형 적 분석 보다 그 본질을 밝히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구체적으로 말해, 나는 나를 둘러싼 ‘사람, 세상, 삶’에 대해 관찰한 바 를 작품에 표현하지만, 작품에 표출되는 진짜 내용은 삶에 대한 근원적 인 문제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삶의 외양을 묘사하지만 실은 그 저 변에 숨겨진 본질적 문제인 삶의 한계 상황과 이를 극복하려는 영원성의 추구라는 고전적인 문제에 집중하는 것이다.
연구 과제를 크게 두 가지로 보면, 첫째는 ‘삶의 순간에 나타난 영원성’
이라는 작품의 주제이자 작업의 본질에 관해 직접적으로 밝히는 것이고, 두 번째 과제는 실제로 이 문제를 어떻게 조형적으로 표현하는가이다.
2. 논제에 관하여; ‘삶의 순간에 나타난 영원성’의 조형 적 표현
나는 내 작업의 핵심을 ‘삶의 순간에 나타난 영원성’이라고 가정한다.
여기서 나는 ‘영원’이 아니라 ‘영원성’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는데, 영원성 이란 한마디로 영원의 가능성을 말하는 것이다. 영원은 인간의 인식을 넘어서는 근본적이고 절대적 존재(存在), 혹은 이상(理想)의 세계라 할 때, 영원성은 영원에 다가가려는 인간의 지향이 어느 순간 영원하다고 여길만한 가치와 만났다고 확신할 때 느끼는 ‘영원의 가능성’을 말한 다.1)
논문의 제목인 ‘삶의 순간에 나타난 영원성’은 사실 변증법의 삼단계가 들어간 표현이다. ‘삶’이라는 현실과 ‘영원’이라는 이상의 모순이 특별한
‘순간’ 속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주제 부분에서 주로 다룰 문제가 바로 이것이다. 삶의 물리적 현실로서의 유한성, 정신적 가치로서의 영 원성, 그리고 이 두 문제가 부딪치는 혹은 해소되는 순간, 즉 ‘영원한 찰 라’에 관해서다.
그런데 나는 이 영원한 순간을 막연히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작품이라 는 실체로서 구현하려 한다. 그래서 ‘삶의 순간에 나타난 영원성’이라는 문제는 조형적인 표현의 문제, 즉 작품에 나타난 영원성의 문제로 바뀌 게 된다. 영원성이라는 주제는 이미 말했듯이, 미술에서 고전적인 것이 다. 많은 작가들이 자신의 작품에서 영원성이라는 문제를 추구해왔다.
보이는 물질적인 것으로써 보이지 않는 이 정신적 가치를 추구해온 것이 다. 예술은 마치 주술적인 능력이라도 가진 것처럼, 현실 속에 이상을
1) 그런 점에서 영원성은 상당히 주관적 가치판단이고, 검증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이 예술작품을 보고 영원성, 생명, 절대적인 미를 느낀다고 할 때와 같은데, 이러한 판단은 객관적 사실이 될 수는 없지만, 주관적인 진실로서, 실재하는 것은 분명하다. 다만 그 가치의 객관성 확보가 유보적이므로, 영원이 아니라 영원의 가능성이라고 한 것이다.
구현한다는 믿음으로 행해져온 것이다. 그리고 그 믿음은 지금도 사라진 것이 아니다. 내 작업도 바로 이러한 믿음에 근거한다.
즉, 본 연구는 내 작업을 분석하고, 그 본질을 밝히는 것이면서 동시에, 미술의 영원한 꿈과 같은, 영원성의 조형적 표현의 문제를 논하려는 것 이다.
3. 연구 내용
연구 내용은 작업을 내용과 형식적인 면으로 나눠, 전자는 주제와 조형 을 다루고, 후자는 매체와 기법을 다룰 것이다. 특히 조형의 문제는 주 제와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있으므로, 형식보다 내용적인 측면에서 논할 것이다.
본론의 첫 장인 Ⅱ장에서는 작업의 주제, 즉 유한성과 영원성의 모순을 안고 살아가는 삶의 실존적 상황에 관해서 논할 것이다. 첫째, 죽음과 영별을 겪을 수밖에 없는 삶의 한계 상황에 대하여, 그리고 이것에 대한 인간의 소극적인 저항인 일상 속에서의 망각과, 그것에 다시 저항하는 각성에 대하여 논하겠다. 둘째, 유한성에도 불구하고 영원에의 포기할 수 없는 지향으로 인해, 실존 상황은 극도로 불안한 가운데 믿음 또한 유지되고 있다는 것을 밝히고, 작업에서 그 지향의 최종 목적지는 영원 한 가치를 확신하게 되는 ‘영원한 순간’임을 논하려 한다.
Ⅲ장에서는 영원성이라는 주제를 시각화하는 조형적인 문제에 관하여 다룰 것이다. 내 작업의 가장 대표적인 조형 표현은 깊은 어둠 속에서 서서히 나타나는 빛이다. 따라서 어둠과 빛의 의미를 차례로 살펴보면 서, ‘어둠 속의 빛’이 ‘삶의 순간에 나타난 영원성’이라는 주제를 어떻게 은유하는지를 논하겠다.
첫째, 어둠의 요소는 화면 위의 시간과 공간의 문제와 더불어, 삶의 근 원성과, 실존적 불안의 문제와 연관하여 살펴보겠다. 시간에 관련해서는
‘물감의 켜’를, 공간에 관련해서는 ‘나뭇결’에 대해 다룰 것이다. 둘째, 빛 은 짙어지는 어둠과 함께 그 속에서 점차 드러나도록 표현하는데, 이것 은 삶의 불안이 깊을수록 도리어 나타나는 긍정적 희망(믿음)을 표상한 다고 할 수 있다. 나는 빛을 ‘존재로부터 오는 계시’로서, 그리고 빛이 서서히 나타나는 것을 그림이 살아나는 것, 즉, 그림이 생명을 얻는 것 으로 보고, 이것에 대하여 논할 것이다.
Ⅳ장에서는 내 작업의 특성이 목판화에 사진과 회화의 조형성이 결합되 는 데 기인하는 면이 있다고 보고, 각 매체별 활용 과정과 주제와 연관 된 의미, 조형적 효과 등을 사진, 회화, 판화 순으로 논할 것이다.
첫째, 내 작업의 소재는 일상의 장면을 담은 사진 이미지이다. 나는 평 상시 찍어둔 사진 이미지를 보고 판에 드로잉을 하기 때문에, 사진적인 시각이 작품에 고스란히 나타나고, 또한 일상적 기념사진을 찍는 보편적 감성을 반영하게 된다. 나는 이 감성을 흐르는 시간에 대한 안타까움과 순간을 영원히 붙들고자 하는 헛된 기대 같은 것으로서 보고, 삶의 실존 적 문제들과 연관해 논할 것이다.
둘째, 사진으로 포착한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정보의 기록은 본격적인 작업에서, 그림의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상상의 기억으로 바뀐다. 이러한 회화적인 각색은 거짓이 아니라 오히려, 사실 이상의 진실일 수 있다는 관점에서 회화성을 논하려 한다. 회화적인 실제 작업은 드로잉과 제판 과정(판각과 붓으로 하는 바니시제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작품 이 완성되면 사라지는 과정이다. 하지만 이 단계는 결국 작품에 회화성 을 남긴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겠다.
셋째, 내 작품의 최종적 매체는 목판화로서, 목판 작업은 사진의 사실 성과 회화적 관념성의 모순을 극복, 또는 종합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 다. 먼저, 각인(刻印)이라는 치열한 몰두의 과정은 그림의 생명, 혹은 영 원성이라는 근접하기 힘든 결과를 향해 혼신을 쏟아 넣는 실질적 기회가 되며, 이 과정 자체가 결과를 선취할 가능성을 준다는 것을 논하고, 한
편, 결과는 내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판화 매체 고유의 특성, 즉 인 쇄라는 간접적 표현에 의한 우연성에 기대어 저절로 계시된다는 점을 논 할 것이다.
Ⅴ장에서는 내 작업의 실제적인 제작 과정을 다룰 것이다. 여기서 주안 점은 내 판화 기법이 기존의 일정한 판법을 따르는 것이 아니고, 동서양 의 전통적인 판화의 기법과 조형성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새롭게 개발되 었다는 점이다. 먼저, [걷는 아이들]<그림 45> 한 작품을 대상으로 이 러한 점을 집중적으로 살펴본 이후에, 구체적인 제판 기법과 인쇄 기법 을 차례로 논하겠다.
나는 내 제판법의 가장 큰 특징을, 단계적으로 명암과 이미지를 완성하 는 소거법으로 규정하고, 구체적 방법으로서 판각과 새로 개발된 바니시 제판에 관하여 살펴볼 것이다. 인쇄 기법에서는, 회화적인 완성도를 높 이기 위한 수십 번의 ‘거듭 찍기’에 관하여 알아보겠다. 특히, 번지고 스 미는 회화적인 효과를 판화에 수용하기 위해 개발한 평판적 인쇄 기법을 소개하고, 그 다양한 적용을 논할 것이다.
4. 연구 방법과 대상
나는 작업에서 어떤 특별한 조형 형식을 제시하려는 것이 아니다. 나의 관심은 무엇보다 작품의 내용과 작업의 의미에 맞추어져 있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 나는 조형, 매체, 기법의 형식적인 문제를 언급하기 전에, 삶의 순간에 나타난 영원성이 무엇인지를 이론적으로 밝히는 것을 선행 연구로 한다.
나는 영원성이라는 주제를 미술의 보편적인 주제로 보고, 내 작품뿐 아 니라 미술사 속에서 영원성의 주제가 드러난 작품들을 예로 들어서 논할
것이다. 그리고 방법론으로서 종교와 철학적 논의를 도입하되, 다원주의 적인 입장에서 접근할 것이다. 즉 다양한 종교와 철학적 논의를 통해, 영원성의 문제가 어떤 특정한 사조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인류의 보편 적이고 근원적인 문제라는 점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하지만 주로 실존주의적 관점을 취하게 될 것이다. 실존 철학은 형이상 과 형이하의 이원론이 아닌, 삶의 실제적 현장에서의 철학이라는 일원론 적 입장을 취하므로, 현실과 이상에 걸친 ‘삶의 영원성’이라는 주제를 논 하는 데 적합하기 때문이다. 또한 같은 이유로, 행위적이면서도 정신적 인 예술 작업의 문제를 풀어가는 데에도 적당하다.
연구 대상 작품 범위는 지금 나의 작업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1999 년 작품부터 대상으로 하되, 주요 예시 작품은 석사 과정 연구와 중복을 피하여, 2003년 후반의 작품부터 2014년까지의 작품으로 한다.
Ⅱ. 삶의 순간에 나타난 영원성
나는 일상 속에서 삶의 영원성이 드러나는 ‘순간(瞬間)’을 작품으로 표 현한다. 일상의 단면에 숨어있는 실존적인 문제들, 즉 인생의 유한함에 서 오는 불안과 또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영원에의 희망까지 표현하는 것이다.2) 이 장에서는 작업의 내용이 되는 삶의 유한성과 영원성의 모 순상황, 그 모순의 해소의 지점인 ‘영원한 순간’에 관해서 살펴보겠다.
인간의 삶에서 가장 기본적인 문제는 생의 유한성이다. 시간은 시작도 끝도 없이 무한정 흐르지만,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은 유한하다. 인간은 죽음을 전제한 삶을 살고 있고, 그들의 유대는 영별(永別)을 앞두고 있 다. 그러나 인간은 절망해서 주저앉지 않고, 희망을 찾아 삶을 지속해나 간다. 때로는 일상 속에 안주하여 유한성의 운명을 외면하고 그것을 극 복할 필요도 느끼지 않는 듯이 생활하지만, 내재적인 불안이 일상을 흔 들어 깨우기 때문에, 결국 다시 근본적인 자유, 즉 영원한 가치를 향한 다.
인간은 막연하지만 유한성을 넘어서는 가치에 대한 신념을 가지고 있 다. 그 신념이란 유한한 삶을 지탱하는 근원이 영원이라는 믿음이다. 영 원은 볼 수도 증명할 수도 없지만, 영원을 가정하지 않고서는 확고하다 고 여기는 현실도 허무가 되기 때문이다. 허무가 아닌 실존으로 살아가 기 위해서 영원한 가치를 요구한다. 즉 영원을 지향하는 것이다. 마치 나무가 하늘을 향하도록 천성에 새겨져있듯이, 인간은 본성적으로 영원 을 향한다. 또 하늘을 향해 자라나는 것이 나무의 삶이듯이, 영원을 향 해 나아가는 것이 인간의 삶이 된다. 즉, 여기서 영원성이란, 영원 자체 가 갖는 성질이라기보다, 인간이 영원하다고 믿는 가치이자, 인간의 삶
2) 여기서 ‘순간’은 실제 현실 속의 한 단면을 의미하기도 하고, 내가 조형적으로 구현한 작품을 의미하기도 한다.
<참고그림 1> 반 고흐, [씨 뿌리는 사람] (The Sower), 1888, 캔버스에 유채, 64.2×80.3cm
이 영원을 향하는 성질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미완의 영원이지만, 그것 을 향하고 있음으로써 선취되는 영원의 가능성이다.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는 밀레의 [씨 뿌리는 사람]에 감동하여, 자신도 여러 차례 [씨 뿌리는 사람]<참고그림1>을 그렸다.3) 그는 이 작품을 설명하면서, 씨뿌리는 사람이 “영원한 것에 대한 동경”
의 상징이라고 말했다.4)
한편, 그것에 대조적인 작품으로 [추수하는 사람]<참고그림 2>도 여 러 번 그렸는데, 전자가 인생에 대한 은유였다면, 후자는 죽음에 대한 은유였다. 씨를 뿌린 사람만이 추수를 기대할 수 있듯이, 인생을 의미 있게 사는 것과 죽음을 가치 있게 맞이하는 것 을, 마치 한 쌍처럼 그 린 셈이다. 그리고 두 그림에는 모두 강렬한 태양의 후광이 비춰지 고 있는데, 여기서 태 양은 밀(인류)의 근원 이자, 키워내는 힘의 원천이며, '행복한 죽음 '을 거두어가는, 절대자 로서의 영원성을 상징 한다고 할 수 있다.
3) “1885년 네덜란드를 떠난 이후 처음으로 그는 밭을 일구는 농부라는 주제와 그에게 대단히 모범이 되었던 프랑스 출신 농부의 화가 밀레에게 돌아갔다. 견습생 시절 반 고흐는 종종 밀레 의 <씨뿌리는 사람>(1850)을 모사한 작품을 그렸으며, 훗날 밭에서 씨뿌리는 사람들의 모습을 스케치하곤 했다.” 『불멸의 화가 반 고흐; Van Gogh-Voyage into the Mith』, 한국일보사, 서울: 도서출판 에이앤에이, 2007, p.112.
4) “과거의 단편적인 기억은 나를 아직도 나를 황홀하게 하며 영원한 것에 대한 동경을 갖게 한 다네. 씨 뿌리는 사람이나 밀짚단은 그 상징이지.” 고흐가 1988년 6월 18일 베르나르에게 보 낸 편지 중에서 발췌. 빈센트 반 고흐, 『반 고흐, 영혼의 편지』, 신성림(역), 서울: 예담, 1999, p.182.
<참고그림 2> 반 고흐, [추수하는 사람] (The Reaper), 1889, 캔버스에 유채, 73×92cm 수확하느라 뙤약볕에서 온 힘을 다해 일하고 있는 흐릿한 인물에 서 나는 죽음의 이미지를 발견한다. 그건 그가 베어 들이는 밀이 인류인지도 모른다는 의미에서이다. 그러므로 전에 그렸던 「씨 뿌 리는 사람」과는 반대되는 그림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죽 음 속에 슬픔은 없다. 태양이 모든 것을 순수한 황금빛으로 물들이 는 환한 대낮에 발생한 죽음이기 때문이다. ... 자연에 대한 위대한 책처럼 이 그림도 죽음의 이미지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내가 표현 하고 싶었던 것은 ‘이제 막 미소를 지으려는 순간’이다.5)
그는 수확이라는 죽음 의 이미지를 그렸으나, 오히려 ‘이제 막 미소 를 지으려는 순간’을 그리려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렇게 슬픔이 미소로 바뀐 것은, 삶 의 근원으로서의 태양 이 하늘에 떠올라있고, 온 세계를 축복의 빛으 로 감싸고 있기 때문이 라는 것이다. 즉 고흐 는 유한한 인생을 수확 되는 밀에, 그리고 영 원성을 태양에 비유하
여 삶의 모순 상황을 대비하면서, 동시에 이 모순이 해소되는 ‘순간’을 제시한다. 인생의 한계 상황인 죽음의 순간을 오히려 영원과 조우하는
‘영원한 순간’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5) 1889년 9월 5~6일의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보내는 편지 중에서 발췌. 빈센트 반 고흐, 앞의 책, pp.268-271.
인간은 유한성과 무한성의 종합이요, 순간적인 것과 영원한 것의 종합이요, 자유와 필연의 종합이다. 종합이라는 것은 둘 사이의 관 계를 뜻한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인간은 아직 자기가 아니다.6)
키에르케고르(Sören Aabye Kierkegaard 1813~1855)의 이 말은 작가 의 정신을 담은 작품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고흐가 농가의 일상적 풍경 화를 그리면서 자신의 실존적 사색과 희망을 담았고. 그 결과 이 평범한 그림은 삶의 유한성과 영원성이 부딪힌 ‘종합’의 순간을 표현한 작품이 되었다. 그런데 이 종합은 관계를 맺었다는 것이지, 완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작품 속에 영원이 직접 나타났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
‘영원한 순간’을 영원히 지향하는 작품이 되었다는 것이며, 그 사실만으 로 영원성은 선취(先取)되었다는 것이다. 반 고흐의 작품에서 영원이 읽 힌다면, 그것은 그가 영원을 그렸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영원을 지향한 다는 사실의 진실성 때문이다. 즉 영원은커녕 영원을 지향하는 것조차 작품에 표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1. 삶의 유한성
인간은 물리적 시간 속에서 단지 한 토막의 유한한 시간을 살아가는데, 그 시간은 멈추는 법이 없어서, 확고한 어떤 존재도 될 수 없고, 어떤 관계도 가질 수가 없다. 결국 시간이 망각된 일상 속에 안주한 채 살아 가곤 한다. 여기서는 인간 누구에게나 예정되어있는 죽음이라는 한계 상 황과, 이러한 죽음이 간과된 일상에 관하여 고찰해 보겠다.
6) 키에르케고르, 『불안의 개념/ 죽음에 이르는 병』, 강성위(역), 서울: 동서문화사, 2008, p.185.
1) 예정된 한계 상황
유한한 삶을 사는 인간의 최종적인 한계 상황은 죽음이다.7) 그리고 죽 음은 인간의 가장 확실한 장래(將來; 장차 다가올)다. 그래서 나는 이 부분의 제목을 ‘예정된 한계 상황’이라고 정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동행 하는 한계 상황(죽음)’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지 모른다. 죽음은 가 능태로서 항상 실존 곁에서 대기한 채, 등장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기 때 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은 알지만 당장은 죽지 않을 것이라는 편리한 ‘착각’을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시간과 함 께, 혹은 죽음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곤 한 다. 시간이라는 강의 도도한 흐름에 빠져있으면서 그 사실을 무시하고, 마치 어디 강둑에라도 서있는 것처럼 자기 삶을 방관하기 때문에, 헤엄 쳐보지도 못한 채 휩쓸려가는 것이다. 인간 한계 상황인 죽음이 현재의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살펴보기 위해, 첫째, 현존재(인식 주체로서 의 나)8)의 죽음과, 둘째, 유대(紐帶)관계에 있는 타인의 죽음에 관하여
7) ‘한계 상황’(Grenzsituation), 또는 ‘극한 상황’이라는 용어는 야스퍼스(Karl Jaspers 1883~1969)가 인간이 스스로 피할 수 없고, 인간의 존엄성이 짓밟히는 곤경, 즉 싸움, 고민, 죄책, 죽음 등의 상황을 일컬어 처음 사용하였다. 나는 여기서 죽음을 중심으로 최종적 한계 상황을 논하였다. 야스퍼스의 ‘극한 상황’에 관해서는 다음 책 참조. 김흥호, 『서양철학 우리 심성으로 읽기Ⅱ-실존들의 모습』, 서울: 도서출판 사색, 2004, p.119.
8) 본 논문에서 현존재(Dasein)라는 용어와 개념은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의 책에 의거하여, 스스로도 ‘세계내의 존재’이면서, 모든 것에 대해, ‘물음’을 제기하고 ‘존재 이 해’라는 규정을 내리는 ‘나’로 정의한다. 그리고 이러한 ‘물음’과 ‘존재 이해’는 변할 수 있기 때 문에, 현존재 또한 변화의 가능성을 지닌 것이다. 한편, 실존이란 개념은, 현존재인 ‘나’가 자신 을 상황에 따라 규정한 그때그때의 ‘나’로서 규정한다. 즉, 본 논문에서는 현존재는 자기를 규 정하는 주체로서의 ‘나’이고, 실존은 규정되어진 실체로서의 ‘나’로서 구분한다. 현존재와 실존 개념은 하이데거의 정의에 따랐으며, 아래 인용문 참조하였다.
“물음이라는 존재가능성을 지닌 존재자를 우리는 술어적으로 현존재(Dasein)라고 부르기로 한 다.”(p.17).
“현존재는, 나라는 존재와 더불어 나라는 존재를 통하여 나라는 존재가 나 자신에게 열려 있는 그러한 존재이다. 존재이해는 그 자체로 현존재의 존재규정이다.”(p.22).
“현존재가 그 자신에 대해 이러이러한 모양으로 그 자신에 관계할 수 있는 본질적 존재 그 자 체, 그리고 현존재가 항상 어떤 형태로 관여하게 되는 존재 그 자체를 우리는 실존이라고 이름
<참고그림 3> 프란시스코 고야, [자식을 잡아먹는 크로노스]
(Saturn Devouring One of His Sons), 1820~1823, 143.5×81.4cm 살펴보겠다.
(1) 현존재의 죽음
물리적인 시간은 흘러간다. 그리고 결 코 흐름을 멈추지 않는다. 사람은 멈추 지 않고 흐르는 시간을 두려워한다. 시 간이 흘러가면서 모든 존재자를 지워버 리기 때문이다. 사물도 사람도, 사건도, 그리고 존재했다는 기억조차 사라지게 만든다. 무엇보다 이 생성과 소멸을 지 켜보고 있는 의식, 즉 ‘나’의 현존재를 지워버린다.
시간의 신 크로노스(Chronos)가 자기 자식들을 다 잡아먹었듯이, 시간 속에 태어나 살고 있는 인간은 결국 시간에게 먹힐 운명이다.9) 시간은 일정한 속도로 전진하면서, 그 앞의 존재자들을 남김없 이 밟고 지나간다. 시간은 빨라서가 아 니라 잠시 멈추지도 않고, 끝나지도 않 기 때문에 당할 수가 없다. 시간은 모든 존재자의 영원성을 짓밟으면서 스스로는 영원인 듯 나아간다.
여기 시간(Chronos)의 모습을 그린 고
야(Francisco de Goya 1746~1828)의 그림이 있다. 고야는 말년에 자 기 별장에 은둔해 14점의 ‘검은 그림들’이라 불리는 벽화를 그렸다.10)
짓기로 한다. ... 나의 지금의 실존을 내 것으로 장악하든 또는 그것을 지워 없애버리든 나의 실존은 그 때의 현존재 자신에 의해서만 결정된다.”(pp.22~23). 마르틴 하이데거, 『존재와 시 간』, 전양범(역), 동서문화사, 1992.
9) 하랄트 바인리히, 『시간추적자들』, 김태희(역), 황소자리, 2008, pp.162-164.
10) Juan José Junquera, 『The Black Paintings of Goya』, Scala publishers Ltd, 2003, pp.64-65.
그 그림들은 세속적인 궁정화가로서 그렸던 왕실 초상화와도 다르고, 사 회를 날카롭게 관찰하고 풍자한 판화 작품과도 다른 그림이었다. 늙고 병든 고야는 세속의 명예에도 시비에도 관심이 없었다. 그가 비밀리에 자신의 별장 벽에 그린 이 그림들은 자신만을 위한 고백서 같은 것이었 다. 그는 자신의 유한한 삶과 마주하고서, 인간의 실존적 한계 상황을 압도적인 어둠과, 어둠을 가르는 비명 같은 빛으로 표현하였다.
그 중 한 작품이 [자식을 잡아먹는 크로노스]<참고그림 3>이다. 크로 노스가 자기의 자식들을 다 잡아먹는 신화는 종종, 목동의 신인 크로노 스(Kronos; Crous; Cronos)가 시간의 신(Chronos)으로 혼동되면서 시 간의 은유로서 많은 문예 작품의 소재가 되곤 했다.11) 고야 역시 시간 이 자기가 낳은 존재자들을 다 삼켜버리는 것을 비유하기 위해, 이런 장 면을 그렸다고 볼 수 있다.
사투르누스(Saturnus) 또는 크로노스(Kronos), 즉 시간이 제 모든 새끼를 잡아먹는 일은 항상 지속된다. 오직 끊임없이 달림으로써, 그리고 끊임없이 일함으로써, 우리는 (대략 70년가량) 그를 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마침내 우리도 잡아먹는다. 어떤 왕 이 또는 왕들의 신성동맹이 시간에게 멈추라고 명령할 수 있으며, 생각으로나마 시간에게서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12)
시간의 신은 죽음의 신이기도 하다. 크로노스는 낫을 든 죽음의 신으로 묘사되곤 한 것이다. 여기서는 낫은 등장하지 않지만, 검은 어둠으로부 터 튀어나와 눈알을 굴리며 끔찍한 식사에 열중하는 모습은 죽음 그 자 체다. 자식의 배신을 두려워하거나 복수심에 분노하는 모습이 아니다.
그저 먹는 것 외에는 관심이 없는 아귀(餓鬼)처럼 보인다. 이처럼 냉혹
11) “크로노스는 원래 농업의 신이었지만 여러 세기를 통해 시간의 신 역할을 맡았다. 많은 학자 들은 그리스 어로 ‘시간’이라는 뜻의 크로노스(Chronos)라는 단어가 자기 자식을 잡아먹은 신 의 이름 크로노스와 아주 흡사하다는 것을 밝혀냈다. ... 자녀를 삼켜먹는 크로노스의 모습은 모든 피조물을 잡아먹는 시간의 모습과 동일시되었다.” 루치아 임펠루소, 『그리스 로마신화, 명화를 만나다』, 이종인(역), 서울: 예경, 2006, pp.171-172.
12) 토머스 칼라일, 『의상철학-토이펠스드뢰크 씨의 생애와 견해』, 박상익(역), 경기도 파주: 한 길사, 2008, pp.204-205.
한 시간의 식욕 앞에 동정을 구하거나 비난을 퍼붓는다고, 시간이 식사 를 멈출 리는 없다. 제우스의 형제들이 아비에게 안긴 채 살점을 뜯기고 있는 것처럼, 인간은 지금 살아가고 있는 그 시간의 품안에서, 시간에 의해 생명을 잠식(蠶食)당하고 있다. 시간의 신이 곧 죽음의 신이라는 것은, 인간이 최후의 순간에 임해 죽임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태어난 순간부터 죽음에 이르는 일생에 걸쳐 죽음과 함께 한다는 것을 의미한 다.
이것은 단순히 생명의 노화 현상을 말하는 것만은 아니다. 그렇게 되면 죽음은 또 멀어진다. 죽음은 최후의 시각에 맞춰, 애매한 미래(未來; 아 직 오지 않은)라는 시간 속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다. “태어나자 마자 죽을 연령에 도달해 있다.”13)는 말처럼, 죽음은 언제든지 닥칠 수 있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의미로 인간을 ‘죽음에 임하는 존재’라고 하였 다.14)
현존재는 존재하는 동안 스스로의 미연(미숙)을 항상 지니고 있으 며, 그와 마찬가지로 스스로의 종말 역시 지니고 있다. ... 세계 속 존재의 죽음이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끝나는 것’이란 현존재가 종 말에 도달해 있는 현상이 아니라, 그 존재자가 종말에 임하는 것을 말한다. 현존재는 세계 속에 존재하자마자 죽음을 떠맡는 존재양식 의 일종이 된다.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죽을 연령에 도달해 있다 .”15)
인간의 실존 상황(삶)은 언제든지 한계 상황(죽음)으로 돌변할 수 있는 것이다. 실존은 모든 가능성으로 열려있는 상태이므로, 죽음은 그 가능 성 중에 하나로서 항상 여기 있다. 삶에 처했다는 것은 곧 죽음에도 처 해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실존의 현실이다.
13) 주석15 참조.
14) “죽음에 임하여 존재하는 현존재는, 그 사망에 도달하기 전까지 사실상 끊임없이 임사(臨死), 즉 죽음에 임하고 있는 것이다.” 마르틴 하이데거, 앞의 책, p.332.
15) 위의 책, p.315. 큰 따옴표 안의 문장은 A. 베른트 및 K. 브르다흐 편저, <보헤미아 출신 농 부> 제 20장을 재인용.
(2) 영별(永別)
죽음이 닥쳐진 현실의 문제라는 것을 다르게 말하면, 죽음은 내가 살아 있을 때 유효한 의미를 가진다는 것이다. 한편, 정작 죽음의 순간에 이 르면, 그 순간 현존재가 소멸하기 때문에 죽음의 의미는 더 이상 문제될 수가 없다. 한 사람에게 죽음이 지극하게 다가오는 것은 자신의 죽음 때 문이라기보다, 그와 유대 관계에 있고 공동의 삶을 형성하고 있는 친밀 한 사람들의 죽음 때문이다.
인간은 각자 독립된 인격체지만, 한 사람의 삶이란 단독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인연(因緣)으로 타인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있 다. 그 인연, 즉 인간관계가 사랑으로 이어진 관계일 때, 나와 너의 경계 는 모호해져서, 타인의 존재가 자기 이상으로 소중하다고 느껴지기까지 한다. 이때, 그 관계, 즉 ‘사랑’은 심지어 그와 나보다 더 소중해져서, 생 명을 걸고라도 지키고 싶은 가치가 되어버린다. 그래서 그러한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의 죽음은, 남아있는 사람에게 그 사람을 잃는 것이 될 뿐 아니라, 삶의 의미가 되어준 사랑까지 잃어버리는 것이 된다.
예를 들어, 어린아이가 부모를 잃게 되면 고아가 되기 때문에, 현실적 인 환경이 급격히 변하고, 이런 변화에 따른 정신적인 충격도 받을 것이 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2차적인 것이고, 가장 큰 고통은 부모와 맺고 있었던 사랑이라는 관계가 영원히 깨졌다는 것이다. 애착하는 이들 이 죽음으로 사라질 때, 이것은 ‘영원한 이별’로 여겨지고 절대적인 상실 감을 가져온다.
뭉크(Edvard Munch 1863~1944)의 [병든 아이]<참고그림 4>16)는 죽음에 임박한 소녀와 그녀를 간호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 다.17) 유난히도 가족의 죽음을 많이 겪은 뭉크는 질병과 죽음을 삶의
16) 1885~6년에 제작된 첫 번째, 병든 아이[The Sick Child]의 원제는 [Study]인데, 뭉크는 제목에 신경 쓰지 않는 편이었기 때문에, 한 작품에 여러 가지 제목이 붙는 경우가 많았다. 수 프리도, 『에드바르 뭉크: 세기말 영혼의 초상』, 윤세진(역), 서울: 을류문화사, 2008, p.167, 180 참조.
17) 뭉크는 이미 죽은 누이 소피와, 그녀 보다 더 오래 전에 죽은 어머니 레우라를 그리고자 했 기에, 모델이 필요했는데, 전문적인 모델을 쓰지 않았다. 대신 아버지의 환자 중에 영양실조에
<참고그림 4> 에드바르 뭉크, [병든 아이], 1885~1886, 캔버스에 유채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면서 살았다. 특히 다섯 살에 겪 은 어머니의 죽음과, 몇 년 뒤 어머니처럼 의지했던 누 이 소피의 죽음은, 뭉크에게 어머니라는 존재의 상실감을 두 번에 걸쳐 느끼게 하였 다.
어린 뭉크는 그 자신이 폐 병으로 죽음 직전까지 갔던 경험이 있어서, 죽음의 공포 에 대하여 여느 철없는 아이 답지 않게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죽음에 순응하라는 아버지의 말에 위로받지 못 하고, 마지막까지 죽음을 두려워하며 살기를 희망했던 누이의 심정을 그 누구보다 이해했다. 그런데 그 절실한 기도가 외면되고, 결국 서서히 죽 어가는 누이의 모습은 죽음보다 더한 ‘절망’의 모습이었고, 그의 영혼에 깊은 상처를 남기고 말았다.
훗날 화가가 된 뭉크는, 첫 번째 ‘영혼의 회화(soul art)’를 제작하기 위 해 바로 그 장면, 누이의 죽음을 선택했다.18) 제발 자신에게서 죽음을 데려가 달라던 소피의 간청을 어린 뭉크는 들어줄 수 없었지만, 그녀의 꺼져가는 생명의 불꽃을 ‘그림의 영혼’으로 옮겨 영원하게 하고 싶었던
걸려있던 베치 닐센이라는 열두 살짜리 소녀와, 뭉크에게 어머니 같은 존재였던 이모 카렌을 보고 작업하였다. 뭉크에게 모델은 외모가 닮았을 뿐 아니라, 실제 비슷한 상황의 인물이어야 했던 것이다. 뭉크는 ‘영혼의 회화(soul art)’라는 진정성이 깃든 그림을 그리고자 했기에, 외양 만 닮게 꾸민 전문 모델 대신, ‘진실한’ 모델을 찾았던 것이다. 수 프리도, 앞의 책, p.170 참 조.
18) 뭉크는 당시 인상주의 미술이 표면적인 것에만 관심을 갖기 때문에, 자연의 외피에 관심을 두는 사실주의 미술과 다를 바 없다고 비판하고, 인상주의 미술을 단지 기술적으로만 향상된
‘비누 미술(soap art)’이라고 명명했다. 그리고 자신의 작업은 실제 삶에 관심을 두고 영혼의 문제를 다루는 미술로서 ‘영혼의 미술(soul art)’이라고 했다. 그 첫 번째 작품이 바로 [병든 아 이]였다. 위의 책, p.163 참조.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뭉크는 죽음에 집착한 것이 아니라 삶, 생명 에 집착한 셈이다. 신이 주는 내세(來世) 따위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근 대의 자유로운 영혼이었던 뭉크는, 죽음을 신에게 맡기기보다 불가해(不 可解)한 영역인 암흑 상태로 두고, 여기서 벗어나려는 불행한 영혼들을 그림 속에 피난시켜 영원히 살아나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19)
저 멀리/ 하늘과 바다가 만나는 부드러운 수평선/ 바다, 존재만큼 이나 불가해한 것/ 존재, 죽음만큼이나 불가해한 것/ 죽음, 동경만 큼이나 영원한 것
에드바르 뭉크20)
그는 1년 동안이나 [병든 아이]를 그리는데 매달렸다. 그림을 발표하자 그의 인생처럼 가혹한 엄청난 악평에 시달렸다. 그러나 그 후로도 몇 번 이나 이 주제를 반복해서 그렸고, 판화로 제작하기도 했다.
뭉크는 왜 이 그림을 그렸을까? 그는 단순히 죽음을 탐구하거나, 자기 인생에서 겪은 사별(死別)이라는 정신적 상처를 드러내려던 것이 아니 다. 뭉크는 “<병든 아이>에서 앉아 있는 인물은 나 자신은 물론 내가 사 랑했던 모든 이들을 대변한다.”21)고 말했다. 나는 이 문장에서, 그가 대 변하고 싶었다던 ‘자기 자신’과 ‘모든 이들’ 보다 더 중요한 단어가 ‘사 랑’이라고 생각한다.
이 그림은 무엇을 보여주는가? 죽음이나 사별이 아니라 한마디로 말해 서 그것은 ‘사랑’이다. 화면 안을 보면, 당시 어머니는 이미 죽고 없었는 데, 뭉크는 죽어가는 소피에게 가장 필요한 어머니를 그려 넣어, 누이 곁에서 위로해주도록 하였다. 또 화면 밖에는, 둘의 슬픈 재회를 그리면 서 눈물을 흘리는 뭉크가 있다.22) 즉, 누이의 마지막 숨결을 그림 속에
19) “자신의 내면을 응시함으로써 인생 경험이라는 무상하고 특별한 실험실에서 영원한 진리의 이미지를 만들어 내겠다는 것이 그의 포부였다.” 수 프리도, 앞의 책, p.15. (밑줄: 필자).
20) 오슬로 뭉크 미술관 자료 N.613, 앞의 책, p.159에서 인용.
21) 울리히 비쇼프, 『에드바르드 뭉크』, 반이정(역), 서울: 마로니에북스, 2005, p.12.
22) “감정이 북받친 나머지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그는 착색 스프레이를 집어 들고 넘쳐흐르는 눈물을 표현하기 위해 캔버스 위에 액체 안료를 뿌렸다. 그러자 커다란 줄무늬가 상처 입은 캔 버스 위에서 눈물처럼 흘러내렸다.” 수 프리도, 앞의 책, p.171.
서라도 재생하고자 반복해서 그리고 또 그리는 뭉크의 사랑이 있는 것이 다.
인간은 자신의 죽음을 실제 경험할 수 없고, 타인의 죽음은 피상적으로 만 인지할 뿐 공감하지 못한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죽음을 맞게 될 때, 비로소 죽음에 가장 가까이 근접하게 되는데, 그때 보게 되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사랑인 것이다. 그 사람이 얼마나 자신에게 소중한지, 그 를 얼마나 죽음으로부터 지키고 싶은지를 절실히 깨닫게 된다.
... 사랑 혹은 무조건적 성실만이 인간의 영원성과, 사랑받는 자의 절대적 가치를 인정하는 빛 안에서만 창조될 수 있는 약속을 포함 하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의 긍정은 사랑받는 자의 불멸의 주장이다. ... 시간과 죽음의 세력도 사랑하는 사람의 존재를 파괴 할 수 없다. 이것은 죽음의 숙명을 벗어난다는 것이 아니라, 사랑 의 관계 안에서, 죽음에 의해 끊어지지 않는 확신이 있다는 것이 다.23)
물론 항상 극단적인 상황에서만 이러한 사실을 깨닫는 것은 아니다. 정 신적으로 이완된 일상 속에도 죽음의 불안은 드리워져있기 때문에, 사람 들은 무의식적으로 영별을 준비하려 한다. 사람들이 조금 특별한 시간이 나 장소에 있게 되면 기를 쓰고 기념사진을 찍으려 하는데, 이것도 그러 한 노력 중에 하나다. 그것은 아마도 소중한 이들과 영원히 이별하기 전 에, 뭉크의 ‘영혼의 그림’과 같은 ‘영혼의 사진’이라도 찍어서, 그들만의
‘영원한 가치’를 지키고자 하는 것이다.
2) 일상의 비(非)일상성
삶은 생로병사의 극적인 순간 뿐 아니라, 더 많은 평범한 일상으로 이
23)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자이자 극작가, 가브리엘 마르셀(Gabriel Marcel, 1889~1973)의 사상 과 주장을 소개한 다음 책의 부록Ⅱ 참조. 서배식, 『실존 철학들의 같은 점과 다른 점』, 서 울: 문음사, 1999, p.229. (요약: 필자).